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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124화 (12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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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그런 차크라를 가진 사람을 알고 있거든요. 혹시 아이가 있나요?”

지연이 물었다.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저었다. 백인의 나이를 가늠하는 것은 지연에게 항상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 차크라를 가진 사람 중에 아이를 낳은 사람이 있나요?”

지연의 거듭되는 질문을 듣고 야로슬라프는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치안대에 클랜 A가 찾아왔을 때 치안대 건물에서 임산부를 본 것이 기억났다. 그는 지우가 그 아이의 아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솜씨가 좋아서 자신의 차크라를 감추기는 한 모양이지만 차크라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겁이 나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차크라를 시각화해서 구분을 해 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은 드네요. 일단.”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현실 너머의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은 옅은 회색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뭡니까? 아니. 나에 대해서, 라는 말은 빼죠. 알고 싶은 게 뭡니까?"

"차크랍니다. 당신이 가진 차크라."

지우가 말했다.

"그렇군요. 전혀 다른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그 얘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지우는 그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곧 죽을 겁니다.”

“…뭐라고요?”

지우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그 말에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건지 생각해 보려고 했다.

“당신도 곧 같은 처지가 될 거고요.”

이어지는 말이야말로 난감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이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야로슬라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우가 혼돈의 늪에서 거의 질식할 정도가 되었을 때 야로슬라프는 자신의 팔을 보였다. 헌터 타투가 있었다.

“당신은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요. 대개 헌터 타투가 나타나고 몇 년 안에 모두 죽게 되죠.”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뭐라고요?"

“이런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은 스무 살이 넘기 전에 죽어요. 대부분이 그랬어요.”

“이건. 병 같은 겁니까?”

지우가 물었다.

“아닙니다. 살해당하는 거죠.”

“살해요?”

“아니. 사냥이라고 하죠. 헌터에 의해서 사냥을 당하고 죽는 겁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헌터 타투가 나타나고 등급이 오르는 동안은 차크라도 우리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레벨을 올리지 못하고 차크라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차크라가 폭주합니다.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건 헌터들 뿐이죠. 차크라가 폭주하면 우리는 괴수하고 다를 게 없습니다. 헌터들은 우리같은 사람들을 사냥하지만 우리가 누구였다는 걸 밝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C급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는 B급까지 올라왔지만 아직 캐츠 아이 스톤을 찾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정부에 캐츠 아이 스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치안대에 들어왔죠. 한 달도 안 된 일입니다.”

지우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러시아에 캐츠 아이 스톤이 있다는 것과, 러시아 정부가 실력있는 B급 헌터에게 그것을 사용해서 A급 헌터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지우는 알고 있었다. 지우에게 들어간 그 말이 야로슬라프에게도 들어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다른 얘기들은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따라가도 되는 건지, 그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나는 A급입니다. 그러면 나는, 끝난 게 아닌가요? 나는 끝까지 전부 올린 거잖아요.”

더듬거리면서, 지우가 가까스로 말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에 야로슬라프가 동조해주기를 가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우의 말을 듣고 야로슬라프는 웃음을 지었다.

“끝이란 없어요. 아직 그런 사람, 그 이후의 등급에 오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 뿐이죠.”

지우는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당한 것 같았다.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A등급에 오른 사람이라고 해 봐야 자기까지 해서 전 세계에 네 명이 전부였다. 그 위에 다른 등급이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끝이란 없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A등급 위의 단계가 마지막 고지인 것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우를 대신해서 지연이 야로슬라프에게 질문을 했다. 그가 했던 말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질문들이었다. 야로슬라프는 지연의 말에 대답을 해 주었다. 나중에는 지연도 할 말을 잃었다.

“그… 텀은… 얼마나 되는 겁니까? 레벨을 올리지 못하면 차크라가 폭주하고 헌터들에게 사냥을 당하게 된다고 했죠. 레벨을 올리는 기간은 얼마로 정해져 있는 겁니까? 얼마동안 레벨을 올려야 된다는 겁니까?”

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1년입니다. 등급이 올라가고 1년이 지나기 전에 차크라가 폭주해서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1년을 넘긴 시점까지 레벨을 올리지 못하면 차크라가 폭주하고 도망다니다가 헌터들한테 잡혀서 죽었죠.”

“……!”

“재미있는 게 뭔지 압니까?”

야로슬라프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 회색 눈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지우는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내가 B등급이 되고난 후로 361일이 지났어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4일이 남았다는 거죠.”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지우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람이 극도로 충격을 받으면 웃음이 나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야로슬라프는 지우를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짓을 수사관이 밝혀낼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연쇄 살인범의 눈빛이 저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우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적셨다.

이게 그저 기분 나쁜 꿈이라면 다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에서 깼을 때, 옷을 흠뻑 적신 땀을 식히고 나면 머릿속에서 다 사라지는, 그냥 그런 꿈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전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지연이 물었다. 지연은 그나마 대화의 진실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야로슬라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자기를 죽이려고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온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던 것이다.

야로슬라프는 그제야 지연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 이 여자도 여기에 같이 있었지, 라고 뒤늦게 깨닫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야로슬라프의 몽환적인 회색 눈동자에 지연의 얼굴이 맺혔다.

지연은 야로슬라프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될지 궁금했다. F급 헌터 타투가 나타난 이후로 각 등급을 올리는데 1년 미만의 시간이 걸렸을 테니 22살이 채 안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실제로,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이 대부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는 말도 했고 지우가 동류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젊고 찬란한 사람이, 4일 후에 자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로슬라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러시아에는 헌터 아카데미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괴수에 대한 것도 가르치고 무기를 다루는 법도 가르쳐주죠. 헌터 아카데미에 젊은 교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랑 같은 차크라를 가지고 있었어요.”

지연은 질문을 해 놓고 다른 생각을 해 대는 중이었기 때문에 야로슬라프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잠시 놓쳤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죠?”

지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B급에서 A급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죽었죠.”

야로슬라프가 당연한 얘기라는 듯이 말했다.

“사냥을… 당한 건가요?”

지연이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 세멘노프.”

야로슬라프는 그 교수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면 그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지연은 곧 그 이름을 태블릿에 입력했고 세멘노프 교수의 사망 소식을 다룬 기사를 찾을 수가 있었다. 교수라고 해 봤자 그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다.

상상하고 있던 노교수 대신 첫사랑에 달뜬 것 같은 앳된 남자의 사진이 뜨는 것을 보고 지연은 안타까운 신음을 삼켰다. 자기가 보는 있는 그 사진이 죽은 사람의 사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언젠가는 지우의 얼굴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꺼번에 폭주했다.

“사냥당했다는 말은 안 나오는데…….”

지연이 말했다.

생각이 멋대로 흐르는 것을 막아보려고 억지로 소리를 내서 말을 하려고 했다.

“기사에 그걸 쓸 리가 없죠.”

야로슬라프는 다른 몇 명의 이름도 불러주었고 지연은 그 사람들 역시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사에 따르면 모두의 사인이 사고사였다. 모두가 헌터 타투가 나타난지 3, 4년 안에 죽었고 레이드로 인한 부상이나 질병이 없이 갑자기 사고를 당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세멘노프 교수는 우리를 모아서 같이 레이드를 하려고 했어요. 우리는 차크라 하나만큼은 풍족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차크라가 많다는 거랑 전투 능력은 별개더군요. 결국 세멘노프 교수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중에 헌터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죠.”

지우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혹시 A급 위의 단계로 올라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들은 게 있습니까?”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츠 아이 스톤과 경험치. 둘 다 필요합니다. 그게 S-1 등급이죠. 그 후로 S-2, S-3등급으로 계속 올라가게 됩니다.”

끝이란 없다는 말의 의미를, 지우는 그 순간에 깨달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알죠? 그런 등급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지우가 물었다.

“세멘노프 교수님은 꽤나 살고 싶어 했죠. 그래서 연구에 매달렸고요. 지금은 1급 괴수가 제한적으로 출현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나타나는 1급 늪조차 반경이 커지지 않고 침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언젠가는 헌터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날 겁니다. 그때는 S등급의 헌터가 없이는 공략이 불가능할 거예요. 그냥 S등급이 아니라 우리 같은 부류의 헌터가 필요한 거죠. 지치지 않는, 소진되지 않는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 말입니다. S등급이라는 이름은 세멘노프 교수가 붙였는데 그 사람은 헌터 타투에 그 등급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죠. 누구에게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A등급에서 등급을 올리게 되는 사람들의 헌터 타투에 뭐라고 나타날지는 나도 궁금해요.”

야로슬라프가 말을 하는 동안 지우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통역기로 야로슬라프의 말이 통역되어 나오고 있었다.

지우와 지연이 하는 말도 그런 식으로 야로슬라프에게 전달되었다.

“당신의 아이입니까?”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지우는 그를 바라보았다. 야로슬라프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은 게 아니라는 듯이 지우를 바라보았고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어떻습니까? 혹시. 차크라가 보입니까, 지금부터?”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아이한테도. 나와 같은 차크라가 나타납니다.”

“특이한 경우군요. 정말로요. 우리같은 차크라가 나타나더라도 그건 전부 헌터 테스트때 나타나는 건데요.”

“그럴 거라고 나도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야로슬라프는 지우를 바라보았다. 아주 중요한 얘기라는 듯이 지우의 눈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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