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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몇 천 조라면, 아니, 그 백 분의 일이 작은 나라들의 한 해 예산과 맞먹는 수준인데.
“도대체 우리한테 일을 얼마나 시키려고 그런 얘기를 한 걸까요? 그건 우리가 러프 스톤이랑 괴수 사체를 가지는 것과 별도로 책정되는 대가인 거잖아요. 맞죠?”
임정이 물었다.
지우도 걱정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츠 아이 스톤을 받겠다고 하면 그걸 빌미로 우리를 영영 놔주지 않을지도 몰라. 아예 귀화를 시켜 놓고 우리를 죽을 때까지 혹사시킬지도 모른다고. 러시아잖아.”
태인이 다소 편파적인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 그거. 받아들이지 말죠? 덫에 걸리는 것 같아요.”
임정이 말했다.
“아니. 그건 우리가 제안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열 개의 늪을 처리해주겠다. 스무 개의 늪을 처리해 주겠다. 그렇게요. 그걸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면 러시아 정부가 거절하겠죠.”
이익헌이 말했다.
모두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캐츠 아이 스톤을 조각내서 나누는 건 안 되는 거죠?”
강현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것 같았다.
“그쪽에서는 얼마 정도나 생각하는 것 같던가요?”
강지연이 물었지만 그 말에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였다.
“아, 이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안 된다고 해요.”
태인은 마구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미국 정부와의 계약 내용에 따르면 1급 괴수의 공략을 시도하는데 받게 되는 돈이 2천억이었고 괴수의 체력을 십 퍼센트 깎아낼 때마다 50억의 보너스가 붙게 되었다. 거기에 성공 사례금이 천 오백억으로 총 4천억을 받았다. 러프 스톤과 괴수의 사체는 별도로 해서, 세금도 없이 그렇게 받은 것이다.
만약 클랜 A가 러시아로부터 캐츠 아이 스톤을 받는다면 2천개가 넘는 1급 괴수를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 되었다.
“몇 천 조를 줘도 안 판다는 건 미국 정부에서 그냥 한 소리지 그게 캐츠 아이 스톤의 가격이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인도하고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셰익스피어 가격이 인도라는 건 아니잖아요.”
강현의 말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저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인가 하기는 했지만 생각을 해 보니 아주 틀린 말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강현이 무슨 말을 하면 덮어놓고 무시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 뿐이었다.
“그 전에. 우리한테 캐츠 아이 스톤이 필요한 건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한데요?”
서규태가 말했다.
그 말에 모두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었다. B급에서 A급으로 올랐을 때 공격력의 증가는 생각만큼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1000에서 1200으로 오르는 것 뿐이다. 지우는 그동안 하급 헌터일 때부터 쭉 쩌리였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한 번에 2000으로 주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물론 거기에 증폭률의 적용을 받으면 기하급수적으로 그 차이가 커지기는 하지만 지금 클랜 A의 상황에서는 B급은 절대로 안되고 반드시 A급이어야 한다라는 절박함이 전혀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시간을 넉넉하게 남겨 가면서 1급 괴수를 사냥하고 있었다. 클랜 A의 클랜원중 누구도 캐츠 아이 스톤을 열망하지 않았다.
“꼭 A급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라미실과 해리를 보면서 더 깨달은 바이기도 하고.”
이익헌이 말했다. 그 말이야말로 모두가 같이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그 말에 완전히 공감해요. 나는 내가 라미실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같이 레이드를 해 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늪 아래에서 내가 라미실보다 더 우월하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강현이 말했다.
말 한 번 잘했다고 하고 싶은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없어서 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캐츠 아이 스톤이 아니라고 해도 러시아에는 쓸만한 것들이 많아요. 유전이나 광산 중에 몇 개를 달라고 하는 건 어떻겠어요? 괴수 사체에서 얻는 부산물이 대체 에너지가 됐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늪이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괴수가 출현하지 않게 될 경우를 대비하는 거예요.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단 뭐라도 받아놓긴 해야 되는 거잖아요.”
강지연의 말에 하나 둘씩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말에 수긍했다.
“좋아. 그렇게 하면 우리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레이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칫 잘못하면 노예 계약에 묶이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찜찜했는데. 유전이나 광산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아. 사파이어 광산이라면 더 괜찮을 것 같고. 익스트림 헌터 고객들 중에 무기에 사파이어 장식이 박힌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하니까.”
이익헌의 말에 태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기에 사파이어를 박으면 공격 증폭률이 늘어난대요?”
“증폭률이 늘기는. 그냥 예쁘고 폼 나라고 박는 거지. 장식용으로. 어차피 무기를 쓰지도 못할 일반인들이 폼 내려고 사는 거야. 시계나 자동차를 사듯이 말이야. 우리는 거기에 사파이어 박아서 비싸게 팔고 돈만 벌면 되지.”
“맨날 벌어서 쓰지도 못하는 돈요?”
태인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일단 그 조건으로 다시 얘기를 하는 걸로 하고. 다른 분들은 레이드 준비를 해 주세요. 늪에 미리 가서 보고 괴수 유형이랑 맵에 대해서도 파악을 하고. 특히 강지연씨. 부탁해요. 써전님이랑 지우씨는 협상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던데 이번엔 나하고 찢어집시다. 탱커님이 나하고 같이 가는 걸로 하죠.”
이익헌이 나눈대로 팀을 이루었고 곧 각자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흩어졌다.
러시아 정부 측은 동정심을 유발하려던 작전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쓴맛을 다셨다. 한 입에 넣기 어려운 커다란 덩어리를 주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를 할 줄 알았더니, 작은 조각 여러 개를 요구하는 치밀함까지 보이는 것을 보고 클랜 A가 대충 만들어진 팀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클랜 A가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
다른 헌터들이 다음날 공략할 1급 늪을 조사하러 간 동안 지연은 따로 떨어져서 주변의 늪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 길을 태인이 동행해 주었다. 성장하는 1급 늪이 왜 생겨나는 건지, 지연은 거기에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어떤 힌트도 주어지지 않았다.
늪은 한국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늪 테두리의 색깔도 거의 비슷했다. 지연의 감응기는 계속해서 켜져 있었고 가끔 헌터들이 지나갈 때면 거기에 헌터 차크라의 반응이 나타났다. 헌터들은 지연과 태인이 클랜 A라는 것을 알고 순찰을 가장해서 주변을 얼쩡거렸다. 클랜 A를 직접 봤다는 게 신기했는지, 앵글을 교묘히 잡아서 한 화면에 지연과 태인과 자신들의 모습이 다 들어가도록 해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지연과 태인은 자기들이 사진에 찍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러시아 치안대원들의 셀카 귀퉁이에 찍히는 중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풍기는 카리스마 때문인지, 아니면 치안대 상부에서 특별한 지시가 있어서 그랬는지, 같이 사진을 찍자고 직접적으로 접근을 하거나 귀찮게 구는 사람은 없었다.
지연은 감응기에 나타나는 헌터 차크라를 볼 때마다 남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들한테는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왜 지우의 차크라 문제를 떠맡겠다고 나섰던 건지 지금도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이라도 자기는 물러서고, 그 일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찾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었다. 지우와 클랜 A의 돈이라면 실력있는 과학자들을 사서 그 문제를 풀 방법을 찾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태인은 지연이 무슨 생각을 아는 듯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개 그런 문제들은, 혼자 고민하게 놔두면 곧 스스로 답을 찾게 마련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지연도 마찬가지여서 몇 분 동안 혼자 한숨을 쉬고 낙심을 하고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은 자기라고 마음을 굳혔다.
감응기를 들고 늪의 주변을 조사하면서 지연이 갑자기 물었다.
“왜 이 늪들은 자라나는 걸까요? 아니. 왜 다른 1급 늪들은 커지지 않는지 그게 더 이상한 거긴 해요. 2급 늪에서 5급 늪까지는 전부 다 커지는데 1급 늪만 커지지 않는 게 이상한 거였죠.”
“그건…….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게 기다려주는 것 같아요.”
태인이 말했다.
“그게 뭔데요? 뭐가 누구를 기다려주는 건데요?”
“시스템요. 시스템이 우리를. 우리가 강해지기를요.”
“왜요? 아니 그것보다 먼저. 시스템은 누구 편인데요?”
“우리 편은 아니겠죠. 괴수의 편도 아닐 수도 있는 거고. 시스템은 경기의 심판 같아요.”
“심판요?”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어요. 그냥 내가 느끼고 있었던 걸 말한 것 뿐이니까.”
태인의 말에 지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판이. 우리가 강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거군요. 괴수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괜한 말을 했나보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요.”
태인이 재차 말을 했기에 지연도 더 이상 얘기를 하지는 못했다. 처음에 늪이 나타나고 늪의 반경이 점점 커지고 그 안에서 괴수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것을 보면 시스템이 심판 같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인이 논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지연도 그만두었다.
“늪 아래는 어떻게 생겼어요?”
지연이 묻자 태인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감응기로 보이는 거랑 같죠.”
"아."
대답이 성의없다고 느끼면서 지연은, 태인이 자신과의 대화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손을 탁탁 털면서 늪의 조사나 마치려는 지연을 바라보다가 태인이 말했다.
“바람이 불기도 해요.”
“네?”
“늪 아래요. 나는 그게 가장 신기했어요. 바람이 분다는 게. 그리고 그 바람이 때에 따라서 어떤 때는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해요.”
“아…….”
“그곳에 따뜻한 바람이 불면 굉장히 희한한 기분이 들어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지연은 태인이 자신의 방식으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해 주었다는 게 고마웠다.
“나는 절대로 못 보겠죠? 아, 아니에요. 나는 당연히 못 보지. 헌터도 아닌데.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엄청 멍청한 소리만 한다고 생각하겠네요.”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늪 아래의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거. 그러고보니까 아무한테나 허락된 게 아닌데 나는 그동안 너무나 무감각하게 그런 걸 누려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
“다음에 가면 사진을 찍어다 줄게요. 그건 전혀 어렵지 않으니까.”
“사진으로는 많이 봤는데 그게 잘 안 느껴져서요. 뭐. 당연한 거겠지만.”
“그렇겠네요.”
두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어를 배운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렇게 배운 외국어로 처음으로 외국인을 만나서 말을 하는 것처럼 어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다른 때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를 하는 것과는 달랐다. 뭔 놈의 대화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실컷 할 말을 생각해서 대화를 이어가지만 그 말을 듣고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되면서 왜 내가 그런 말을 이렇게 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곤 했다.
그래서 자기 말을 몇 번이나 되돌아보게 됐다.
‘진짜 멍청하게 들렸겠다, 이 말은.’
그런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