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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괴수의 차크라
“할 말이 있어요.”
지연이 말했다.
“나한테 반했다고 말하면 정말 난감합니다. 아름다우시지만 제 취향 아니거든요.”
이놈 저놈, 왜 이렇게 취향 아니라는 놈들만 많은 건지. 어쨌거나 지연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우씨랑 임정 탱커님은 시현이를 키울 조건이 안 돼요. 아시겠지만 레이드를 계속 해야 되고 클랜 A는 블랙 호크 트리플이나 트레일러를 타고 계속 이동하면서 늪들을 전전하며 레이드를 해요. 시현이가 있는 동안 우리가 같이 있는 트레일러가 괴수한테 공격을 받은 일도 있었어요. 늪을 뛰쳐나온 괴수였는데 발로 트레일러를 찢고 그 안을 휘저었어요. 우리도 거의 죽을 뻔했죠.”
용하는 놀란 얼굴로 지연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두 사람, 지우씨랑 탱커님은. 시현이가 헌터가 아닌 일반인 가정에서 보호를 받게 되기를 바랐어요. 지우씨랑 임정 탱커님이 직접 와서 얘기를 하고 싶었을 테지만 상황이 여의칠 않았어요.”
“그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 온 건 세진이를 데리러 온 건 줄 알았는데…….”
용하가 물었다.
“네. 그런 것도 있어요.”
“잠깐만요. 그게, 지우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는 겁니까?”
“……네.”
“개새끼!”
용하는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돌아섰다. 용하가 손으로 제 머리를 짚고 서는 것을 보면서 지연은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시현을 안고서 시선을 회피했다.
“나한테 직장이 있다는 생각은 안 했대요? 버는 게 우습다고 생각됐겠지만 어쨌거나 나를 사회랑 연결해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생각은 안 했대요? 그깟 돈은 얼마든지 던져 줄 수 있으니까 너는 내 애나 좀 봐라. 그 말인 거예요? 안지우 그 개새끼가 한 말이?”
지연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오해했다는 것과, 그를 오해하게 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잘못된 순서로 말을 했어요. 미안해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신용하씨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신용하씨는 지우씨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지우씨가 신용하씨를 믿고 시현이를 보낸 거고요. 만약에 신용하씨가 없었다면 지우씨는 대안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시현이한테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계속해서 어쩔 수 없이 트레일러에 태우고 다니거나 블랙 호크 트리플에 태우고 다니거나 했을 거예요.”
“…….”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건……. 레이드를 해서 돈을 벌어야 돼서 바쁘다는 뜻이 아니예요. 시현이는 헌터들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그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예요.”
용하는 그 말이야말로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지연을 바라보았다. 지연은 용하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는 진실을 전부 알려주는 방법만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연이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지연이 자기에게 뭘 원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지연이 소형 감응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서 시현의 몸을 싸고 있던 속싸개를 풀었다.
용하는 그들이 뭘 하려는 건지 알지 못한 채로 지연이 보여주는 감응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두 개의 헌터 차크라가 보였다.
"이게 뭡니까?"
용하가 물었다.
"차크라예요. 헌터 차크라."
지연이 말했다. 용하는 지연이 왜 갑자기 그것을 보여주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시현이 거예요? 아기한테서도 차크라가 나오는 거예요?"
용하가 물었다.
"네. 일단은. 시현이 거죠."
지연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현이 시현의 배냇저고리를 벗기자 감응기에는 헌터 차크라와는 다른 어둡고 짙은 차크라가 나타났다.
용하의 얼굴이 점점 경직되었다.
“이게……. 뭐죠?”
차크라는 크게 일렁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용하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지연을 바라보았다.
“시현이한테서는 다른 차크라가 나타나요. 헌터들한테서 나타나는 차크라하고 다르죠.”
지연은 차마 그것이 괴수의 차크라라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용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시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시현에게 다시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속싸개로 돌돌 말아서 품에 안았다.
“저런 차크라를 가진 사람을 러시아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서 특별한 이야기를 들었고요. 저런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에게 헌터 타투가 나타나고 그 사람들이 E급으로 오르면 그 후에는 계속해서 강제로 등급을 올려야만 한다는 거였어요.”
용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기가 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면 앞서서 설명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지연은 용하의 템포에 맞춰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연의 설명이 끝났을 때 용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상에……. 그냥 어린 애잖아요. 저렇게 어린 아기한테 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용하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열 한 명이 죽고 캐츠 아이 스톤을 남겼다는 얘기를 듣자 그 공포가 현실적으로 그를 덮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용하씨가 시현이를 받아줄 거라고 멋대로 믿어버린 건 지우씨 잘못일지도 몰라요. 신용하씨의 사정이라는 게 있을 텐데 거기에 대해서 미리 생각하지 못한 건 분명히 우리의 불찰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여기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는 거예요. 시현이를 신용하씨한테 맡겨야만 지우씨가 다시 클랜 A를 이끌어가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신용하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애초에 지우씨가 마음을 정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지우씨는 지금 시현이에 대한 생각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거든요.”
“그 자식은 왜……. 왜 그런데요? 내가 뭐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지금까지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는데. 바보같은 짓이나 하고 실패만 하고. 상처입지 않겠다고 도전을 포기하면서 살고, 넘어지지 않겠다고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는데. 이건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내가 책임지겠다고 잘난 소리나 하면서, 그러면서 내 자존감까지 다 잃어버린 나한테 왜요?”
용하는 혼란스럽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덮어놓고 자기를 믿어버린 지우에게 고마운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었다.
“지우씨는 사람을 잘 봐요. 두 번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없을만한 사람들한테 기회를 줘서 그 사람들을 자기한테 묶어두는 게 취미죠.”
용하가 지연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렇게 안지우에게 묶인 부류냐고 묻고 싶은 것 같았다.
“안지우씨의 그 평화로워보이는 얼굴을 보면 상상하기가 어렵겠지만. 내 몸에는 폭탄이 들어있어요. 이기적인 폭탄이죠. 나를 터뜨려버리기는 해도 주변에는 해를 끼치지 않는 폭탄이예요. 클랜 A에 있는 다른 사람의 몸에도 그 폭탄이 있죠.”
“지우가 그런 거라고요?”
“그래도 원망은 안해요. 믿을 수 있게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우리는 기회를 얻었죠. 나는 신용하씨를 선택한 그 결정도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클랜 A와 그리고 시현이를 위해서 부탁할게요. 나를 위한 부탁이기도 해요. 시현이를 돌봐주세요. 그리고 이건. 우리가 제안하는 내용입니다.”
지연이 용하에게 세 페이지짜리 계약서를 내보였다.
용하의 얼굴에는 계속해서 놀라움이 번져갔다. 용하의 드림카, 용하가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왔던 시계, 언젠가 꼭 지을 거라고 말했던 집, 예금과 주식, 정기적인 수입과 보너스. 모든 게 약속되어 있었다.
“사람을 고용해서 쓸 수도 있어요.”
지연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용하는 계속해서 계약서를 보았다. 내용은 이미 숙지를 한 것 같았지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러는 것 같았다.
"알았어요."
드디어 용하가 말했다.
“어려운 결정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클랜 A는 그 자리에서 멈췄을 거예요. 그러면 지우씨도 등급을 올리지 못하고 폭주해서 헌터들한테 사냥을 당하고 죽을 거고. 클랜 A에게는 신용하씨가 마지막 희망이었어요.”
지연이 말하자 신용하는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결정을 내린 건지, 그게 잘한 짓인 건지, 며칠은 더 생각을 해 봐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지우를 죽게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에도 흔들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현이 차크라가 왜 갑자기 바뀐 겁니까?”
자리로 돌아가서 시현이를 바라보던 용하가 물었다. 강현이 지연을 대신해서 두 차크라와, 차크라의 성질을 감추는 특수 소재의 옷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용하는 그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러시아에서 왔다는 그 사람도 그럼 그걸 입고 있는 건가요?”
“네. 야로슬라프 형인데 그 형도 그걸 입고 있어요. 미국 사람들은 클랜 A가 하는 모든 걸 다 알고 싶어하거든요. 자기 나라의 A급 헌터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클랜 A는 식은 죽 먹는 것처럼 해내니까 당연히 클랜 A를 상대로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을 거예요. 지연이 누나가 감응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감응기같은 장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겠죠. 그 사람들이 클랜 A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판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었잖아요.”
“러시아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한테도 그런 옷을 만들어주면 좋지 않을까요?”
용하가 묻자 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렇게 했어요. 야로슬라프가 부탁한 일이었거든요. 여러 사람은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은 이제 한 사람뿐이예요.”
“그래요?”
“거기에 위치추적 장치가 달려있다거나, 갑자기 습격을 당했을 때 신호를 보내게 돼 있다거나. 그런 걸 상상하는 건 내가 오버하는 거죠?”
용하가 말했지만 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한테는 캐츠 아이 스톤 하나도 중요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좀… 잔인하네요. 그 사람이 어디선가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장소를 알아야 한다는 거네요? 캐츠 아이 스톤을 수거하기 위해서.”
“꼭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예요.”
“그런데 왜 러시아에만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거죠? 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다른 곳에서도 괴수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아뇨. 우리도 그게 궁금하긴 해요. 야로슬라프랑 괴수 차크라를 가진 다른 헌터들이 체르노빌 근처에 살았다는 건 알아냈는데 그 사고랑 관련이 있는 건지 어쩐 건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어요. 여기에 있는 동안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볼 생각이예요. 만약에 그런 거라면 일본에도 괴수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이 대량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원전 폭파 사고의 영향이라면 말이예요. 그걸로 환경이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한다면.”
“지우는 왜 그랬을까요? 지우 아파트는 그냥 평범한 곳에 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생각이 거기에서 막혔어요. 지우씨랑 야로슬라프 사이에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든요. 러시아에서만 유독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이 많이 나타난 건 우연인 걸지도 모르겠고.”
“그렇군요.”
용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현을 보고 있는데 그때까지 강현의 품에서 얌전히 놀던 시현이 갑자기 칭얼대기 시작했다.
“왜? 삼촌한테 와야 되겠어?”
용하가 뻔뻔한 소리를 하고 손을 내밀자 강현이 어림없을 거라는 듯이, 그러면서도 못 이기는 척 용하에게 시현을 넘겼다. 용하의 품에 안긴 시현이 울음을 딱 그쳤을 때의 그 엄청난 배신감이란.
그건 용하까지도 당황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