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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익스트림 헌터의 기업 이념은 그런 게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꽤나 세상 물이 든 모양이네요.”
이익헌이 일갈을 하고 자리를 옮겼다. 선아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따귀를 맞은 것보다 더 치욕적이었다. 이익헌은 선아영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해 오고 있던 부분을 건든 거나 다름이 없었다. 선아영은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일을 시작한 거였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사업을 키울 필요를 느꼈고 그 와중에 이윤을 추구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지만 익스트림 헌터의 기업 이념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듣자 심한 충격이 밀려 왔다.
그 시간에 충격에 말을 잃은 사람은 비단 선아영만이 아니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다같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태인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준비했고 지우가 서빙을 도맡아 했다. 강현은 식탁 앞에서도 졸고 있었다. 새벽부터 강행군을 한 탓에 러프 스톤 몇 개를 내놓고 그때부터 계속 조는 중이었다.
지우는 브로큰 마운틴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중이었고 모두가 그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우는 감응기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나서 이익헌이 선아영에게 무기를 구하러 갔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모두가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왜 그랬는지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은 강지연의 눈에만 보였다. 강지연은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주 희한한 그림이었다.
그들은 익숙한 어떤 것들 사이에서 생경한 느낌이 나는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준 그것의 정체가 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침내, 서규태를 필두로, 그 후에는 천기정과 임정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지우와 태인이 동작을 멈춘 채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끝까지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강현 뿐이었다.
“맙…소사!”
서규태가 말했다.
“선대표 아버님도……!”
임정이 말하자 천기정이 그 말을 이었다.
“론 디어한테 당했던 거야! 젠장!”
지우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서 데리고 와야겠어요.”
서규태가 일어섰다. 서규태나 돼야 이익헌을 끌고 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도 대신 나서지 않았다.
“다시는 거기에 가지 못하게 해야 돼요.”
임정이 말했다. 김강현은 무슨 말들을 하는 건가 하다가 나중에야 혼자서 비명을 질렀다.
“선아영 대표 아버지를 죽인 게 론 디어라고요? 선아영 대표 아버지가 길에서 쓰러져서 죽었다고는 했는데. 맞나보네. 그건 전형적인 론 디어의 방법이잖아요.”
이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강지연뿐이었다.
서규태가 익스트림 헌터에 도착했을 때 이익헌은 벌겋게 달아오른 선아영에게 속사포로 뭔가를 떠들어대는 중이었다. 이익헌을 발견한 서규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를 연행하듯 다짜고짜 끌고 갔다. 이익헌은 당황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서규태를 따라갔다. 서규태는 익스트림 헌터의 주차장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익헌을 끌고 내려갔다.
“왜 그러십니까? 클랜 A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이익헌이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규태는 이익헌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 대표의 아버지. 부사장 짓 아닙니까? 그런 짓을 했으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그 딸을 만나고 있다는 겁니까?”
이익헌은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굴리다가 한참만에야 아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건 내가 아니예요. 저도 그 사건에 대해서 얘기를 듣기는 했어요. 그 일로 선 대표가 익스트림 헌터를 열게 됐다는 것도 알고요. 나는 뭔가 했네. 그건 내가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서규태가 꽤나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왜요? 써전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요? 내 평판은 이미 밑바닥인데 내가 뭘 바라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그건 나답지 않았어요. 선 대표 아버지를 죽인 건 아마츄어 짓이었다고요. 내가 슬쩍 훔치고 싶은 커리어가 아니라는 말이죠.”
“…….”
“내가 했던 일에, 슬슬 후회가 되기는 해요. 이러다가는 정말 내가 저지른 일과 관련된 사람과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요즘은, 잘해보고 싶은 관계라는 것들이 자꾸 생겨나는 것 같은데. 만약에 그런 일로 얽혀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규태는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이익헌은 마지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외국어 발음처럼 이상하고 어색하고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는 말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그런 사람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기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
서규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 대표하고 얘기는 다 끝났습니까? 아니면 인사를 하고 와야 합니까?”
“화염방사기는 주문을 해 놨으니까 이대로 가도 상관은 없겠죠.”
“혹시 위로해주고 싶으면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차도 각자 가져왔잖아요.”
“알았습니다. 태인씨가 실력 발휘를 해서 음식 준비를 해 놨으니까 바로 오면 식기 전에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이익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규태가 돌아가고 이익헌은 선아영을 찾아올라갔다.
위로라. 이거야말로 이익헌이 맞닥뜨린 지상 최대의 난관이었다.
선아영은 샐쭉한 얼굴로 이익헌을 기다렸다. 이익헌은 자기가 한 말 중에 표현이 너무 거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선아영은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사장님이 하신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시장에 경쟁자가 없다는 생각에 너무 안일하게 해 왔다는 생각도 들고 제가 초심을 잃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어쨌든 저한테도 이것 저것 많은 걸 깨닫게 해 주는 시간이었어요. 자주 찾아와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화염방사기는 찾아봤어요. 급하게 필요하시면 먼저 가져가세요. 원하는 공격 증폭률이 나올 수 있게 새로 주문도 해 놨고요. 어떻게 나올 거라고 확답은 못 드려요. 하지만 이번에는 같이 한계를 뛰어넘어보자고 강도높게 말을 해 놓기는 했어요.”
"진작에 그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요."
"네?"
“아, 아뇨. 고맙다고요. 하하하. 화염 방사기는 전부 해서 얼만가요? 대여하는 걸로 해서 계산해주세요. 자주 만날 개체는 아닌 것 같아서 구매보다는 대여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이익헌이 계산을 하려고 하자 선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클랜 A하고는 파트너십 관계라 이런 부분은 돈을 안 받아요.”
“그렇습니까? 현명한 결정을 한 것 같네요. 클랜 A와 파트너십 관계라. 다음에 그럼 다시 찾아뵙도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디 펌으로 들어오는 괴수 사체의 중요한 부위들에 대해서는 익스트림 헌터에 먼저 구매 의사를 묻고 다음 절차로 넘기는 걸로 하겠습니다. 지금은 개인 공간에 장식물로 채워놓는 것보다는 헌터들의 무기를 만드는데 괴수 사체가 우선적으로 사용돼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더 바랄 게 없죠. 정말 감사합니다.”
선아영의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익헌은 돌아가자마자 다른 일에 착수했다. 자기로 인해서 희생을 당했던 사람들의 유족에게 익명으로 거액의 위로금을 보내는 작업이었다. 자기가 뺏고 망친 것은 한 사람의 생명과 인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해서 삶의 의미를 깨우쳐가고 있었던 많은 사람의 인생까지 자기가 같이 망친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련의 작업을 마쳐놓고 정원으로 나가려는데 지우가 정원에 서 있다가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는지 건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화염방사기는 봤습니다. 레이드는 언제 나갈까요?”
지우가 물었다.
“내일 아침에 나가죠. 우리 둘로는 안 될 것 같죠? 까다로운 개체라서. 그리고 그런 괴수는 여러 사람이 같이 경험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아침에 다 같이 가는 걸로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는 걸로 하죠.”
이익헌의 말에 지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우두커니 멈추더니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클랜 A에 갑자기 마음을 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그게 내 오해일까요?”
지우가 말하자 이익헌이 지우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 같았다면 그런 얘기에 대답을 해 주지 않았을 테지만 그 날의 이익헌은 꽤나 감성적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이 자랐어요. 어머니는 무력했고요.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지켜주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없었죠. 어머니한테 오랫동안 화가 났었는데 자랄수록,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안지우씨가 아이를 위해서 힘을 내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그냥, 그게 전붑니다. 안지우씨도 아직 어린데. 남자 나이 스물 여섯에 아버지가 된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나는 상상도 안 되지만. 실패할 거라는 게 뻔히 보이는 것 같은 일에 의욕을 다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할까.”
이익헌이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잘못 보셨네요. 저는 절대로 이 일에 실패하지 않을 거거든요. 나를 아버지로 두고 이 가정에서 태어난 걸 자랑스럽고 행복하게 여기게 만들어 줄 겁니다. 반드시요."
지우는 그 말을 남기고 웃음을 짓더니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
클랜 A의 클랜원들은 늪 앞에 집결했다. 임정도 함께였고 강지연도 감응기로 늪의 상황을 체크했다.
지우는 헌터들에게 브로큰 마운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감응기에는 브로큰 마운틴이라고 불리는 거대 개미 괴수들의 차크라가 보였는데 그때도 그 녀석들은 산을 이루는 대신 바닥에 깔려 있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면 금세 서로의 위로 올라가서 산을 이룰 겁니다.”
지우의 설명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거미에 맞춰서 무기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검과 손도끼는 뒤로 밀렸고 넓은 면적으로 압착을 가할 수 있는 무기들이 선별되었다.
화염 방사기를 사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미지수였지만 헌터들은 지우가 화염방사기를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브로큰 마운틴을 순간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들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브로큰 마운틴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거대 개미 몇 마리를 잡아서 관찰하고나서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거대 개미가 어떤 식으로 공격할 수 있는지 미리 한 번 보자고요. 지금 같아서는 탱킹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거대 개미한테 의외의 공격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모두들 긴장 유지하고요.”
지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늪으로 들어갔을 때 모두가 위치로 돌아갔고 작전대로 거대 개미 몇 마리를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거대 개미는 일반 개미에 비해서 수 만 배의 크기에 달했지만 주둥이로 무는 것 말고는 다른 공격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거대 개미들에게 눈이 팔려있는 동안 다른 개미들이 발 밑으로 다가와서 헌터들을 물려고 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