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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이익헌의 목소리가 다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천기정은 자세한 위치와 아르마딜로의 크기, 그리고 사체 운반팀이 몇 개 팀이나 필요하겠는지를 물었다. 이익헌이 세띠 아르마딜로의 사체 운반에 필요한 써전의 수와 사체 운반팀의 견적을 내고 있는데 서규태가 나섰다.
“세띠 아르마딜로를 절단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건 내가 하죠.”
서규태가 말했다.
“사체 운반 헌터들이나 넉넉하게 보내라고 하십시오. 아르마딜로의 등껍질은 방어 장비를 사용하는데 엄청나게 유용할 테니까 늪이 사라지기 전에 전부 늪 밖으로 가져가야 돼요. 이번 건 하나도 포기할 수 없을 겁니다. 1그램도요.”
이익헌은 서규태에게서 들은 얘기를 천기정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강현이 아르마딜로의 러프 스톤을 수거해 왔다. 그들이 1급 괴수에게서 얻은 첫 러프 스톤이었다.
“자, 놀지 말고 일합시다. 오늘은 일이 끊이질 않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규태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들 사체 운반 헌터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적당한 칼들을 가지고 자리를 잡았다.
이익헌도 어느새 어물쩡거리면서 태인의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더, 더, 더 뒤로 가야죠.”
사체 절단을 하는데 있어서만큼은 자기가 훨씬 선배라고 뻐기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이익헌은 대꾸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움직였다.
“이쯤이면 됐어요?”
“네. 대충 된 것 같네요.”
태인이 말을 해 놓고 씨익 웃었다. 자기가 언제 이익헌과의 사이에서 우위를 점해보겠나 하는 것 같았다.
“자, 구령에 맞춰서 한꺼번에 아르마딜로 사체를 굴리는 겁니다. 등껍질이 위로 가게 해야 작업이 편할 거예요. 차크라가 안 될 것 같은 사람은 미리 빠져요.”
차크라가 안 될 것 같은 사람은 지우 빼고 모두였지만 모두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 손수 1급 괴수를 사냥하고 그 사체를 직접 절단하는 일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거대한 아르마딜로의 육중한 몸이 옆으로 굴렀다. 진짜 힘든 일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정하게 차크라를 흘려 넣으면서 등딱지를 피부에서 걷어내야 했다.
이익헌은 바디 펌 부사장 아니라고 할까봐서, 등딱지가 절단되지 않고 최대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옆에서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면서도 제일 못하는 사람은 이익헌이었다.
“살이 너무 많이 붙어 나가잖아요. 등딱지에 붙은 살은 그대로 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어요.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빠져요. 아까운 살을 축내지 말고.”
태인이 말하는데도 이익헌은 묵묵히 버텼다. 강현은 이익헌이 말도 못하고 태인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희희낙락이었다.
천기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는 모두의 기분이 좋았다. 이익헌은 천기정의 연락을 받으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바로 오지 않고 전화를 건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전화벨소리마저 미안해요, 이 전화 받지 마세요, 라는 것 같았다.
천기정은 사체 운반 헌터가 모자라다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면 화가 덜 나겠냐고 이익헌에게 물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챈 서규태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말로 내가 나설 때인가,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서규태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뭐가 있겠나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헌터들은 남는 건 버리는 수밖에 없겠다고 이미 마음으로 포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 서규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치안 1부장이다. 1급 괴수의 사체를 급히 수거해야 한다. 치안대에 남아있는 인력들은 모두 출동하도록.”
늪 아래에 있던 모든 헌터의 얼굴이 일시에 서규태를 향해 돌아갔다. 서규태는 그것으로써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듯,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일을 해 놓자는 생각으로 사체 절단에 전념했다.
은밀한 힘겨루기 양상이 펼쳐졌다.
치안대가 먼저냐, 바디 펌의 사체 운반 헌터들이 먼저냐. 결과는 치안대와 서규태의 승이었다. 하지만 바디 팩이 없어서 곧바로 나르지는 못하고 그들은 바디 펌의 차량과 인력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를 하고 있어야 했다.
바디 팩이 도착할 때까지 치안대원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1급 괴수의 사체를 멀찍이에서나마 구경했다. 세띠 아르마딜로가, 체력은 낮지만 공략하기가 까다로운 괴수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어떤 식으로 어떤 공격대가 공략을 한 건지 알고 싶어했다.
그것은 획기적인 뉴스였다. 드디어 1급 괴수가 공략된 것이다.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내 바디 펌의 인력이 바디 팩을 가지고 나타났다.
천기정은 늪에 도착했지만 늪 아래로 내려올 수가 없었고, 그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자기들이 절단해 놓은 세띠 아르마딜로의 사체를 바디 팩에 담아서 치안대원과 사체 운반 헌터들에게 넘겨 주었다.
출애굽의 장면이 연상될 정도로 장관이 펼쳐졌다. 수십명의 헌터들이 아르마딜로의 사체를 운반했다. 아르마딜로의 등껍질은 바디팩에 담을 수가 없어서 클랜 A의 클랜원들이 전부 동원되었다.
“어차피 자르긴 잘라야 되잖아요. 그렇죠? 어느 정도 선에서 자르는 게 좋을 것 같은지 이제 결정을 해요.”
서규태가 몇 번이나 그렇게 독촉을 했음에도 이익헌은 결정을 하지 못했다.
“이 분도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 장애가 있는 것 같아.”
태인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임의로 한 군데를 잘라버리자 이익헌의 얼굴이 창백해져버렸다.
“이걸 어떻게 부술 수가 있어!”
이익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
“이건 예술품이 아니라 보호 장비를 만들 재료예요. 크게 가치를 두지 않으면 이렇게 하는 게 쉬워져요.”
그러면서 태인은 이익헌이 보는 앞에서, 문화재를 파괴하는 테러리스트처럼 아르마딜로의 등껍질을 탁, 탁 깨서 조각을 냈다. 일단 그렇게 돼 버리고 나자 이익헌도 포기를 하는 게 훨씬 쉬워졌다.
“그런데 저희도 일당 받나요?”
치안대원 한 사람이 서규태에게 물었지만 서규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친분을 과시해보려고 시도했던 치안대원은 조용히 바디 팩을 들고 사라졌다.
늪이 사라지기 전에 아르마딜로의 사체는 모두 늪 밖으로 옮겨졌다. 모두가 늪 밖으로 나가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안의 상황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던 천기정은 공처럼 지우에게 튀어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지우의 팔을 잡아서 헌터 타투를 제 눈 앞에 가져다 댔다.
“이 사람 저 사람 제 손을 너무 막 잡는 것 같네요. 우리 콩알이 엄마한테 허락은 받고 잡아야 될 걸요? 아, A급 헌터가 되고 나니까 인기 폭발이네. 이렇게 귀찮을 줄 알았으면 생각 좀 해 보고 A급 헌터가 되는 건데.”
지우가 말하자 천기정은 놀란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1급 괴수 잡은 A급이! 말도 하네! 당장 싸인 좀 해 줘요. 우리나라 첫 A급이고 A급다운 세계 유일의 A급인데. 싸인을 어떻게 해 줄래요? 문신으로 새겨줄래요?”
천기정은 그답지 않게 꽤나 호들갑을 떨었다.
“선아영 대표랑은 얘기가 됐습니까?”
이익헌이 천기정의 정신을 차리게 하고 물었다.
“네. 아르마딜로의 등껍질을 회수하러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방패 장인 몇 사람을 당분간 감금시키고 일을 시켜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선 대표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네요. 아르마딜로 등딱지로 방패나 갑옷을 만들면 비싼 값에 팔릴 겁니다.”
“러프 스톤은요? 1급 괴수의 러프 스톤을 드디어 구경할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천기정이 지우와 서규태를 차례로 보면서 물었다. 누가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빨리 내 놓으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러프 스톤을 손에 넣었을 때 그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안녕. 나는 클랜 A의 자산관리사다. 만나서 반갑다. 네 친구들도 많이 데려와.”
천기정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가면서 인사를 건네는 걸 보고 이익헌은 이 사람이 과중한 업무로 드디어 미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갑시다. 가요.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는 겁니다. 클랜 A 사람들은 하나도 못 빠져요. 지구는 다른 놈들보고 지키라고 하고 오늘은 즐깁시다!”
이익헌이 혼자서 목청을 돋우었다.
“지연 누나도 부르는 거죠?”
강현이 말했다.
“당연하지. 파이널 환우회는 당연히 뭉쳐야지.”
이익헌이 그런 건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선아영 대표님도 부를까요?”
천기정이 묻자 이익헌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게 귀찮아졌는지 손을 내저었다.
“딱 거기까지만이예요. 더 이상은 아무도 더 부를 생각 하지 말아요.”
“어차피 그 사람들이 전부예요. 클랜 A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잊었어요?”
천기정이 말하자 이익헌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얼마나 폐쇄적인 곳인지 아느냐고요? 들어오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들이려고 사람 몸에 폭탄을 채워 넣으면서 여기가 폐쇄적이래. 나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는 누구도 이익헌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1급 늪이 공략되었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공략에 성공한 공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일시에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클랜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익헌은 딜레마에 빠졌다. 어느 정도는 클랜 A의 인지도를 높여야 미국 정부와 협상이 가능해 지겠지만 클랜 A가 1급 괴수를 공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많이 알려지면 클랜원 개개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우가 가진 차크라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도 있었다. 너무 빨리 유명해 지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언론의 집중 조명을 피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지나친 음주는 감사하다고 하지만 그건 술집 사장님들이 하시는 말씀이고 클랜 A의 클랜원들에게는 거대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이익헌은 좋은 곳으로 데려가주겠다고 했지만 클랜 A동만큼 좋은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내부 시설을 즐길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크로아티아산 최고급 대리석에 최고급 송아지 가죽, 핀란드에서 공수해 온 나무로 만든 사우나, 오케스트라를 앞에 두고 듣는 것 같은 최고급 음향 설비까지. 일부러 돈을 쓰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술은 종류대로 갖춰졌지만 맥주와 소주 말고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익헌은 클랜원들의 취향을 알지 못했다. 서로의 취향을 잘 알지 못한 것은 나머지 클랜원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익헌은 여자들이 있어야 제대로 즐기겠는지 은근히 물었고, 클랜원들은 자기들은 딱히 그런 걸 바라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바랄 거라고 생각하면서 누구 하나 나서서 거부를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그 결과 클랜 A동에 쭉빵 언니들이 대거 난입을 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잘 마시던 술도 갑자기 마시지 않고 대화도 뚝 끊긴 채로 서규태로부터 강현까지 누구 하나의 예외도 없이 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익헌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여자들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그러자 다시 얼음이 녹은 것처럼 원활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지우는 임정의 눈치를 보고 있다가 여자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다시 합류했다.
이익헌은 서규태에게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서규태는 특히 생각하고 있는 건 없다고 말했다. 이익헌은, 자기 주위에 괜찮은 여자들이 있으니 소개해 줄 수도 있다면서 좋아하는 스타일을 알려달라고 말했다. 서규태는 생각나는 게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그 순간을 넘겼다.
그때까지는 그렇게 다 같이 모여서 술을 마신 적이 없었고 서로서로 한 잔씩을 따라주다보니 금방 꽤 거나해질 정도로 서로 많이 마시게 되었다. 그렇다고 말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고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도 없어서, 사람은 많은데 술자리가 꽤나 적적하게 흘러갔다.
태인이 TV를 켠 것은, 정말로 할 얘기가 없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