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122화 (122/331)

0122 / 0331 ----------------------------------------------

5부. A급 헌터

공략을 하기에 앞서, 괴수의 사체를 어떻게 쓸지 생각해보는 건 심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이미 전투에서의 승리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자, 해보죠.”

지우가 소리쳤다. 그가 늪 아래에서 소리칠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했지만 그가 말한 첫 음절과 마지막 음절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 왔다. 그의 엑스 블레이드가 주인을 따라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시선을 뺏기지 않고 공격을 준비했다.

괴수도 같이 날아올랐지만 지우가 훨씬 더 빨랐다. 지우가 딛고 도약을 한 땅에는 깊은 구멍이 파여 있었다. 지우의 엑스 블레이드가 괴수의 목에 걸쳐졌을 때 괴수의 목에서는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댐이 터진 것처럼 피가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금속에 피가 스며들면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맵에 가득 울려퍼졌다.

“젠장.”

그 목소리는 분명히 이익헌의 목소리였다. 그럴 거였으면 팔을 갈아 끼우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지 않냐는 신음 소리였다. 지우는 그런 익헌을 보고 씨익 웃을 뿐이었다. 익헌이 다른 동료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스스로 탱커의 팔로 갈아 끼워준 것이 지우에게는 고맙게 느껴졌다. 서규태와 강현도 거기에서 힘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태인이 빠졌지만 괴수의 개체가 작아선지 태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강현은 괴수의 등 뒤에 올라타서 한 쪽 날갯죽지를 야무지게 붙잡고 그 위에 올라탄 채 딜을 넣었다. 곧 괴수의 상처가 회복되겠지만 거기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면 안전지대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이 안전한 곳에 포지션을 잡는 것을 보고 이익헌은 더 이상 갈등할 것도 없다는 듯이 딜러의 팔로 갈아 끼웠다.

그때부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4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괴수의 머리가, 지우가 베어낸 곳에서 정확히 다시 돋아났다. 부활한 괴수는 미친 듯이 요동을 하고 격렬한 분노를 품어냈지만 강현은 로데오를 하는 것처럼 그 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착실하게 데미지를 입혔다.

서규태과 이익헌이 가끔, 괴수의 기습 공격에 땀을 뺐다. 지우는 다시 한 번 치명상을 입히고 다같이 공격을 하는 게 나을지, 자기가 혼자서 하는 게 빠를지 생각을 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을 들이면 언젠가 싸움이 끝나기는 하겠지만 그는 레이드를 빨리 끝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두리번거리면서 생각을 하다가 지우는 이익헌이 바디팩을 담아온 커다란 자루를 발견했다.

지체할 것 없이 괴수의 몸에서 뛰어내린 지우는 자루를 뒤집어서 쏟았다. 싸움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뭘 하는 짓인가 하고 모두가 지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지우가 그것을 들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괴수는 지우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벌레 같은 헌터가 날뛰는 것이 보였는데 그 후에는 갑자기 칠흑같은 어둠만이 펼쳐졌다. 괴수는 날개를 퍼득거리면서 몸부림을 쳤다. 자루가 괴수의 머리에 뒤집어 씌워졌다. 덕분에 괴수의 날갯죽지를 잡고 그 위에 올라 앉아 딜을 가하던 강현은 죽을 맛이 되었다.

"형! 그런 짓을 하려거든 미리 말이라도 해 주고 해요!"

강현은 지우를 향해 소리소리를 질렀다. 자루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앞을 볼 수 없게 된 괴수는 미친듯이 날뛰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 후로 괴수의 움직임은 제한이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니 잔뜩 움츠러들고 겁을 먹어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헌터들은 이내 괴수의 움직임에 익숙해졌고 각자 가장 편한 장소에서 딜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지우도 이제 괴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서 무기를 크게 휘두르기보다는 괴수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효과적인 공격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무기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지우에게 임정이 론 디어를 던져 주었다. 론 디어는 공중에서 적당하게 회전을 하고 지우의 손 안에 정확히 안착했다.

이익헌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구시렁거릴 것이 훤했다. 론 디어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큰데 남의 여자 허벅지를 주무르듯이 지우가 너무 자주 애용을 한다는 말이었지만 지우는 가볍게 그 말을 무시해 줄 뿐이었다.

사실 이익헌도 말만 그렇게 했지, 지우가 론 디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같은 무기를 사용하다보면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한 활용방식을 지우로부터 배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지우를 보면 지우가 하는 것들을 자기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품어졌다.

지우는 임정을 향해 웃어보이고 론 디어를 쥐고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 후로도 싸움은 한동안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1급 괴수의 체력이 워낙 높아서 하급 괴수들을 처리할 때 걸리는 시간과 차이가 컸다.

그러다가 앞을 볼 수 없는 괴수가 임정이 있는 쪽으로 비틀거리면서 몸을 움직였고 지우는 곧바로 괴수의 앞을 막아서며 괴수의 가슴팍에 론 디어를 찔러 넣었다. 길이가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칼이 괴수의 가슴을 파고 들었을 때 그 안에서 괴수의 피와는 다른 색깔의 빛이 같이 뿜어져 나왔다.

상처 속에서 퍼지는 지우의 차크라였다. 괴수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임정은 멀리 물러나면서도 계속해서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임정이 충분히 멀리 도망친 것을 보고서야 괴수를 놓아 주었다. 괴수는 앞으로 푹 거꾸러졌고 헌터들은 집중적으로 딜을 퍼부었다. 괴수가 부활을 하기 전에 괴수의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고 괴수의 입에서 러프 스톤이 굴러나왔다. 지우는 러프 스톤을 회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임정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지우가 그렇게 물어올 때마다 임정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격렬한 싸움을 마친 사람은 자신인데도 지우는 늘 임정에게 그것을 물었다.

‘괜찮아?' 라고.

마치 임정이 지우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우의 얼굴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 주었다.

“오늘은 러프 스톤이 두 개네요. 이거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요. 괴수를 늪 밖으로 끌어내서 다른 괴수가 살고 있는 늪에 던져 넣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먼저 싸우게 하는 거죠. 그러면 자기들끼리 싸우고 하나만 남겠죠.”

강현이 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늪 안에 있는 괴수를 어떻게 늪 밖으로 데리고 나올 건데? 오늘은 스스로 늪 밖으로 나온 거였지만 말이야.”

이익헌이 말하자 강현은 곧바로 아차차, 라고 하면서 아까워했다.

“이건 피처럼 붉은 빛이네요. 심장 같아요.”

서규태가 괴수의 러프 스톤을 주워다가 임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피처럼 붉은 빛이 감도는 심장 같은 러프 스톤이었다.

“써전님. 닭털도 뽑아본 적 있으세요? 이거. 끓는 물에 확 집어 넣어야 잘 빠지는데.”

강현의 말에 써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써전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자기가 닭털까지 뽑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규태가 막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이익헌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닭털은 꼭 가져가야 돼요. 이걸 목구멍에 찔러 넣어서라도, 징징거리는 수집가들 입을 막아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은 천기정 전무가 바디 펌의 능구렁이들을 달래고 설득하고 있지만 그래도 입을 막을 걸 한 번씩 주기는 해야 돼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거든요. 특히 이렇게 헌터들한테 가치가 없는 물건들이 양보하기에 좋잖아요. 닭털로는 무기나 장비를 만들지는 못하니까요.”

“화살 깃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강현이 말하자 이익헌의 귀가 움직였다. 말 그대로 솔깃해진 것이다.

'흠. 화살깃이라?'

이익헌은 매의 눈을 하고 괴수의 깃털을 바라보았다. 바로 견적이 나왔다. 되는 말이었고 이루어질 일이었다.

“물건을 원하는 열 사람한테 열 개의 물건을 다 줄 필요는 없는 거겠죠. 열 명 중 이긴 한 사람한테만 그걸 가질 수 있게 하면 효과는 더 극대화될 겁니다.”

서규태가 말했다.

“나머지는 화살깃으로 쓰자는 거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익헌도 마음을 거의 정하고 있었다.

“화살깃을 이걸로 대체해서 만들었을 때 화살의 공격 증폭률이 크게 오르는지 먼저 시험을 해 보고, 공격 증폭률이 오르면 당연히 화살 깃으로 써야죠.”

서규태가 말했다. 서규태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징징거리는 수집가의 비위를 맞춰주려는 이익헌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때 보면 서규태에게 더 냉철한 결단성 같은 것이 보였다.

“수집가들한테는 닭털 하나만 주고요?”

“그러면 그때야말로 환장할 걸요? 세상에 열 개가 있는 걸 가지고 있다는 거랑 하나뿐인 걸 가지고 있다는 거랑. 그 차이가 어떨 것 같으세요?”

서규태의 말에 이익헌은 모든 고민을 끝낸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 전무만 힘들게 생겼군요. 징징이들을 상대하려면. 자. 그러면 이제 뭘 어떻게 도우면 됩니까? 닭 털은 어떻게 뽑나요?”

“그러게요…….”

서규태에게도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

러시아 정부에서는 즉각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이익헌에게는, 그들이 미국 정부보다는 클랜 A의 심리를 조금 더 잘 파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정부는 클랜 A가 공략한 두 마리의 괴수 사체와 러프 스톤에 대한 세금도 면제를 해 주겠다고 했다. 그 부분이야말로 러시아 정부가 내린 신의 한 수였다고 이익헌은 생각했다.

세금이야 내도 그만이고 안 내도 그만인 거지만 러시아 정부는 그렇게 함으로써 클랜 A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 준 것에 대한 성의 표시를 나름대로 한 것이다. 자기들의 힘으로 1급 괴수를 넉넉히 해 치울 능력이 되고 그 괴수의 러프 스톤을 회수할 능력이 되었다면 러시아 정부에서도 그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고, 그 늪의 반경이 커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만 생각해 오고 있는 판이었는데 클랜 A가 늪을 탈출한 괴수와 1급 괴수의 늪을 한꺼번에 해치워줬으니 고마움이야 이루 말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그 고마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을 하느냐, 아니면 정치적인 계산을 깔고 숨기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 거였는데 러시아 정부는 클랜 A에게 직설화법이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서규태는 러시아 정부의 연락을 받았을 때 치안대와의 협조 문제에 신경을 써 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을 해 두었다. 치안대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치안대원 중에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가 있었다는 지연의 말 때문에 조만간 치안대에 가서 헌터들을 만나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이유였고 그 이유를 절대로 그대로 밝힐 수는 없었기에, 러시아의 선진 치안대 조직을 배우고 싶다는 말로 깨끗하게 겉을 치장했다.

러시아 정부는 자신들의 사정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기들은 절대로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 극구 사양할 일도 아니어서 서규태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별 것도 아닌 일을 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클랜 A로부터 고맙다는 인사까지 챙겨들었으니 그들로서는 꽤 흐뭇한 기분까지 들 지경이었다.

“치안대에는 내일 공략이 끝난 후에 가 보는 거죠?”

지연이 지우에게 묻자 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던가요? 우리 지우씨하고 똑같은 차크라가 보였어요?”

임정이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