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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우리 시현이는. 거기에 가 본 거야? 아빠 살던 집. 아빠한테 헌터 타투를 준 늪이 있는 곳 말이야.”
용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시현에게 말했다.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 앞에서 과시를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지우와 어떤 관계일지 몰라도 지우가 일반인이었을 때부터 지우를 알아왔던 사람은 자기였다. 지우에게 헌터 타투가 나타나기 전부터, 지우가 자기 집 거실에서 어지럼증을 느낀다고 호소할 때부터 알고 지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떡밥을 강현이 바로 물었다.
“누나. 좋은 생각 같은데요? 시현이를 거기로 데려가 보죠. 데리고 늪에 들어가보죠.”
지연도 강현을 바라보았다. 좋은 생각 같았다.
임정에게서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지우가 왠지 모르게 붕 뜨고 불안을 느낄 때 지우가 그 늪에 가서 쉬다가 돌아오면 안정이 되었었다는 얘기였다. 그때가 아마 지우의 안에서 괴수의 차크라가 폭발하듯 커지던 때였던 것 같았다고 임정은 회상하듯 말하곤 했었다. 분명히 그 늪은 시현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 지연과 강현은 확신했다.
***
강현과 지연이 시현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천기정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디냐고 물어서 신용하 집이라고 하자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고 엄청나게 서운해 하더니 자기도 곧바로 오겠다고 난리였다. 지금 모두가 지우의 아파트로 가려고 하고있으니 오려거든 거기로 오라고 해서 상봉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지우가 살던 집은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천기정은 아기를 한 번만 안아보자고 하더니 그 후로는 아기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아……. 나는 결혼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아기를 낳을 수만 있다면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될 것 같아요.”
천기정은 정말로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도 아기를 낳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시현이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지기는 했어요.”
지연이 말했다.
“잘 됐네요. 아기를 갖고 싶은 사람이랑 낳고 싶은 사람이 만났으니까 둘이 같이 만들어서 낳으면 되는 거잖아요.”
강현은 곧바로 지연의 응징을 받았다.
“너도 이제 애가 아니니까 혓바닥 좀 신중하게 놀려, 이 멍청아!”
여자 주먹에 턱을 맞는다고 그게 뭐 별 거냐고 생각을 하고 무방비로 있다가 강현은 꽤 얼얼한 통증을 맛봤다.
“치. 내가 누나를 그동안 틈틈이 가르쳐왔던 걸 잊고 있었네요. 일반인 여자치고는 주먹이 꽤 매워졌는데요?”
지연은 금방까지도 화가 나 있었으면서 강현의 칭찬에 금방 흐뭇해져서 실실거렸다.
“자. 전무님. 아무리 시현이한테 푹 빠지셨어도 전무님이 시현이를 데리고 늪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는 한 이제 저한테 시현이를 주셔야 되겠는데요?”
강현이 천기정에게 말하자 천기정은 서운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강현에게 시현을 넘겼다.
"배냇저고리는 벗기고 데려가. 차크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자. 시현이 차크라를 확인해 보게."
지연이 강현에게 말을 하고 늪 아래에서의 그 역사적인 순간을 보려고 감응기를 삼각대 위에 올렸다.
모두들 감응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진은 저도 늪 아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현에게 알려주고 싶은 듯했다. 일반인들은 감응기로밖에 볼 수 없겠지만 자기는 늪 아래로 들어가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현도 세진의 마음을 눈치채고 자기가 들어간 다음에 바로 따라 들어오라고 말해 주었다. 세진은 신이 나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강현이 시현을 안고 늪 아래로 내려가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세진이 늪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늪은 단호하게 세진의 입장을 거부했다. 모두가 그 사실에 놀라워했다. 당사자인 세진의 당혹감을 따를 사람은 없었지만 늪이 그렇게 단호하게 다른 헌터의 입장을 거부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세진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틈도 없이 감응기 앞으로 달려왔다.
감응기 앞에 선 사람들은 사진사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모두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감응기에는 두 종류의 차크라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나타났다. 강현의 헌터 차크라와 시현의 괴수 차크라였다. 그리고 지금 그 괴수 차크라가 먹물처럼 늪 아래의 세상에 천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차크라가……. 저런 식으로…. 퍼지기도 하는 거예요?”
천기정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지연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시현의 차크라는 강현을 완전히 감싼 채로 뿌리를 뻗어내는 나무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한없이 뻗어간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뻗어가고서 이내 확장을 멈추는 듯했다. 하지만 차크라의 확산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진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자 모세혈관처럼 가늘게 차크라가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시간에 시현을 안고 있던 강현은 늪 아래의 세상을 보면서 어리둥정했다. 강현은 따라 들어오겠다고 한 세진이 왜 안 들어오는 건지 알지 못했다. 늪이 세진의 입장을 막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늪 아래의 세상은 경이로웠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곳의 모습이 구현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헌터를 향한 적대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맵 자체가 강현의 존재를-시현의 존재라고 해야 하겠지만- 열렬히 환영하는 것 같았다. 왠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기분마저 느껴졌다. 따뜻하고 친절한 바람이 그들을 건들었고 시현은 기분좋게 잠들었다. 시현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면 영영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다.
강현은 품 안에 안긴 시현을 바라보았다. 문득, 늪의 모든 것들, 흙 하나,먼지 한 톨, 바람 한 결까지도 시현을 숭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년을 기다려 만난 연인을 대하듯이 한없이 애처롭고 부드럽고 슬프기까지 한 느낌이었다. 시현에게서 뻗어나간 차크라가 그것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맵이 흐느껴 우는 것 같다는 생각에 강현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정도였다.
“이제 가도 될까?”
강현은 소리를 내서 물었다. 물어놓은 자신도 자기가 시현에게 물은 건지 맵에게 물은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현은 시현을 안고 늪을 떠났다. 그의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이 여인의 손길 같았다.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이 주는 느낌이 너무도 평화롭고 따뜻해서 쉽게 떨치기가 힘들 것 같았던 것이다.
강현이 늪을 나왔을 때 지연이 시현을 안으면서 강현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시현이 차크라 양이 늘었어.”
“거기에서 또 늘었다고요?”
“어디까지 커질지 나도 모르겠다. 안시현. 너는 뭐니?”
지연이 물었지만 시현은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다는 듯이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어, 아빠 전화다.”
천기정이 말했다. 천 대리가 전화를 받자마자 지우는, 용하가 시현이랑 같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말에 용하의 표정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건 강 부장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러는 게 나을까요? 그럼 강 부장님을 바꿔주시겠어요?”
지우답지 않게 부산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천기정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자식을 친구한테 맡겨놓고 친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걱정이 돼서 전화 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듯했다.
“안지우요?”
용하가 입모양으로 묻자 천기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용하가 냉큼 전화기를 뺏어다가 전화를 받았다.
“야, 이 씨발늠의 새키야!”
용하가 냅다 욕을 퍼부었다.
“아아하하하. 안녕, 신용하.”
“안녕, 신용하? 이 새키가 죽을라고! 남의 인생길을 망치려고 이 자식이!”
“미안한 마음은 뭐라고 말을 하기가 어렵다. 나도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 누가 자기 자식을 짐짝처럼 그렇게 맡기고 싶겠냐?”
지우가 말하자 용하도 말을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건 구했냐? 캐츠 아이 스톤인가 하는 거.”
용하가 물었다.
“어디에 숨었는지 진짜 하나도 안 나온다. 이 정도 했으면 하나 정도는 나올 줄 알았는데.”
“…….”
“미안하다. 신용하.”
“됐어. 새꺄.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해.”
“혹시 사귀는 여자 있어?”
“없어. 있었으면 나도 네 부탁 못 들어줬지.”
“내가 너무 무책임하게 굴었다는 거 알아.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네가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자식 문젠데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냐. 네가 나를 그만큼 믿어줬다는 게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우선은 일년만 이렇게 해 보자. 용하야. 부탁할게. 내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이렇게 말 못했을 거야.”
“알아. 비굴할 수밖에 없어서 당당한 척 한다는 거. 일년이 지나면 캐츠 아이 스톤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시현이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시현이가 헌터가 됐을 때를 같이 대비해야 되는 건데. 캐츠 아이 스톤 하나가 시현이한테 일 년씩을 연장해 줄 수 있다면 하루에 늪을 열 개든, 스무 개든 공략을 하고 싶은 심정이야.”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냐? 쉬기는 하는 거야?”
“쉴 틈이 어디 있겠냐.”
“너 진짜. 그러다 쓰러져, 인마. 자식도 중요하지만 금방 닥칠 문제는 아니잖아. 차차 방법이 찾아질 수도 있는 거고. 네 몸 먼저 챙겨, 바보야.”
“알아서 할게.”
지우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더라도 사실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용하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몇 개나 공략을 하는 거야?”
“미국 정부한테 공략해주기로 약속한 1급 늪은 하루에 하나씩 하고 남는 시간에는 우리 둘이서 닥치는대로 레이드를 하고 있어.”
“시현이 엄마랑?”
“응. 다른 클랜원들도 레이드를 하고.”
“……. 전쟁이구만.”
“다른 사람들한테도 면목이 없고.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된 건지 모르겠다. 그때 헌터 타투가 생겼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어.”
“…….”
친구의 시름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용하는 할 말을 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는 다른 헌터들이랑 달랐잖아. 그리고 시현이는 너보다 열 배는 훌륭한 헌터로 자랄 것 같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건강 상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잘 해, 인마. 나는 시현이 일 년만 봐 줄 거다. 너랑 시현이 엄마가 레이드하다가 과로로 죽었다고 해도 시현이 안 봐 줄 거니까 두 사람 컨디션은 두 사람이 조절해 가면서 하라고.”
“알았어. 어쨌든. 고맙고 미안하다.”
“너무 그럴 것 없어. 나한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고. 시현이도 다행히 나를 좋아해주는 것 같고.”
“힘든 일은 사람을 써서 해. 도우미는 몇 명이든지 고용을 하고 비용은 전부 천 대리님한테 청구해. 일단은 천 대리님이 그쪽 일을 봐 주실 거야.”
“알았어. 내 조칸데 내 조카 분유도 내가 못 사줄까봐.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안 돼. 그런 것까지 부담시키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됐어. 너는 네 건강이나 조심해.”
크게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결국 그런 기세를 유지하지는 못하고 괜히 짠해진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캐츠 아이 스톤이라는 걸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용하가 천기정에게 물었다. 천기정도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