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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지 그 권한은 전적으로 대통령께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치안대원 중에 대단한 실력을 보유한 B급 딜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사람한테 당장 캐츠 아이 스톤을 쓰실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그런 B급 딜러를 두고도 캐츠 아이 스톤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러시아 정부에 A급 헌터를 육성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다는 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사람의 실력은 월등합니다. 클랜 A의 모든 클랜원이 나서서 보증을 할 수 있을 정돕니다.”
그 말에는 대통령도 혹했다.
“그게 누굽니까?”
“치안대의 치안대원, B급 딜러 야로슬라프 코마로픕니다.”
“들어본 적은 없는 이름인데.”
“요청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야로슬라프가 A급 헌터가 되면 야로슬라프가 클랜 A와 같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면……. 러시아가 뭘 얻게 되는 거죠? 기껏 하나뿐인 캐츠 아이 스톤을 써서 야로슬라프 코마로프를 A헌터로 만들고 그 사람을 클랜 A에 넘긴다면 말입니다.”
“러시아는 야로슬라프 코마로프의 조국이고 클랜 A는 한국의 이해와 겹치지 않을 때는 그를 위해서 언제나 러시아에 최우선 순위를 두기로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대통령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보이는지도 잊은 채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러시아 정부의 의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묻는 것 뿐이고 우리 스스로도 야로슬라프 코마로프를 A급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그렇겠죠. 당연히 그럴 겁니다.”
대통령은 그 말이 괜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미국 대통령에게 캐츠 아이 스톤을 무상으로 내 놓으라고 요구를 한다고 해도 미국 대통령은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을 입장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합니다만.”
대통령이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도 제안을 철회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는 걸로 하죠. 잠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서규태가 말했다.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요. 알겠습니다. 그건 내가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정보국의 수장 출신답게 머뭇거리지 않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서 곧 시원한 발언이 나왔다.
“캐츠 아이 스톤은 이미 클랜 A에서 가지고 있으니까 야로슬라프 코마로프를 A급 헌터로 만드는데 그걸 사용하세요. 조만간 A급 헌터인 야로슬라프 코마로프를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기대하겠습니다.”
“조만간이라고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링에 올라서 괴수를 넉다운 시키고 내일 오전 중에 대통령을 뵙도록 하죠.”
그때까지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기만 하던 이익헌이 말했다. 러시아 대통령은 고개를 젓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당장 정신병원에 끌려갔을 겁니다.”
“그렇겠죠. 다른 사람이라면 재고 따지느라고 이렇게 쉽게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겠죠. 대통령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잠시 후에야 제 정신이 들어서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 판다면 캐츠 아이 스톤을 수 천조를 받고 팔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신 러시아인 A급 헌터가 생겼고 클랜 A가 러시아에 협력을 다짐했다.
‘잘한 거야. 그래. 잘한 거야.’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아서 몇 번이나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
야로슬라프는 멍한 표정으로 클랜 A의 클랜원들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어느 순간에 바뀐 건지 그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원했던대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열 한 개의 캐츠 아이 스톤을 내 놓았으면, 그리고 그걸 가지고 앞으로 등급을 올려가면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을 해줬으면 눈물을 뿌리면서 자기 발등에 입이라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건, 그가 상상하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하긴. 그들이 캐츠 아이 스톤을 구해서 자기를 찾아올 거라는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래도 지우라는 남자를 찾아가서 캐츠 아이 스톤을 줄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 남자만의 문제였다면 눈을 감아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 남자의 아이가 자꾸만 걱정이 되었다. 그런 차크라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레이드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 야로슬라프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을 지고 태어난 아이라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으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제 아버지가 떼먹지 않고 그대로 전달해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B급까지 혼자 힘으로 올라가기만 한다면 자기가 주는 열 한 개의 캐츠 아이 스톤으로 11년의 생을 연장해주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제법 흐뭇해하기도 했단 말이다. 그런데 말을 다 마치고 이 사람들이 격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기를 기대하면서, 이들이 나가고 나면 조용히 자신에게 남은 하루의 시간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서규태라는 남자가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썩어빠진 정신으로 헛소리를 하지 말고 살아남으란 말이야!”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야로슬라프는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 이 남자. 꽤나 이해력이 떨어지는구나.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야로슬라프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런데 그때부터 서규태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런 인생이 계속될 거라고 말하는 거야말로 네가 멍청이라는 뜻이야. 네 입으로 방금 네가 그걸 증명한 거라고!”
‘아, 그러셔?’
슬슬 야로슬라프도 약이 올랐다.
‘누구는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건 줄 아나? 죽고 싶어 환장해서 이러고 있는 건 줄 아느냔 말이야!’
그렇게 따지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야로슬라프는 참았다. 인생의 마지막 날, 꼰대랑 싸우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살아. 그렇게 버티고 살다가 언젠가는 단 한 번이라도 웃음을 짓게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될 거다. 그러면 그때 그 생각이 들 거야.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참고 견뎠던 거라고. 그러면서 그 결정을 내린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의 너, 야로슬라프 코마로프에게 고마워하게 될 거다.”
야로슬라프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 줬을 거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 신파를 끝내고 자기가 마지막 시간을 의미있게 정리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익헌은 한술 더 떠서 대통령을 불러냈다.
대통령을 부르다니. 이 밤중에. 이 사람이야말로 미친 거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러시아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대통령이랑 연결이 된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 남자의 목소리와 신분을 알게 된 사람들이 단계를 거쳐서 대통령을 불러내고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것이다.
야로슬라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대통령에게 하는 말을 그도 전부 들었다. 왜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지 야로슬라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살고 싶지 않았다. 캐츠 아이 스톤을 모으는데만 혈안이 돼서 동료를 죽이는 삶에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이제 그만좀 해요. 나는 미련 없다고요.”
야로슬라프가 그렇게 소리쳤을 때 그의 얼굴이 갑자기 간지러워졌다.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숨기고 속이느라고 그가 얼마나 힘들게 시간을 이어왔는지 야로슬라프는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고, 세멘노프 교수와 보리스, 드미트리, 예고르, 안톤, 미하일……. 그들의 캐츠 스톤으로라도 강해지면서 살고 싶었다고, 동료들의 죽음을 밟고서라도 비루한 생명을 이어나가고 싶었다고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릎이 푹 꺾어졌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그는, 눈물로 바닥을 적셨다. 돌로 된 바닥 위에 떨어진 눈물이 순식간에 흥건하게 고였다. 그의 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을 때 굳은 표정의 지우가 서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너무 울면 머리가 아파지잖아. 눈이 부으면 괴수가 안 보일 거야. 아니다. 그 말은 정정. 그렇게 큰 괴수가 안 보일 리가 없지. 내가 형이니까 말은 놓는다. 통역기는 알아서 통역을 해 주려나?”
괴수라는 게 무슨 말인지 깨닫기도 전에 야로슬라프는 그들에게 끌려나가다시피 했다.
“A급이 되려면.”
지우는 야로슬라프의 바지 주머니에 캐츠 아이 스톤을 넣고 지퍼를 올려 잠가 주었다.
“이걸 가지고 싸우는 거다. 그리고 이기는 거야. 그리고 모든 게 끝난 순간에 팔을 들어서 보는 거지. 그렇게 만나는 거야. A급이 된 자신이랑.”
야로슬라프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야로슬라프를 대했다. 그들은 정말로 야로슬라프에게 기대하는 것이 컸다.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회색 눈의 어린 녀석.
그것은 안지우와 같은 녀석이 하나 더 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소진되지 않는 차크라. 그것이 클랜원들의 생각이었다.
클랜 A가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좋아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돼버린 셈이었다.
강현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어려운지 방방거리면서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빨리 가죠.”
“우리 언제 가요?”
“아직 안 가나요?”
“우리는 뭘 기다리고 있는 건데요?”
대꾸를 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거의 10초 간격으로 혼자서 질문을 해대고 있었다.
야로슬라프를 A급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레이드에 다 함께 가기로 한 길이었다.
“이제부턴 이걸 입어. 방어 증폭률이 650퍼센트인 갑옷이야.”
이익헌이 야로슬라프에게 갑옷을 넘겨주며 말했다. 자기한테도 갑옷이 있다고 말을 하려던 야로슬라프는 그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방어 증폭률이 650퍼센트나 되는 갑옷이 있다니. 이 사람들 지금까지 치트키를 가지고 싸운 거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놀랄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신입이 들어왔으니까 오늘은 탱킹이 좀 필요하겠군.”
그렇게 말한 이익헌이 론 디어를 꺼내들고 제 어깨의 살을 순간적으로 잘라냈다. 야로슬라프의 눈이 한계까지 떠졌는데도 이익헌의 쇼는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이익헌은 야로슬라프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본 채 강현을 불러 도움을 청했다. 강현은 이익헌의 팔을 반대 방향으로 꺾고 마지막으로 힘줄을 론 디어로 잘라냈다.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의 얼굴에 그대로 구토를 할 뻔 했다. 태인이 이익헌에게 좀 더 서두르라고 말하면서 옆에서 다른 팔 하나를 가지고 대기를 하고 있다가 이익헌에게 건네는 것을 봤을 때는 야로슬라프의 두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자기가 지금 어떤 세계에 발을 디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죽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익헌은 태연하게 팔을 붙였다. 그의 어깨에서 살이 빠르게 돋아나더니 새 팔을 감싸고 어느새 그것을 제 것으로 삼고 있었다. 이익헌은 팔을 휘휘 돌렸다.
“내 탱킹까지 하면 네 방어력은 5만 정도 될 거다.”
다른 사람들은 야로슬라프의 놀란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면서 각자의 장비와 무기를 챙기고 갑옷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