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 / 0331 ----------------------------------------------
4부. 1급 괴수
임정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에게도 그곳이 이런 느낌을 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깊고 따뜻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거기에서 잠들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다가 지우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다 잘 될 거라는 느낌.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
그동안 애써왔던 모든 것이 보상받을 거라는 느낌.
너의 노고를 모두 다 안다고 누군가 말해줄 것 같고 가슴에 지우를 안아 편하게 쉬도록 해 줄 것 같았다.
그 순간 지우는 깜짝 놀라면서 일어섰다. 늪은 그곳을 떠나려는 지우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만을 위해서 기다리고 존재해왔던 곳은 다시 지우가 떠나려고 한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지는 듯했다.
지우는 무릎을 굽혀서 땅을 쓰다듬었다. 공간이 그에게 복종했다. 언제까지든, 지우가 다시 찾을 때까지 언제까지든 기다릴 거라는 맹약을 일방적으로 건네오는 듯했다.
***
“기분이 좋아?”
임정은 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기에게 말을 건넸다. 아기가 신이 나서 노는 게 느껴졌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기의 기분이 좋은 것 같아서 임정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출근 준비에 여념이 없을 줄 알았더니 강지연은 어느새 출근할 준비를 완전히 다 마치고 야채 쥬스를 만들어 왔다.
“부족해지기 쉬운 영양소 위주로 만든 거니까 맛이 없더라도 마셔보세요. 냉장고에 좀 더 만들어서 넣어 놨으니까 점심, 저녁으로 챙겨서 마시면 좋을 거예요. 걸쭉하고 포만감이 느껴질 거라 한 번에 많이 마시기는 힘들 거에요. 치안부장님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마시지 말라고는 해 뒀는데 사람들이 내 말들은 안 듣잖아요. 치안부장님이 한 번 얘기를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강지연이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갔다. 임정이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해 줘서 고마워요.”
“저한테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셨잖아요. 좋은 인연도 아니었는데.”
“……. 내가 한 건 아니죠. 강지연씨한테 재능이 없었다면 이 부사장님이 기회를 주지도 않았을 거고. 그건 전부 강지연씨가 스스로 이룬 일들이예요.”
“기회를 얻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는 아니까요. 그래서 고마워요. 그리고. 차크라를 구분하는 감응기는. 제가 꼭 만들게요.”
“부탁해요.”
"너도 이모를 믿어봐."
강지연이 임정의 배를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이라는 존재는 희한한 혈연 관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남남이 삼촌이 되고 이모가 되고 고모가 되고.
마침내 강지연까지 나가고 나자 적막감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레이드를 하러 나간 것 같았다. 빨리 캐츠 아이 스톤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이제 웃음도, 여유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난 저녁에는 천기정이 서재에 앉아서 한 손으로 머리를 괸 채 5급 러프 스톤부터 2급 러프 스톤을 펜 끝으로 밀면서 세고 있었다. 뭐가 1억짜리고 뭐가 50억짜리고 하는 개념은 없고, 빨리 계산해서 넣어놓고 잠 좀 잤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인듯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임정은 문득 그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그리워졌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지우였다. 지우가 활짝 웃으면서 임정에게 다가왔다.
“좋은 일 있어요?”
지우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요?”
지우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팔을 들어 보였다. 임정의 눈 앞에 그의 헌터 타투가 보였다.
“C급? D급 된지 얼마 안 됐잖아요.”
임정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진짜 놀랄 일은 그게 아니야.”
지우가 어찌나 환하게 웃었는지, 그 웃음에 눈이 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요? 공격력이 한 1200정도로 올랐어요?”
임정은 놓치지 않으려고 지우의 팔을 붙잡아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 있지 않았다. 공격력과 방어력 모두 40이었다. 그런데도 지우는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폭발할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요? 뭔데 그래요? 나를 놀리는 거 아니죠?”
임정이 조바심을 내자 드디어 지우가 손을 폈다. 천천히 그의 손바닥이 펼쳐졌다. 처음 보는 거였지만 임정은 그게 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캐츠 아이 스톤을 처음 보더라도 그게 캐츠 아이 스톤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던 이익헌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이걸 어떻게요?”
임정이 물었다.
“나한테 경험치를 준 마지막 늪의 괴수한테서.”
“대단한 거잖아요. 그렇죠?”
“응. 운이 좋았다는 말로는 안 될 것 같고. 그게 거기에 있는데 멍해지더라. 그냥 웃음만 나왔어. 그러고는 그걸 당신한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나오다가 러프 스톤을 안 챙겼다는 걸 알고 다시 돌아가서 러프 스톤을 챙겨왔지.”
“러프 스톤을 찬밥신세로 만들다니 대단하네요, 캐츠 아이 스톤은. 러프 스톤을 쩌리로 만들 수 있는 녀석이라니.”
“그렇지? 실컷 봐. 이게 캐츠 아이 스톤이야.”
지우가 그걸 찾자마자 자기한테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말에 임정은 괜히 감동을 받았다.
“아빠 잘 했지? 응? 진짜 잘 했지?”
지우는 임정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고 어서 네, 라고 대답을 하라는 듯이 재촉을 해댔다. 그럴 때는 입을 가진 사람이 대답을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임정이 ‘네.’라고 말해주자 지우는 흐뭇해하면서 방방 뛰었다. 그럴 때는 영락없는 스물 여섯 살짜리 애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줘야지. 아. 레이드하고 있으면 위험하려나? 기다려야겠네. 당신 아침은 먹었어?”
“아뇨. 차려줄까요?”
“아니. 오늘은 뭘 해도 다 잘 될 것 같으니까 내가 대단한 요리에 도전을 해 봐야겠어. 먹고 싶은 것 없어?”
지우는 흥분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임정이 그런 지우에게 갑자기 다가가 지우에게 안겨들었다.
“…왜?”
지우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임정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웃는 거. 너무 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오랫동안 웃지 않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됐었어요. 우리는 엉망이던 그 순간에도 서로를 보면서 자주 웃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너무 큰 근심에 짓눌린 것 같아서.”
지우는 한숨을 쉬면서 임정을 안아주었다.
“지금은 쫓기는 것처럼 달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행복하다고 느껴. 당신 때문에. 이젠 혼자 있어도 내가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나는 임정의 안지우라는 생각이 나를 붙잡아줘. 그리고 콩알의 아빠라는 생각이. 전처럼, 암흑 속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그런 느낌이 드는 때가 있었어요?”
“응. 자주. 하지만 지금은 안 그래. 당신이랑 콩알이 있으니까. 그리고 내 동료들도.”
“그리고 캐츠 아이 스톤도요?”
“응. 캐츠 아이 스톤도.”
임정이 웃는 것을 보고 지우도 한시름을 놓으며 웃었다.
“캐츠 아이 스톤이 뭐라고요?”
밖에서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현은 잘 벗겨지지 않는 부츠를 질질 끌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지우가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손을 내밀어서 잔소리는 금지한다는 동작을 만들었다.
“나도 밖에서 벗고 오려고 했는데 캐츠 아이 스톤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서요. 그걸 찾았다는 건 아니죠?”
강현이 물었다.
“어떤 거? 혹시 이걸 말하는 거야?”
지우의 말에 강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츠를 그대로 신고 달려온 태인의 강한 어택을 당하고 그대로 앞으로 나뒹굴었다. 태인은 사과도 하지 못하고 지우에게 달려왔다.
“캐츠 아이 스톤이라고? 정말 그걸 찾았다고?”
이익헌마저 그 소리를 듣고 굴러들어왔다. 캐츠 아이 스톤은 자기를 본 사람의 몸을 얼려버리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서게 되었다.
“정말……. 이런 게 있을 줄은…….”
이익헌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네 사람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캐츠 아이 스톤을 본 적 없어요? 그동안 미국 정부하고 협상을 한다고 떠들어댔잖아요. A급 헌터들한테도 알아보고 막 그랬던 거 아니예요?”
태인이 묻자 이익헌이 감격적인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개뿔. 다 허세지. 내가 무슨 재주로 그런 것까지 하겠어. 라미실이랑 해리랑 가끔 연락을 하는 건 맞지만 미국 정부랑 협상을 해 보겠다고 한 말은 뻥이었다고. 꿈은 꾸고 있었지. 클랜 A가 그런 수준이 되면 말은 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니까 완전히 뻥은 아닌 거지만 아직 상황이 그만큼 숙성하지 못했다고 할까.”
얘기를 들을수록 그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야. 나도 알아볼만큼 알아봤는데 캐츠 아이 스톤이 감히 일반 클랜이 값을 치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단 말이야. 라미실 얘기로는, 미국 정부에선 몇 천 조를 준다고 해도 안 팔 거라고 했어. 몇 천 조를 구하는 건 우리한테도 버거운 일이잖아.”
이익헌의 말을 듣고 네 사람의 충격은 더해졌다.
“몇 천 조라는 게……. 아니, 왜요?”
지우가 물었다.
“1급 늪을 공략하려면 A급 헌터가 꼭 필요하니까 그런 거겠지. 일단은 살고 봐야 하는 거잖아. 괴수가 나타나서 다 죽게 생겼는데 돈이 뭐가 필요하겠어? 그리고 새 1급 늪이 성장하기 시작했어. 그 늪에 들어가서 정보창을 확인하고 나온 라미실은, 자기는 절대로 그 늪에 들어가서 괴수를 공략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했고.”
“왜요?”
강현이 물었다.
“괴수의 체력이 2억 8천만이라고 했거든.”
이익헌은 말 한 마디로 모두에게서 할 말을 뺏어버리는 능력을 타고난 듯했다.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천 대리님을 먼저 불러야겠네요. 아니, 천 전무님요. 진짜로 잘 보관해야 하는 거잖아요, 이거. 이게 소문이 나면 갑자기 미국에서 사람들을 몰래 보내는 거 아닐까요? 우리를 전부 처리해 버리고 훔쳐오라고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캐츠 아이 스톤에 대해서 벌써 얘기한 건 아니죠? 그 라미실인가 하는 사람한테요.”
태인이 이익헌에게 말했다.
“흥분해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인데 나도 지금 여기에서 들은 거거든?”
이익헌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지우와 임정 할 것 없이 미리미리 입단속을 시키려고 여념이 없었다.
“그 사람들한테도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알죠? 비밀을 발설했다가는.”
태인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강현이 뒷 말을 이어주었다.
“파이널을 터뜨려버릴지도 몰라요.”
“……!”
“……!”
그래도 그건 아니지, 라는 생각들을 하면서 태인과 지우는 괜히 미안해져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익헌은 큰일날 뻔 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표정이 그래요?”
임정이 물었다.
“어? 아니. 아뇨. 그냥요. 그런 생각을 해 볼 수는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정말 많은 레이드를 하니까 또 캐츠 아이 스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면 캐츠 아이 스톤의 판로를 미리부터 개척해 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네?”
“네.”
이익헌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