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130화 (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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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치안부장님은 남의 삶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클랜원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니고 일반적인 타인에 관심이 지대한 것 같거든요. 그게 치안부장님의 애정관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은데 치안부장님은 본인이 당사자가 되는 것보다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관망하면서 평가하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연애를 할 생각보다는 남의 섹스를 보면서 즐기는 쪽을 더 좋아하는 거죠."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그런 적 없어요!"

서규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최근에, 현실에 있는 여자 몸에 사정해 본 게 언제예요?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 웃고 있는 여자 몸을 보면서 티슈에 싼 것 말고, 여자 몸에 닿거나 튀게 싼 적요. 모니터에 튄 건 빼고."

"야로슬라프한테 내 사생활을 보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봐요. 제 얘기가 맞잖아요."

"마음대로 확신하지 말라고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본인은 소모적인 감정에 희생되는 게 싫어서,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에 치안부장님은 관계에 실패할까봐 무서워서 그러시는 것 같아요. 대외적인 관계에서 클랜도 잘 대표하시고 치안부장으로서의 일도 잘 하시는 것 같지만 치안부장님은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 뿐이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너같은 녀석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해도 야로슬라프의 집요함은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제가 치안부장님 같은 분을 아는데 치안부장님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대의에 크게 의미를 둬요. 그걸 위해서 싸울 거다 라고 마음 속으로 정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의 약점이 뭐냐면요. 갑자기 어느 순간, 그 대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오면 주변의 세계가 다 흔들려버리고 아무 것도 그 사람을 지지해주지 못하게 된다는 거예요.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싸운다면 그 목표가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지우 형이라면 아기와 임정 누나를 위해서 싸운다고 목표를 좁게 잡아놔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죠. 목표가 흔들릴 것 같으면 고개를 돌려서 그 사람들을 보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치안부장님도 현실적으로 욕구를 푸는 방법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목표를 구체화하시고요. 뭐. 그런 게 쉬운 건 아니죠. 그건 저도 이해해요. 원래 그런 거잖아요."

야로슬라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클랜원들은 괜히 울적해졌다. 누군가 혼자서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면, 아, 저 사람이 야로와 얘기를 나눴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 되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이익헌이 클랜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나마 이익헌은 레이드에서의 실력에만 특정을 해서 공격을 했다면 야로슬라프는 훨씬 전방위적이었다. 기껏 이익헌의 독설을 피할 수 있게 되었더니 이제 그보다 몇 백 배나 더 화력이 강해진 회색 눈의 녀석이 굴러들어와서 열심히 나불거려대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익헌이라고 야로슬라프의 독설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야로슬라프에게는 독설을 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이 대응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에게, 왜 차크라 양을 늘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클랜 A를 대변해서 다른 기관이나 정부들과의 관계를 조율해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헌터로서의 기량을 성숙시키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다른 클랜원들에게 폐가 되지 않겠냐고 묻기도 했다.

"아짐은 탱커예요, 딜러예요? 지우 형처럼 방어력이랑 공격력이 똑같이 높은 것도 아니고 탱커인 동안에는 공격을 포기해야 하고 딜러인 동안에는 방어를 포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아짐은 탱커도, 딜러도 될 수 있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탱킹도, 제대로 된 딜도 못하는 것 같아요. 나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아짐은 둘 다를 적당히만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능력을 유일하게 가진 사람으로서 그 능력을 너무 방만하게 사용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한테 그런 능력이 주어졌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능력을 훨씬 더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 같거든요. 그래도 좋은 능력이긴 해요. 가능하다고 하면 제가 S등급으로 올라갈 때 제가 쓰던 A등급 팔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기는 하거든요. 저한테는 재생능력이 없어서 안 되긴 하겠지만."

"잘 깨달았네. 너한테는 재생능력이 없지. 그게 핵심이다."

이익헌이 말했다.

"시작했을 때는 아짐이 가장 위에서 시작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추월당하고 있죠. 차크라 양 차이가 9.78이랑 9.8이니까 얼마 차이 안 나는 거다. 9.78이랑 10이니까 얼마 차이 안 나는 거다. 안지우하고는 비교를 하는 게 무의미한 거니까 안지우의 차크라 양을 생각하면서 기죽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변명할 것들을 만들어 놓고 아짐은 아짐이 클랜내에서 중간 정도는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는 거예요. 말을 하는 걸로 아짐을 따라갈 사람은 없겠죠. 기본적으로 클랜 사람들이 착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아짐만 말하는 때가 올 거예요. 그렇다고 아짐이 하는 말이 옳은 건 아니예요. 아짐만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게 옳은 건 아닌 거죠. 그때는 아무도, 아짐이 하는 말에 관심을 안 가질 걸요?"

이익헌은 그 말에 대꾸를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자기가 하는 말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는 말에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혼자서 계속 말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장면이 갑자기 상상되어 버린 것이다.

지우는 당연히 패스였고, 임정도 패스였다.

지우에게는 말을 꺼내봤자 자기가 오히려 덤터기를 쓸 것 같아서 그랬고 임정은 무조건 자기한테 잘해주니 부족해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지연에게도 똑같이 통했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은 야로슬라프의 독설로부터 안전지대에 머물 수가 있었다.

만만한 게 태인이었다.

올해까지 F급이었다는 게 자랑이냐는 말을 태인은 야로슬라프로부터 벌써 수 천 번은 들은 것 같았다. 솔직히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은 없었다. 태인 자신도 느끼는 것은 많았다.

야로슬라프는  그 나이가 되도록 F급이었으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뭐였냐고 태인에게 물었다. 자기는 3, 4년을 해 보고도 E급으로 올릴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 헌터 생활을 청산했을 거라면서 놀라워했다.

강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는 너만한 아이들 중에도 정말로 열심히 노력하는 헌터들이 많다고 했다. 나도 쉬지 않고 훈련한다고 강현이 발끈해서 말하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물었다. 팀내에서 가장 어리다고 팀내에서 가장 차크라 양이 적다는 사실이 커버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클랜 A에서는 가장 차크라 양이 작고 싸움의 기술이 뒤쳐져도, 다른 헌터들과 비교해서는 뛰어나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클랜 A라는 아우라가 거두어지고 나면 너도 그냥 평범한 B급 헌터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듣는 순간에는 괴롭고 화가 나는 말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보면 어느덧 자기들도 모르는 순간에 그 말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야로슬라프를 피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 역시 이익헌 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

강현에게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굉장히 빠르고 확실한 기회였다.

“야로형. 너무 긴장하지 말고요.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편하게. 형한테 이제 크게 기대 안 하니까요. 그냥. 거치적거리지 않게만 조심하면 돼요.”

강현이 야로슬라프에게 따뜻한 충고를 해 주고 예쁘게 웃음을 지었다. 야로슬라프는 한 대 훅, 쳐 버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런 소리를 해 놓고 웃다니.

야로슬라프에게서 기분 상하는 말을 들었다고 복수를 하자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사실이었을 뿐이었다. 야로슬라프는 헌터 개인으로서는 월등한 기량을 갖추었을지는 모르지만 클랜 A라는 바퀴로 같이 돌아가려면 클랜 A에 철저하게 녹아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야로슬라프를 클랜 A에 때려넣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야로슬라프는 며칠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야로슬라프를 위한 환영회라도 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자질론이 불거졌다. 야로슬라프를 클랜 A에 받아들여도 좋을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을 한 사람은 이익헌이었다. 가장 웃기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죽겠다는 사람을 죽지 못하게 한 것도 이익헌이었고 대통령이랑 담판을 지어서 러시아의 캐츠 아이 스톤으로 야로슬라프를 A급으로 올려놓은 것도 그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웬 웃기지도 않는 말이라는 건가.

야로슬라프는 굉장히 기분이 상했지만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드러낼 틈도 없이 클랜 A에게 끌려 다녔다. 이틀에 걸쳐서 두 개의 1급 늪을 공략하고 다녔는데 쉴 틈도 없이 다른 1급 늪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야로슬라프가 늦게 들어온만큼 야로슬라프에게 빨리 적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야로슬라프가 클랜 A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면 자기들이 야로슬라프에게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야로슬라프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야로슬라프를 알기 위해서는 야로슬라프를 갖가지 상황에 처 넣어야 했다. 야로슬라프가 입으로 하는 언어를 듣는 것보다 그들에게는, 야로슬라프가 레이드 도중에 쏟아내는 몸의 말로 그를 이해하는 게 더 쉬웠다. 야로슬라프의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두려움이 드러나는 게 언제인지, 야로슬라프가 주저할 때가 언제인지, 어떤 감정에 자극을 받고 어떨 때 최고의 기량을 끄집어내게 되는지.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야로슬라프에 대해서 배워가고 있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 사이에서는 누가 어떤 유형의 괴수에게 강한 면모를 드러내는지, 누가 어떤 방향을 선호하는지, 누가 누구와 케미가 좋은지 거의 완벽에 가까울만큼 파악을 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와도 그것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서 그러는 거라고 알려주면 좋을 것을, 아무도 그렇게 설명해주지는 않고 야로슬라프를 굴리기만 했으니 야로슬라프는 자기가 선택을 제대로 한 것인지 매 순간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야로슬라프는 서규태가 했던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죽었더라면 지금의 이 감정을 느낄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희망이기도 했고 가슴 벅찬 동료애이기도 했고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이기도 했다.

야로슬라프는 자주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놀랐다.

야로슬라프에게 가장 친절했던 사람은 당연하게도 임정이었다. 임정은 야로슬라프가 콩알을 위해서 캐츠 아이 스톤을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이나 울었었다. 그것이 콩알에게 11년의 삶을 연장해 줄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는 더했다.

그것은 야로슬라프가 죽기로 결심했을 때의 얘기고 이제는 야로슬라프에게도 그게 다시 필요해졌다는 것을 임정도 이해했지만 어쨌거나 고마웠던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야로슬라프는 임정에게, 그건 자기가 아기에게 양도한 게 맞다고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지우를 위해 필요한 캐츠 아이 스톤은 레이드를 해서 새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임정에게는 야로슬라프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린 사람도 아니고 지우와 콩알, 두 사람의 목숨을 한꺼번에 살린 사람이었고, 그 두 사람을 살렸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임정의 편파적인 애정이 야로슬라프를 향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야로슬라프는 점점 이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나오게 될 캐츠 아이 스톤을 노리고 자신의 동료 중 누군가가 자신을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고 쉴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클랜 A는 러시아에서 반경이 커지는 1급 늪을 공략하고 그 후로는 괴수의 체력이 높은 순서로 여러 개의 1급 괴수들을 공략해 주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클랜 A 내부적으로도 필요성을 느껴서 한 일이었다. 그들이 지금 가장 우선시하고 있는 것은 야로슬라프를 클랜에 적응시키는 거였다. 야로슬라프는 클랜 A가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기도 클랜 A와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클랜원들은 모두 환영이었다. 이제는 야로슬라프가 내던지는 직구에 맞아도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서 전처럼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야로슬라프처럼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모두가 인식을 같이 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야로슬라프를 포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는 그 모호한 회색 눈빛이 시야에 보이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았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야로슬라프라는 깊고 진한 회색 빛에 물이 들어버린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 늪의 리드를 훔친 일당이 체포되고 즉결 심판에 부쳐져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빠르네. 확실하고. 한국에서도 저렇게 해야 하는 건가? 리드를 훔치는 일은 정말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서규태는 그렇게 말하면서 슬슬 한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치안 1부장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기는 했어요. 그래도 클랜 A의 일이라는 것 때문에 불평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임정이 말했다.

"돌아가야 할 때가 되긴 했어요. 아직은 조용하지만 한국 늪들이 언제까지 우리 사정을 봐주고만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지우의 말에 모두들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러시아에서의 일들은 서서히 마무리가 되어갔다. 성장하는 1급 늪은 말할 것도 없고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1급 늪도 씨를 말려 놔서 러시아 정부로서도 더이상 클랜 A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2급 늪부터는 러시아 헌터들로도 공략이 가능했고, 거기까지 건드는 것은 러시아의 경제 근간을 흔드는 일로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클랜 A는 홀가분하게 손을 털고 러시아를 떠날 수가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송별회까지 마다하는 클랜 A를 보면서 학을 뗐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자리는,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클랜 A는 그런 것들을 철저히 거부했다.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러시아 대통령은 더 화가 났다. 하지만 클랜 A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 인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기에 속으로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클랜 A는 곧바로 한국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로 피골이 상접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연락이 오자 그곳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와주는 게 어떨까요?"

서규태의 말에 모두들 미국의 1급 괴수를 공략하고 가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그런데 왜 진작 가지 않은 거예요?"

야로슬라프는 그 전부터 궁금해했던 것을 물었다.

클랜 A에게는 분명히 1급 괴수를 공략할 힘이 있었고 그건 다른 헌터들이나 공격대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클랜 A가 개인적인 분노로 한 국가의 비극에 이렇게까지 무관심하게 대한다는 것은 자기가 알아온 클랜 A의 가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도 성장하는 1급 늪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클랜 A는 빨리 러시아에서 일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조급함도 보이지 않았다.

이익헌은 야로슬라프를 바라보았다.

"미국은 거기에 대응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니야. 다만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 뿐이지. 우리가 나서면 쉽게 처리할 수는 있지. 하지만 우리가 나서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그게 당연히 우리 일이 되는 건 아닌 거야."

"클랜 A한테 쉬운 일이면 해 줄 수도 있잖아요."

"400페이지짜리 원서를 번역하는데 누구한테는 넉 달이 걸리고 나한테는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해 봐. 그런다고 내가 모든 400페이지짜리 원서 번역 일을 당연하게 도맡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한테도 하루에는 24시간만 주어지는 거야. 대의명분에 휘말리다보면 정작 내가 하려고 했던 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거지. 궤변 같다고 해도 상관 없어. 자기들한테 능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좀 더 공손해지든가 아니면 안 되는 능력을 자꾸 더 개발해서 넉 달 걸리는 걸 석 달로 줄일 수 있게 해야 하는 거지. 그 사람들한테야 할 말이 많겠지.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때 나를 몰아세우기도 쉬울 거고. 네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일을 해 주지 않는다고 침을 튀어가면서 나를 비난해댈 걸? 그럴 때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게 중요해. 그럴 때 남의 비난을 무서워하면 시간 낭비만 엄청나게 하게 되는 거지. 돌아보면 자기 인생이란 없고 남대신 남의 일만 주구장창 해 대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그 일을 대신 해 주면 그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되지. 나는 내 네 시간을 썼지만 그 사람들은 1분도 안 쓴 거라고. 그래도 여전히 내가 내 시간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들이 원래 썼어야 할 시간 중에 1분도 쓰지않은 것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을 안 해."

이익헌이 속사포로 말을 마쳤다. 이익헌의 말이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야로슬라프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늪이 제때 공략되지 않아서 부상당한 사람들도 많고 도시가 공격당하기도 했잖아요. 사람들이 생활의 기반을 잃었다고요."

"그래서 뭐? 그게 우리 탓인가? 거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 날짜가 되면 늪이 열릴 거라는 걸 알고도 버틴 거야. 막연하게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버틴 거지. 공략에 동원돼서 레이드를 하다가 부상을 당한 헌터들에 대해서는 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내린 결정에 책임을 져야 되는 거야. 등 떠민 사람은 없잖아. 있나? 하긴.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건 그 사람들 등을 떠민 게 나는 아니거든?"

야로슬라프는 이익헌과 얘기를 해서는 답이 안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치안부장님도 같은 생각이세요?"

"명분에 휘둘리다보면 정작 중요하게 해 나가야 할 일들을 놓칠 거라는 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미국에, 지금 당장 괴수가 튀어나올 늪이 세 개가 발견됐다고 해봐요. 그걸 공략할 수 있는 헌터들은 우리 뿐이라고 해도 나는 우리 클랜에게 거기로 가자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우선은 우리 상황을 더 치밀하게 지켜봐야겠죠.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인지, 우리가 거기에 가 있는 동안 그 일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우리 클랜원들한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 고려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될 때 남는 힘으로 거길 도울 겁니다."

야로슬라프가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너무 높이 올려놓고 우리한테 환상을 품지마.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니까. 이기적이라기보다 합리적이겠지. 우리 안전을 먼저 도모하겠다는 거니까."

지우의 말을 듣고 야로슬라프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태인이 큭,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우리 야로도 애기네. 애기. 우리가 어떻게 해 주면 마음에 들겠어? 우리가 영웅이 돼 주면 좋겠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1급 늪은 우리가 전부 다 처리해 주면 좋겠어? 아니면 성장하는 1급늪만이라도?"

야로슬라프는 바로 그거라는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빛냈다.

"우리는 소비재가 아니야. 야로. 우리는 인간이지. 유한하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들이야. 남한테 미래를 만들어주자고 우리 미래를 희생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어. 왜 우리 미래가 그 사람들의 미래보다 가치없는 걸로 취급받아야 하는 거지?"

"우리는 영웅이 될 생각이 없어요, 야로 형.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예요. 이용될 생각은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살아남는 것. 오래 살아남아서 오래 같이 행복한 기억을 쌓아가는 것. 그게 내 목표예요."

강현이 말했다.

야로슬라프의 머리는 점점 더 깊은 혼란으로 엉켜드는 것 같았다. 영웅이 될 줄 알고 올라탔더니 그 배가 다른 곳으로 간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기도 했고, 자기야말로 그동안 남들이 칠해놓은 도금된 장난감에 현혹돼서 영웅을 꿈꾸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요. 내가 보기엔 그래도 이 시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영웅은 아직까진 클랜 A인 것 같으니까."

지연이 말했다. 그러고도 야로슬라프의 얼굴에서 의심이 떠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지연이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그 증거도 있어요."

사진 속에는 임정이 등장한 익스트림 헌터의 광고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의 임정은 그야말로 세상을 구할 영웅처럼 보였다.

"꿈꾸고 믿어봐요. 달라진 세상을. 그렇게 하루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들이 그 날의 영웅이고 그 시대의 영웅이겠죠. 영웅? 별것 없어요."

야로슬라프는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은 애들을 안심시키겠다고 사탕발림을 할 사람들은 절대로 아닌 것 같았다.

5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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