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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사랑을 알아? 어? 니들이 사랑을 알아? 어?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서. 당신들이 몰라? 아니. 알아?”
“알고 싶지도 않아요. 생신 축하드려요. 써전님.”
강현이 제 잔을 서규태의 잔에 쨍, 하고 부딪치면서 말했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건 말이야.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팀의 팬이 되는 거랑 마찬가지야.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어? 그건 말이야. 희망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대할 수도 없는 그런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서규태를 보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헤어진 애인이 있나봐. 써전님한테.”
지우가 임정에게 말했다.
임정도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이익헌은 혼자서 매의 눈에 불을 밝히고 파티에 참석했던 여자들을 스캔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발견하고 천기정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익헌이 엄지와 검지로 입을 쓰다듬고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천기정이 즉각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무엇을 모의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건 여자들 뿐이었다.
서규태의 이상형이 어떤 여자인지를 모르는 여자들.
태인과 강현이 서규태를 부축하고 데리고 나갔다. 서규태가 잠에서 깼을 때 서규태의 옆에는 입이 작고 손바닥이 부드럽고 손가락이 긴 여자가 누워 있었다. 서규태는 그게 누구의 짓인지 알 것 같았고 여자가 깨기 전에 재빨리 침대에서 도망쳐나왔다.
엉망진창인 생일파티 같았지만 모두에게 그 날은 오랫동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
천기정이 돌아가기 전에 지우를 찾아와 했던 말 때문에 지우는 머리가 아파왔다.
용하가 천기정을 찾아와서 한 사람의 일을 부탁했다는데 그에 대한 결정을 지우가 해 줬으면 한다는 말이었다. 신용하에게 사촌 여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지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용하에게도 그건 충격적인 소식이었던 모양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랬다.
생후 6개월째부터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살던 사촌 여동생한테 갑자기-갑자기는 아니고 헌터 테스트에서- 헌터 타투가 나타났고 헌터로서의 삶을 반대하는 부모를 피해서 사촌 동생이 갑자기-이번에야말로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와 느닷없이 용하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촌의 이름은 신세진이었고 남한테 신세지는 일을 별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천기정이 말했다. 멀뚱히 쳐다보면서 듣고 있던 지우에게 천기정이 웃으라고 말했다.
“아. 웃기시려는 거였어요? 그 말씀은 천 대리님이 하시는 말씀인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아아. 아하하하하.”
“됐습니다. 어쨌거나 신용하씨는 클랜 A에서 신세진씨를 맡아줄 수 있겠냐고 물어봐달라고 했어요. 물어보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고요.”
“세진이란 애. 몇 살인 거죠?”
“만 열 여덟살이죠. 좆만한. 아니. 아주 어린 친구라고요.”
“우리가 걔를 뭘 어떻게 해 주기를 바란대요, 용하는?”
“용하씨도 지금 답답해하고 있어요. 지금 온 세상이 클랜 A 소식으로 떠들썩하잖아요. 용하씨가 지우씨의 절친이라고 자랑을 하고 싶었을 거라는 건 당연한 거예요. 나같은 사람도 우쭐해지던데. 당연한 거잖아요.”
“천 대리님이요? 아, 천 전무님. 제 머리도 새 대가린가봐요.”
“아뇨. 나는 천 대리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습니다. 내 주변에는 새 대가리가 많지 않아서 그 말을 들으면 편해요.”
“어쨌든. 클랜 A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는지 아시잖아요. F급 헌터가 끼었다가는.”
지우가 말했다.
“저도 충분히 설명을 했는데 용하씨는 자기한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도 잘 안다면서요.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레이드에 데리고 가서 겁을 주고 떨어져나가게 해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하더라고요. 나는 말만 전해보겠다고 했고 신용하씨도 그거면 충분하다고 했어요.”
“일단 다른 분들한테도 말해 보기는 하겠지만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때를 대비해서 이걸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천기정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우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지우의 스마트폰으로 그 사진들을 전부 전송해 주었다. 예쁘장한 이마, 커다란 눈, 전체적인 인상을 귀여워보이게 하는 앙증맞은 코. 무엇보다 귀여운 건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것 같은 통통한 볼이었다.
“귀엽죠?”
천기정이 물었다.
“귀엽네요."
"일단 말이나 해 봐요. 다른 사람 부탁이라면 내 선에서 잘랐을 텐데.”
“네.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용하 부탁이라면 저도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죠.”
지우가 말했다.
신세진이라. 클랜 A의 F급 클랜원이라.
지우의 머릿속에 미궁이 만들어진 것처럼 해답은 보이지 않고 생각은 자꾸 얽히기만 했다.
***
해리와 라미실의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브뤼였다. 브뤼는 그 이야기를 해 주는 것으로 클랜 A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었다.
클랜 A의 활약이 이어질수록 라미실과 해리가 언론 플레이를 해 가면서 클랜 A를 견제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날이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그리고 우국 성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해서 클랜 A에 대한 반감이 슬슬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들은 클랜 A가 미국의 늪에서 수확한 러프 스톤을 가져가면서도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는 문제를 들어 그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애초에 불공정한 계약을 한 탓에 미국의 혈세가 줄줄 낭비되고 있다는 여론도 생겨났다.
그것을 뒤에서 조장하는 것이 라미실과 해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클랜 A는 기가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익헌은 그 자리에서 천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바디 펌의 미국 지사에 업무 요청을 하고 클랜 A가 미국을 떠날 때까지 머물 수 있는 곳을 당장 수배해 놓으라고 말해두었다.
하지만 그 일은 브뤼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이미 다 끝나 있었다. 브뤼는 해변을 낀 대규모 별장을 클랜 A를 위해 준비해 두고 있었다.
클랜 A가 문을 열고 나갈 때에야 라미실과 해리는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았다. 그들은 여론이 나빠진 것이 자기들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브뤼도 바보는 아니었고 그런 일을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한 것은 아니어서 라미실과 해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러시아에서 1급 늪이 성장하기 시작했다는 외신 보도가 전해졌다. 러시아의 헌터 협회에서는 즉각 클랜 A에 도움을 요청해 왔고 클랜 A는 자기들이 1급 괴수를 처리하는데 국적을 가를 이유는 없다는 결정 하에 러시아로 이동했다.
브뤼는 유럽의 모든 나라와의 관계를 자기가 책임지고 조율해 줄 수 있다면서 언제든지 자기를 써먹으라고 어필했다. 하지만 클랜 A의 클랜원들은 A급 헌터들에게 슬슬 지겨워져가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는 했다. A급 헌터와 클랜 A의 관계는 한 남자의 사랑을 두고 싸우는 여자들 같았다. 결국에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라미실과 해리는 그야말로 악수를 둔 격이었지만 클랜 A로서도 언제까지나 그들의 사정만 봐 줄 수도 없었다.
강현과 태인은 1급 괴수가 늪에서 튀어나와서 사람들을 다시 정신 차리게 만들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까지 했지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강현과 태인의 뜻대로 되게 되었다. 러시아의 1급 늪에 오픈일이 가까워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미국에 남아있을 명분이 약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클랜 A는 미국을 떠나면서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익헌은 특유의 협상 능력으로 러시아로부터 좋은 조건을 얻어냈다.
협상 테이블에는 이익헌과 서규태, 지우가 나가 있었지만 그들은 한 마디도 하지 말도록 이익헌에게 단단히 주의를 들은 후였다. 그렇게 미리 말해놓지 않으면 보나마나 인정상 그냥 해 주자고 할 게 뻔했다.
러시아에서는 미국과 어떤 조건으로 계약을 했는지 계약서를 먼저 보여달라고 요구를 했다가 이익헌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후에 말을 바로 번복했다.
“그동안 다른 공격대랑 어떤 식으로 계약을 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저희 쪽에서 몇 가지 조건을 먼저 제시를 할 텐데 그 중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게 있다면 우리는 이 협상을 시작조차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이익헌은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는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만한 조건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서는, 세금이나 러프 스톤, 괴수의 사체들은 포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클랜 A에 막대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어려웠다. 클랜 A는 러시아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러프 스톤과 괴수 사체만 챙기는 것으로 하고 조건을 변경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 측에서도 자기들이 돈을 줄 수 없다고 하면 클랜 A가 인정상 양보를 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둘 간의 줄다리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게 안 된다면 현물 지급 방식도 가능하긴 합니다. 러프 스톤이나.”
러시아의 굵직한 기업의 지분을 요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야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이익헌은 그렇게 어물쩡 넘겼다.
“캐츠 아이 스톤 하나면 성장하는 1급 괴수를 몇이나 공략해 줄 수 있습니까?”
러시아 대통령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이익헌이었다. 서규태와 지우는 눈만 깜빡거릴 뿐 이게 무슨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러시아에 캐츠 아이 스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그 경쟁적인 성향에 미루어 볼 때 A급 헌터를 보유할 수 있는 기회를 미루고만 있었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캐츠 아이 스톤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있으면 A급 헌터를 육성할 수 있다는 건…….”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이익헌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 이 사람들이 그 정보를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그렇다면 이 얘기를 하는 게 클랜 A에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익헌의 오판이었다.
“그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A급 헌터로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B급 헌터만 여러 명 있고 그중에 특출난 사람이 없어서 캐츠 아이 스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는 클랜 A가 미국에서 러시아로 건너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미국이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히 머리를 쓰면서 속 보이는 짓을 하지는 말자고 미리부터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캐츠 아이 스톤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이익헌은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자세한 것은 클랜원들과 상의를 한 후에 다시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하고 자리를 파했다.
숙소는 미리 마련이 되어 있었다. 먼저 가서 쉬고 있던 일행은 대통령이 제안한 캐츠 아이 스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요?”
태인이 물었다.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캐츠 아이 스톤을 몇 천 조를 받더라도 팔지 않겠다고 해 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