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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없어, 인마! 괜찮다고 하더니 신경은 엄청 쓰네. 거짓말이야, 인마. 혹도 안 났어!”
“나는 왜 이렇게 표정관리가 안 되냐?”
지우가 허허실실 웃어대는 걸 보면서 용하도 드디어 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근데 시현이는 생각할수록 대단한 것 같아요. 시현이 때문에 법 조문도 바뀌게 생겼고 새 무기 하나가 뚝딱 만들어진 거잖아요. 뭐니뭐니해도 진짜 특별한 차크라를 가졌고요. 그동안은 시현이한테 헌터가 하나씩은 붙어 있어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거네요.”
태인이 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에 시현이의 얼굴만 가득 차서 모두들 움찔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시현은 화면에 엄마와 아빠 얼굴이 보이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의 얼굴을 만지려고 다가와있었다.
“뒤집기 하기 전에는 시현이 보는 거 되게 편했는데. 이제 음마, 음마 해. 곧 엄마도 부를 것 같아. 으빠도 하는데 아빠도 곧 부르겠지? 삼촌이라고는 언제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 사진을 자주 보여주긴 했는데 시현이가 알아보나보다. 엄마랑 아빤줄 아나보네. 시현아. 아빠 어딨어, 아빠?”
용하가 말했다.
“빠!”
시현이 지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는 어딨어, 시현아, 엄마?”
“암마!”
시현이 이번에는 임정을 가리켰다. 임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얼굴로 화면을 가득 채운 시현의 얼굴을 만졌다. 시현은 목과 턱에 힘을 주고 얼굴을 들고 있는 게 힘에 부쳤는지 끄덕끄덕하더니 끝내 얼굴을 툭 떨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목은 가늘고 머리만 큰 아기의 서러움이 담긴 울음이었다. 눈 앞에서 자식이 울고 있는데 달래주지 못하는 심정은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수고들 하시고요. 시현이 운다고 너무 울적해하지 말고요. 잘 보면 눈물도 안 흘려요. 엄살만 늘어서 그런 거예요.”
용하가 임정을 신경쓰면서 말을 하고 시현을 안자 시현은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제법 웃기도 잘 했다.
이 세상에서 클랜 A의 클랜원들을 웃음 하나로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
리드를 절취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 조문의 개정을 두고 대한민국이 들끓었다.
여론은 양분되었다. 리드를 훔친 범인과 헌터 협회의 데이트를 고친 공범까지 일당이 모두 체포되면서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일각에서는 그들을 사형까지 시키는 것은 너무 중하다는 주장을 했다. 어쨌거나 그들이 한 짓은 리드를 훔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것을 사형으로 처벌한다면 형이 너무 과중하다는 주장이었다.
리드가 사라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예견이 가능했을 거라는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그건 현대를 살아가면서 감내해야 하는 여러 가지 위험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맞섰다.
시현에게 일어날 뻔했던 일에 충격을 받은 지우와 클랜 A의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들이 직접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를 못할 사람들인 거지. 그 사람들한테는 그 상황을 경험하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책상 머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관심받을 짓이 없을지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보다는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받고 눈썹 그리는데 시간을 더 많이 쓸 사람들일걸?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건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걸 경험하게 해 주는 수밖에.”
이익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이익헌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지만 이익헌과 야로슬라프가 같이 클랜 A에 휴가 신청을 냈을 때는 정확히 예상되는 그림이 있었다.
클랜 A는 강현과 세진을 소환하고 이익헌과 야로슬라프를 한국으로 보냈다. 전력의 누수가 컸지만 시현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안전해야 한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했다.
두 사람이 빠지면 클랜 A의 전력 손실이 크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 봐야 네 시간이 걸리는 레이드가 여섯 시간이 걸린다는 정도였다.
야로슬라프와 이익헌은 가장 강력하게 법 개정에 반대하면서, 법 개정을 주도하는 국회의원들의 저격수로 자처하고 나선 국회의원 강요섭을 노렸다. 강요섭은 연일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인권이 초토화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과장된 표현으로 관심을 이끌려고 애를 썼다.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보좌관과 있을 때는, 카메라를 받으면 자기 얼굴이 너무 커 보이는 것 같지 않냐면서 샐쭉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다. 보좌관과 정책연구진들 중에는 리드 절도에 대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강요섭은 강경했다.
“지금 이미지가 잘 잡혔단 말이야. 이렇게 계속 가면 돼. 지금은 나랑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지지자들이 나를 중심으로 결집될 거라고.”
“정말로 리드가 없어져서 생기는 문제가 심각하긴 합니다.”
보좌관이 말했다.
“그럼 늪이 안 생길만한 곳에서 살면 되는 거지.”
“요즘에 그런 곳이 없질 않습니까. 익스트림 헌터의 선아영 대표가 살던 빌라 주변에도 늪이 나타났었잖습니까. 안전지대가 없어요.”
“이런 게 이슈만들기가 좋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런 때 혼자 다른 목소리를 내면 의지가 강하고 생각이 깨어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남들이 다 놓치는 걸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내 뜻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리드를 훔친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잖습니까. 재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요.”
“죽을 사람은 무슨 짓을 해서 피하려고 해도 죽게 돼 있어. 살 사람은 사는 거고. 대의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한 거지.”
강요섭은 입에서 나오는대로 떠들어댔을 뿐 자기가 어느쪽 논리로 말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 일을 당한 게 자기라는 사실에 분개할 게 아니라 그게 역사의 흐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는 전부 다 죽을 텐데 자기가 입은 피해만 내세울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일을 직접 당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저라도 마찬가지고요. 그건 개인의 문제로 치부돼서는 안 됩니다.”
강요섭의 보좌관은 감정의 조절에 슬슬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 그런 일을 안 당하면 되지.”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조심해도 갑자기 괴수가 나타나서 생활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걸 일반인들이 어떻게 막습니까?”
“애초에 거기에 살지 말던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해서 얻는 게 뭐지?”
“이건 치안대에 전면전을 선포하시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노리는 것도 그거고. 유권자중에 헌터가 많겠어, 일반인이 많겠어? 나는 이 문제를 헌터 대 일반인 구도로 끌고 나갈 거라고. 권력을 남용하는 치안대로부터 일반인을 구하려는 투사 이미지.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어? 나 피부 관리 좀 받아야겠지? 어제 어떤 기자새끼가 기습적으로 내 사진을 찍어서 올렸는데 피부 상태가 영 엉망이던데. 말 나온 김에 샵에 예약 좀 해 줘.”
강요섭은 거울 앞에서 눈을 치떴다가 부드럽게 떴다가 웃음을 지어보았다가 하면서 아예 잇몸 색깔까지 검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아랫사람들한테 참 잘 해 왔나봐. 거리낌없이 할 말을 다하고 기어오르려고 하는 걸 보면. 건방지게. 응?”
아무래도 오래 함께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보좌관은 고개를 돌렸다.
***
바디 펌의 부사장이 면담을 요청한다고 했을 때 강요섭은 제 판단이 들어맞은 거라고 생각하며 우쭐했다.
국회의원이라고는 하지만 한 일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이대로 임기가 끝난 후에는 어디에서 뭘 하게 될지 불안정하기만 한 지위였다. 그런데 법 개정을 반대하면서 나름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일이 아니라면 바디 펌의 부사장이 자기같은 사람에게 관심이나 가졌겠는가 했다.
강요섭은 이익헌을 환대하며 맞아들였다.
이익헌은 성공한 남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으로 강요섭의 앞에 나타났다. 헤어 스타일, 몸을 감싸고 있는 값비싼 정장과 시계, 최고급 구두와 향수 냄새.
강요섭은 잠시 넋을 잃은 채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두르고, 그게 대단하다는 인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소화해내는 이익헌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그를 경원하는 마음까지 생겨났다.
강요섭도 이익헌이 헌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헌터도 아니고 클랜 A의 클랜원이다. 세계 헌터 랭킹 1위에서 7위까지를 모두 클랜 A의 클랜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의 A급 헌터들의 추종도 불허하는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A급 헌터와의 기본 공격력의 차이는 익스트림 헌터가 클랜 A의 클랜원 전용으로 제공해주고 있는 무기의 공격증폭률로 커버가 되고도 남았다.)
저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한테서 헌터 타투까지 나타났다니.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불공평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강요섭은 일단은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이익헌도 일단 헌터라면 여기에 온 이유가 뭘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이익헌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레이드를 하다가 한국에 돌아와보니 한국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이 되더라는 말은 그냥 흘러가듯이 가볍게 하고 넘어갔다. 강요섭은 그게 이익헌이 하려고 하는 말의 요지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생각을 장황하게 늘어 놓으려고 했다.
“아니. 논쟁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독창적인 생각을 가진 분이 계시다기에 한 번 얼굴이나 틀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해봤던 거고요. 한 번 봤으니 다음부터는 종종 자리를 마련해서 얘기도 나누고 하죠.”
“그렇습니까.”
뭔가 아직 할 얘기가 남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강요섭은 이익헌을 놔주었다.
“리드가 참 문제긴 문젭니다. 리드가 없어도 문제가 되는데. 혹시 그 얘기를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아. 이건 어떤 식으로든 외부에 유출되면 안 되는 내용입니다. 의원님 혼자서만 알고 계시겠다고 해야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강요섭이 그런 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미 한 쪽 귀가 얼굴만큼 부풀어오를 지경이었다.
“예. 저를 믿고 말씀해 보세요.”
강요섭이 자신있게 말했다. 절대로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을 믿는다면 믿은 사람이 바보인 거지 자기 잘못은 아닌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사동 야산에 몇 주 전에 늪이 발견됐는데 그 주변에 사람들 발길이 한동안 끊이질 않았죠. 그 근처에도 전에 늪이 생겼었거든요. 공략이 끝나고 늪이 사라졌어요. 그런데 그 주위에 러프 스톤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한동안 나돌았죠. 헛소문은 아닐 겁니다. 바디 펌에서 써전이랑 사체 운반 헌터들을 보내서 괴수 사체를 회수했는데 러프 스톤은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공대장한테 확인을 했더니 늪에서 수거해서 가지고 나오다가 잃어버렸다고 하더군요. 공대가 다 나서서 며칠을 찾았는데 찾질 못한 것 같더라고요. 찾았다면 가져왔을 겁니다.”
“공대장이 혼자 먹으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요?”
강요섭이 대뜸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