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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마침 TV에서는 19금 방송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게 꽤 적나라했다. 화면이 크고 화질이 좋다보니 모니터 안에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지독하게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여자들은 한복을 입고 나왔는데 저고리는 벗고 치마만 입고 있었다. 가슴을 한껏 부풀려서 저마다 유두만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나왔는데, 연출된 것인지,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면서 서로의 치마를 밟아서 치마가 벗겨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면 재빨리 모자이크 처리가 되면서도 유두가 드러난 상황에서 자기들끼리 재미있어 하면서 웃는 모습과 자막이 적나라하게 나왔다.
그렇다고 TV를 끌 생각은 안 하고 강현이 이 방송을 같이 보는 게 적합한가 하는 주제로 얘기가 나왔다. 그때도 역시 강현을 감싸준 것은 지우와 태인이었다. 야구 동영상으로 뭉친 끈끈한 동지애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나한테는 왜 이렇게 여자 복이 없지? 주위에 있는 게 전부 다 이렇게 칙칙한 아저씨들 뿐이고. 나도 저렇게 샤방한 누나들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강현이 넋두리를 하자 태인이 웃었다.
“강지연씨 있잖아, 강지연씨.”
“지연이 누나 말고요. 저렇게 쭉쭉빵빵한 여자 말이예요.”
“강지연씨도 쭉빵이예요.”
그 말을 한 사람이 설마 서규태일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일제히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익헌은 입술도 달싹하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서규태를 향해 움직였다. 서규태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자기가 실언을 해 버린 그 순간을 어떻게든 지우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도대체! 써전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태인이 물었다.
“아니. 그게요.”
서규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일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으로 이실직고를 했다. 임정과 강지연을 찾아갔을 때 강지연이 샤워를 하고 나와서 그 모습을 봤을 뿐이라는 거였다. 서규태는 임정이 강지연에게 옷을 던져줘서 곧 중요한 여러 부위가 효과적으로 가려졌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사실대로 말한 것 뿐이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이익헌은 대놓고 비난을 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아니. 그럼. 그걸 얘기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게 끝나갈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갑자기 태인이 서규태를 향해서 질문을 했다.
“써전님은 왜 싫으셨는데요?”
“…뭐가요?”
“왜 젊은 여자 몸을 보는데 불쾌감을 느끼셨냐고요. 그리고 강지연씨가 남들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그렇게 하고 다닌 것도 아니고 자기 집에서 그런 건데. 침입자는 오히려 탱커님이랑 써전님이었던 거잖아요. 아니. 저는 뭐. 써전님이 잘못하셨다고 지적하고 싶은 게 아니라 좀 궁금해서요. 불쾌하셨다고 하니까. 강지연씨 몸매가 더러웠어요?”
“아뇨. 훌륭했죠. 예술적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만큼. 팽팽하고 탄탄하고 볼륨감 있고. 아. 내 동료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우리 이제 다른 얘기 합시다.”
“우리는 우리 동료들에 대해서 더 잘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목숨을 맡기는 사인데 그동안은 너무 무관심했어요.”
태인이 말했다.
“그런 쪽으로는 계속 무관심한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동료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되긴 하겠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거론된다는 걸 알면 강지연씨가 굉장히 불쾌해 할 겁니다.”
“아무도 말을 안 하면 되죠. 그리고 이 얘기를 저도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써전님이 빨리 대답을 해 주시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태인은 술김이라 그랬는지 꽤 집요했다.
“대체 뭘요?”
서규태가 포기한 듯이 물었다.
“왜 불쾌감을 느꼈는지 말입니다.”
“내 취향이랑 안 맞았으니까요.”
서규태는 당당하게 말했다.
“써전님 취향은 어떤데요? 이상형이 어떤 스타일이예요? 생각해보세요. 그만큼 나이를 드셨는데도 이상형도 모르고 있다는 건 슬프잖아요.”
강현도 관심을 보였다.
슬프잖아요. 슬프잖아요라는 말이 더 슬펐다. 슬프다는 생각 같은 것 안 해오고 이날 이때까지 잘만 살아왔는데 새파란 김강현이 ‘슬프잖아요.’라고 말을 하는 순간, 슬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뭐…….”
서규태는 자기가 왜 이 사람들이랑 이런 얘기를 하고 있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말하지 않겠다고 빼지는 않고 하나씩 하나씩 자기 생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은 입이 작은 여자가 좋고요. 그리고 손바닥에 살이 두툼한 여자가 좋습니다. 엄지를 접었을 때 접히는 부분 있잖아요? 거기에 살집이 많은 여자가 좋아요. 그리고 거기가 부드러워야 되고.”
“거기요? 거기가 어딘데요? 여자 거기요?”
태인이 물었다.
“미쳤습니까?”
“여자 거기는 원래 다 부드러운 거 아니예요?”
강현이 아는 척을 했다.
“그런 게 아니고요! 손바닥 안 쪽이 부드러운 사람이 좋다고요. 손가락은 긴 게 좋고요.”
서규태가 잽싸게 진화에 나섰다. 이상형이라고 말한 것 중에 외모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입술 크기 하나가 나온 것 같고 나머지는 전부 이상한 쪽이었다.
“에이. 써전님 변태시네. 무슨 이상형이 그렇게 기능 위주예요? 여자는 그걸 빼 주는 기구가 아니잖아요. 아놔. 써전님 그렇게 안 봤는데. 무슨 이상형이 손이랑 입에 대한 것만 나와요?”
천기정이 말하자 서규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태인이 사태를 수습하겠답시고 나섰다.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서규태는 역시 이럴 때 자기를 구해줄 사람은 애제자인 태인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태인을 바라보았다.
“일단. 써전님이 아니죠. 치안 1부장님이죠. 치안 1부장님의 기능적 이상형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그래놓고 강현이랑 같이 킥킥거렸다.
“진짜 그런 게 아니고. 내 말은. 아니. 사람이 그런 모습에 끌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서규태가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자 이익헌이 서규태를 향해서 장풍을 쏘듯이 손바닥을 펼치며 내밀었다.
“일단 내 손은 써전님의 이상형에 맞지만 나는 써전님을 사양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익헌의 손바닥이야말로 살집이 두둑하고 푹신하게 생긴데다 손가락은 길게 쭉쭉 빠져 있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한참 다갈다갈 웃어대던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면서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은 넉넉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일로 화장실에 간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오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강현은 방심을 하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사라진 사람들이 빨리 돌아오지를 않았다. 아마도 그 인간들이 빼려고 했던 것은 소변이 아닌 듯했다.
강현은 점점 심하게 밀려오는 요의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갑자기 떠도는 신세가 되어서 이곳 저곳의 화장실을 두드리고 다녔지만 문은 견고하게 잠겨진 채로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누구 계세요? 아직 멀었어요? 얼마나 걸려요?”
아무리 그렇게 물어봐야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층으로 내려가면 화장실이 있었지만 김강현도 김강현이었다. 다른 층으로 가는 건 귀찮고, 그 사이에 누군가 나오면 그동안 기다린 것이 굉장히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버틴 것이다.
강현은 남자 화장실 세 군데를 돌아다니고 세 군데가 모두 점령당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점점 참기가 힘들어지고 오줌보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문을 두드려도 자기 사정 아니라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유를 부렸다.
참다 못한 김강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여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밖에서 충분히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귀를 기울인 후에 화장실에 달려들어간 거였으니 저도 주의의무는 충분히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뛰어들어간 강현이 드디어 제 주니어를 해방시켜주고 마음껏 분출을 하도록 허락하고 있는데, 샤워 커튼이 옆으로 밀리고 안에서 강지연이 나왔다.
목에는 블루투스 헤드셋이 걸려 있었다. 강지연이 듣고 있는 음악이 강현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강현이 밖에서 그렇게 문을 두드려댔어도 듣지 못한 것이 당연해보였다.
강지연은 걸음을 빨리해서 타올을 잡아채려고 하다가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서 기우뚱하면서 비틀거렸다. 강현은 순수한 마음으로, 이 누님이 여기에서 넘어지면 허리 통증으로 꽤나 고생을 하시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민첩한 순발력으로 지연의 팔을 잡아주려고 했다.
술 탓이지, 평상시의 강현이 그렇게까지 바보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때의 강현은 그냥 바보였다.
강현은 용감한 기사처럼 지연을 구해주었지만 문제는 아직 오줌이 줄줄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과, 강현이 지연의 팔을 야무지게 잡은 덕에 지연이 바닥에 아주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허리 통증을 감내하는 것이 나았을 것 같은 더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점이었다.
강현은 손을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줌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울고 싶어져버렸다.
그날 제 목구멍에 술을 퍼 부었던 저를 찾아가서 명치를 때려버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졌다.
“윽, 누나!”
꺼이꺼이 울고 싶은 심정으로 강현이 비명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됐으니까 다 쌌으면 가라.”
강지연은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푹 숙여붙이고서 강현에게 말했다. 강현의 얼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밖에서 강현과 마주친 사람들은, 강현이 화장실 앞에서 부르짖다가 사라진 후에 그런 얼굴을 하고 기운이 쭉 빠져서 다니는 걸 보고 가까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싼 거야? 그렇게 급했어? 그랬으면 말하지. 그래도 이상한 데에 싼 건 아니지? 하, 자식. 여자 화장실에라도 가지.”
생각한답시고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이 더 미웠다. 강현은 지연과 마주치면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지연도 강현을 피했다.
굴욕도 세상에 그런 굴욕이 없었다. 기분 나쁠 틈도 없이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다음 날 남자들은 다시 그 자리에 모였다. 술이 안 깨서 레이드를 나갈 수 없다는 이유를 대고,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던 서규태와 천기정을 빼고는 모두 소파를 차지하고 널브러져 있었다.
또 태인이 TV를 켰는데 그 앙큼한 방송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야외 수영장이었고 여자 출연자들은 엎드린 채 다리를 벌리고 남자 출연자들은 그 안쪽에 썬크림을 발라주었다.
“왜 저기에 저걸 발라주지? 저기도 햇볕에 타요?”
강현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 잘못 대답을 하면 매장당하는 건 순간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날은 모두가 지뢰를 잘 피하면서 잘 넘어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 강현의 발에 걸리기까지는.
“저 여자 복근은 완전히 지연이 누나 같네요. 누나가 누워있다가 일어서려고 할 때 복근이 저렇게 되거든요.”
말을 다 해놓고 나서야 강현은 자기가 한 말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연의 명예와도 관련이 돼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를 밝히려다보니, 어째 처음보다 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고 사람들은 말없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는 누구도, 그 방송을 보지 않았다.
그래도 태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여자 화장실 앞을 지나가다가 강현의 신음 소리와, 다 쌌으면 가라는 강지연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왜 그렇게 기분이 착잡했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강현의 해명을 들은 그 순간, 명치에 걸려있던 뭔가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