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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바디 펌이랑 익스트림 헌터에서 나섰는데도 하나도 구해지질 않았어요.”
용하는 시현을 바라보았다. 헌터 타투가 생겼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던 지우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에서 울렸다. 아이의 운명이 그렇게 결정지어질 줄 알았다면 지우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것을 거부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 믿어. 아무 일 안 생기게 해 줄 테니까, 삼촌이.”
용하가 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현은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말간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미국으로 바로 가는 건 아니죠? 나도 주변 정리를 좀 해야 해요.”
용하가 말하자 강현과 지연은 당연히 그러셔야 할 거라면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간에 자기들은 용하의 시간에 맞춰서 움직일 거라고 했다. 용하는 슬슬 마음이 풀렸고, 이제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
용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출근을 했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은 용하만의 생각이었던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운 나쁘게도 부장들과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다. 용하는 모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부장들을 보면 각 부서의 실적이 가늠이 될 정도로 각각의 자세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영업 1부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면서 늘 압도적인 1위를 지켜오는 부서의 수장다웠다. 1부장은 용하가 지우의 친구라는 얘기를 듣고-그걸 모르기도 어려웠다. 지우가 헌터가 된 후로 용하는 모든 프로필 사진을 전부 지우와 같이 찍은 사진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용하를 영업1부로 데려가기 위해서 물밑 작업을 벌여왔지만 용하가 그냥 4부에 남기로 하면서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갈등이 있거나 말거나, 용하는 지우에게 애초에 실적을 위해서 부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1부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1부에서는 용하를 데려올 수만 있으면 대대적으로 안지우에게 로비를 해서 바디 펌과의 계약을 따내려고 했다. 바디 펌을 잡을 수만 있으면 300퍼센트의 매출 신장까지도 기대할 수 있을 거라면서 들떠 있었기에 용하가 거절을 했을 때는 심적인 타격이 컸다.
용하는 지우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지우가 자신의 사정을 챙겨줄 정도가 된다면 자기가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랬으니 위에서 강요를 한다고 해도 지우에게 압력을 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지우로서는 죄책감을 심하게 느껴야 했을 것이다.
용하는 구석에 서 있는 영업4부장에게도 눈을 맞추면서 인사를 했다.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를 받았다. 간단하게 평가를 하자면 영업4부장은 사람은 좋은데 기회를 잡지도 못하고 기회를 만들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신대리.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신대리는 지각을 자주 하는 것 같아요. 4부가 평소에도 워낙 큰 소리를 안 내고 조용 조용히 넘기는 스타일이라서 그런가.”
영업1부장이 말했다.
이건 또 웬 헛소린가. 용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용하는 회사에 다니는 동안 지각을 한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용하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업4부에서만 사람들을 자꾸 빼내가서 지금 4부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래서 용하가 과중한 업무를 떠맡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것을 용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사람들은 도대체 자기가 밟아버리기로 한 사람을 얼마나 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지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요?”
용하가 말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그냥 속으로 삭였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신용하 대리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4부장도 나서서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1부장의 말을 더 믿는 것 같았다. 사실이 뭐든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희한한 일입니다. 나는 신대리가 지각하는 걸 자주 본 것 같은데. 그럼 내 기억이 잘못 됐다는 말일까요?”
1부장이 말했다.
“아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제가 갑자기 지각을 자주 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걸 테니까요.”
용하가 말하자 4부장은 그냥 참으라는 눈짓을 했다. 용하에게는 이제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흠.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설쳐서 미안하군요.”
용하는 조용히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돌아섰다.
“옷차림은 그게 뭔가. 자네 그러고 외근 나가서 고객들을 만나나?”
2부장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질세라, 3부장도 꼬투리를 잡았다.
영업부는 회사의 꽃이고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인데 머리가 너무 긴 것 아니냐, 와이셔츠 색깔이 너무 야하지 않냐, 구두 디자인이 너무 날티가 나고 경박해 보이고 사람이 전체적으로 싸구려로 보인다. 점점 불평들이 인격 모독에 가깝게 이어졌다.
“무능력한 사람들은 자기가 왜 무능력한지 스스로는 절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남이 말해주면 그건 또 고깝게 들어요. 그러니까 발전이 없는 거지.”
2부장이 쐐기를 박았다. 1부장은 나름대로 속이 풀렸는지 그만들 하시라고 허허 웃으면서 말을 했다.
“영업 1,2,3부 실적 전부 합한 게 얼마나 됩니까? 이번 달에 4부가 그걸 뒤집어 버리면 부장님들이 무능력한 사람들인 거고 남의 말 고깝게 듣는 사람인 거고 야한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게 되는 건가요?”
용하가 말했다. 부장들의 눈썹이 당장에 이마선까지 올라갔다.
“뭐라고 한 거야, 지금! 사람이 말이야. 지각을 해서 회사 생활을 좀 더 성실히 하라고 충고를 해 주면 그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하면 되지. 뭐라고? 어디서 건방지게 지금!”
2부장이 말하자 1부장이 손을 저으면서 2부장의 말을 막았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그들이 내려야 할 층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영업 1,2,3부의 실적을 다 합한 걸 뒤집겠다고 한 겁니까, 신대리?”
1부장이 말했다. 그때 4부장이 앞으로 나섰다.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신대리. 왜 이래. 신대리가 성실하게 회사 생활한다는 건 내가 알아. 내가 알면 되는 거지 왜 이렇게 소란을 부려?”
“그렇죠. 그게 4부한테 어울리는 일이지. 그렇게 상처나 핥아주고 있으라고요. 네 잘못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러니까 발전이 없이 항상 그 모양이지. 평균 깎아 먹는 게 미안하지도 않아요? 남의 발목 잡는 게 미안하지도 않냐고요.”
2부장은 작정이라도 한 듯이 4부장을 향해 쏘아붙였다. 하지만 1부장은 다시 손을 저었다. 이번에는 이전에 했던 것처럼 그냥 시늉만 하는 손짓이 아니었다. 2부장이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하고 깝치면 소리라도 지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4부장은 그런 1부장의 표정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1부장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대리. 1,2,3부 실적을 다 합한 걸 뒤집겠다고 한 거죠?”
용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젠장. 그냥 1등을 해 보이겠다고 할 걸.’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용하의 회사는 거래가 허용되는 물건은 전부 다 취급하는 업체였다. 용하는 원래 영업부가 아니었지만 영업부로 갑자기 발령이 난 후 한동안의 멘붕을 겪고 두꺼운 브로슈어를 들고 다니면서 거래처를 발굴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것도 이제 다 옛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대리. 우리 이렇게 합시다. 신대리 정도 되는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할 것 같지도 않고, 신대리가 한 말을 무시하면 그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은데. 내가 제안 하나 하죠. 그래요. 신 대리가 자신했으니까 해 봅시다. 4부가 1,2,3부의 실적을 전부 합한 걸 넘지 못하면 신 대리가 1,2,3부 중에 매출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옮기는 걸로 하죠. 절차는 내가 다 알아서 진행시킬 테니까.”
“……!”
용하와 4부장의 얼굴빛이 갑자기 굳어졌다. 4부장은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용하의 얼굴을 보는 건 그 날이 마지막이 될 거였으니.
용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잠시 머리를 식혔다. 마지막 날에 이게 무슨 짓인가 했지만 마지막 날까지 자기가 잘못하지도 않은 걸로 질책을 듣고 묵묵히 있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제안은 들었고 거기에 답변을 할 시간이 필요하긴 할 것 같습니다. 4부가 이겼을 때는 뭘 요구할지 거기에 대한 내용도 준비해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하가 말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그걸 준비할 필요가 있기는 할까요? 4부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영업1부장이 말했다.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것이 더 얄미웠다.
“영업 1,2,3,4부로 나뉘어 있는 건 조직 관리에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4부가 이기면 이참에 조직을 개편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용하는 이제 무념무상이었다.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뭐라고 답변을 할지 생각해 봤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겠더라. 그냥 그렇게 하자고 속으로는 거의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차피 퇴사를 한 이후부터는 자신의 연봉이 이 사람들이 받는 연봉의 수 십 배에 달하게 될 테고 자기가 굴릴 차가 이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보다 스무 배는 비쌀 텐데 이제 와서 아웅다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용하가 물었다.
명백히 영업부장들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영업1부장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좋습니다. 바로 전무님을 뵙도록 하죠. 그 문제는 내가 책임을 지고 처리하겠습니다. 그럴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1부장의 말에 용하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용하가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리자 용하의 뒤를 4부장이 따라 내렸다. 4부장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용하의 등짝을 후려쳤다.
“도대체 어쩌려고 일을 그렇게 키워, 신 대리!”
“부장님!”
용하는 부장을 바라보았다.
“저 이 일 그만둡니다.”
“뭐, 라고?”
“이제 회사 못 나온다고요. 적성도, 의사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다른 부서로 발령내버리는 회사에 정도 없고요.”
“혹시. 다른 데서 스카웃이라도 하던가? 설마? 누가 신 대리한테?”
“부장님!”
설마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자존심이 왕창 상하고 화까지 났지만 용하는 일단 꾹 참기로 했다.
“부장님. 그러니까 부장님도 그렇게 아시고요. 그동안 신경써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신경 써 준 건 없지. 그러면 이건. 그냥 해프닝인 거라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영업1부장은 신용하의 도전을 그냥 잊어버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내게시판에 ‘영업 4부의 도전’이라는 글이 등록되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이야기가 각색되어 올라갔다.
“신 대리. 이대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가는 영영 오명이 남겠는데?”
부장이 말했다.
오명. 그따위.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도 용하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
신용하한테서 걸려오는 전화가 이렇게 반가울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이제 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지우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저절로 지어지곤 했다. 용하의 전화를 반기는 건 지우 뿐만이 아니었다. 임정도 용하씨 전화냐고 물으면서 한달음에 달려오곤 했다.
“어, 용하야.”
지우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