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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95화 (9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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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김인아였다. 김인아의 옆에 있는 남자는 김인아와 바로 헤어질 것처럼 굴었던 남자였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봐. 내가 맞다고 했잖아. 어떡하냐? 여기에서 나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김인아가 재잘거려대는 것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지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지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김인아를 조심하라고 해 주었던 경고는 결국 소용이 없었던 듯했다.

지우는 정면을 바라본 채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결단을 하고 진실을 밝히면, 사건의 전모가 모두 까발려지고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은 망신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피해를 보상받거나 지위가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진실을 밝혀도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지우는 피식 웃었다. 그 남자에게는 진실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진실을 알았어도 그 남자는, 자기가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패배한 건지도 모르고 다른 여자를 만나봐야 그런 여자들도 김인아와 크게 다르지도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시킨 건지도 모른다.

현실에 순응하기로 그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지우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기라면 그런 식으로 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우 뿐만 아니라 클랜 A의 모든 클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옆에 여자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을 테니까, 라면서 이상한 여자와의 삐걱거리는 만남을 지속시키기보다는 영영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관계를 정리해 버리는 게 클랜 A 식이라고 지우는 생각했다.

정작 자신들이 어디로 걸어가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 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아, 나는 저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구나 라는 식으로.

김인아는 실컷, 원없이 떠들어댔다. 림스를 찾아가서 지우가 원래 여성 편력에 허언증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느니 뭐라느니. 김인아는 지우가 상대조차 해 주지 않자 열이 받았는지 지우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 그러다가 지우의 시선을 받았다. 자기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 순간에 그렇게 낯설어질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이질감이 감돌았다.

“떨어져. 가능하면 닥치고. 가능하지 않아도 닥쳐라. 시끄럽다.”

지우가 말했다.

“뭐?”

"반말하지 말고. 너란 인간을 알았던 순간이 수치스러우니까 너도 기억에서 나를 빼라. 웬만하면. 웬만하지 않더라도. 나를 멀리에서 보더라도 이제 나를 모른다고 생각해. 그게 너한테 좋을 거다."

지우가 말했다. 얼마나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는지 바로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김인아는 지우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몸과 어깨로 내려와 앉아 숨막히도록 짓누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우를 바라보면서 눈만 빠끔거렸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 밖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지우를 향해 다가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단체로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 했다. TV와 화보를 통해서 볼 땐 차갑고 도도하기만 하던 치안부장 임정이 해같은 웃음을 지은채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나왔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지우가 말했다.

“쉬는 시간.”

“뭘 했다고 벌써 쉬는 시간?”

“자기가 옆에 없으니까 힘들었어요.”

누군가가 열림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서 둘이 깨를 볶는 실황이 그대로 중계되었다.

“오빠…….”

김인아는 저도 모르게 지우를 불렀다.

“아는 사람이예요?”

임정이 지우에게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고싶다.”

그 말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임정이 김인아를 바라보았다. 김인아는 열림 버튼을 계속해서 꾹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여신같은 얼굴에 전사같은 몸에 카리스마까지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두루 갖춘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 시선앞에서 고스란히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다.

“다음부턴 우리 이 사람이랑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말아줄래요? 내가 부탁좀 할게요. 내가 이 정도로 말하면 꽤 공손하게 말한 거예요.”

임정은 김인아에게 말하고 지우와 함께 사라졌다.

화보 촬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임정이 배가 단단하게 뭉치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바람에 일찍 끝이 난 것이다. 다행히 초반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헌터 복장을 한 임정이 괴수의 목을 치고 멋지게 착지하는 모습이 익스트림 헌터의 건물 전면에 내걸리게 되었다. 지우가 지나가는 헌터들을 부러워하며 바라보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

강지연은 자기가 전학생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사람들은 낯설었고 몸에는 폭탄이 들어있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닌 건지도 모르고 하나는 연쇄 살인범이라고 하고.

강지연은 처음에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클랜 A의 클랜원들은 강지연의 등장에 엄청나게 흥분한 것 같았지만 알고보니 그들이 흥분한 것은 강지연 때문이 아니라 강지연의 감응기 때문이었다.

어느날은 이태인이 강지연의 연구실에 들어와서 강지연의 감응기를 스윽 만졌다. 강지연과 눈이 마주치자 이태인은, 그것으로써 몰래 훔쳐갔다는 질책은 면하게 됐다는 듯이 당당히 들고 나갔다.

아무도 강지연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강지연은 기껏 자기가 힘들게 만든 감응기가 사람들 손에서 고장이 날까봐 전전긍긍하며 보모마냥 감응기를 따라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응기를 잘못 다루는 것 같을 때마다 사용방법을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는 절차조차 건너뛴 채 어느덧 아주 허심탄회한 얘기까지 나누고 있었다.

어느 날은 강지연이 혼자 술을 마시고 김강현에게, ‘너, 숨겨진 여자로 살아본 적 없지.’ 라고 말하기도 했다. 강현은 그 말에, ‘저는 그냥 여자로 살아본 적도 없는데요?’ 라고 대꾸를 하고 감응기의 민감도를 높여보라고 재촉했다.

감응기는 수시로 사라졌다. 팀이 나뉘어서 레이드를 나가면 먼저 나간 팀이 감응기를 가지고 나갔기 때문에 뒤에 나가는 팀들은 잊지 않고 꼭 강지연에게 화를 냈다. 모든 걸 지원해주는데 감응기 하나를 더 만들어내는 게 뭐가 그렇게 더디냐고. 그래서 강지연은 노예로 잡혀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겨를도 없이 감응기를 만들고 있었다.

강지연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동물이었고 두 번째로 만든 감응기는 첫 번째 것보다 여러 가지로 성능이 좋았다. 이제는, 먼저 레이드를 하러 가는 팀이 두 번째로 만들어진 감응기를 가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강지연은 감응기로 안지우의 차크라를 테스트해보고 싶어했지만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은 것을 떠나서, 명시적으로 금지되었다. 서규태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였다. 안지우와 아기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을 하는 동안의 서규태는 정말로 살벌해보였다.

클랜원들은 안지우가 다른 헌터들과 확연히 다른 차크라를 가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전에도 알았지만 그 전에 알았던 게 가채점 결과 같은 거라면 이제는 확실히 공인된 성적표를 통해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임정의 아기가 붉은 차크라로 잡힌 것을 보고 클랜원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고 그 일은 뜻밖에도 이익헌에 의해서 돌파구가 모색되었다. 이익헌은 산모가 정기적인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우에게 알려주었고, 바깥에서 진료를 받을 수 없다면 정밀한 기계를 사서 클랜 A에서 임정과 아기를 보살펴야 할 거라고 말했다. 이익헌은 여간해서 남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린 지우가 힘든 임신을 책임지려고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익헌은 그 일에 강지연을 끌어들였다. 그는 자기들이 뭉쳐야 한다고 강지연을 설득했다. 자기가 왜 그래야 하느냐고 강지연이 시니컬하게 묻자, 우리는 똑같이 파이널 병을 앓고 있는 환우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뜻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환우라서, 힘을 합해서, 파이널을 우리 몸에 심은 사람들을 도와야한다고요?”

지연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뭘 그러셔. 그쪽이 잘못했잖아. 나도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다고.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저 괴물들한테 벌써 죽었을걸?”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익헌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서 안지우를 구했는지를 말해주었다. 강지연은 그가 임재욱을 죽였다는 사실을 너무 자랑스럽게 털어놓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지만 자기에게 이익헌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계획한 살인이 미수로 돌아간 건 내 살인이 빨랐기 때문이지.”

이익헌이 명쾌하게 결론을 말해주었다. 그 말이 옳다는 것은 강지연도 알았다.

“저 바보들은 아기를 구하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하게 하지, 그걸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모른다고.”

“지킬 수도 없는 건 애초에 만들지도 말았어야죠.”

“그래도 저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재미있다고. 신기한 사람들이거든. 어차피 사는 동안 존재 가치를 깨달을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힘 좀 내 봐.”

“뭐라고요?!”

그렇게 이익헌이 배후에서 강지연을 조종하고 설득한 결과, 클랜 A에는 산부인과 영업을 바로 시작해도 될 정도로 많이 장비가 줄줄이 들어왔고 강지연의 능숙한 조작으로 임정은 초음파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우와 임정은 처음으로 화면에 나타난 아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신대륙을 찾아 바다를 떠돌다가 마침내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처럼 감격스러운 모습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그런 황홀한 표정이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올랐다.

***

이익헌이 지우를 불러냈을 때 지우는 무슨 일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서규태로부터 미리 얘기를 들은 바이기도 했다. 이익헌은 1급 괴수의 공략을 서두르고 싶어했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1급 늪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들어가서 공략을 시도해보고 안 되면 나오면 그만이었기에 부담은 없었다. 그래도 이익헌은 자신들의 전력이 지금 어느 정도나 된 건지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익헌이 가장 관심을 둔 사람은 지우였다. 그는 지우가 어느 정도까지 해 낼 수 있을지 그 한계를 알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둘이서만 극한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지우의 실력을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둘이서 2급 늪을 공략한다는 것은 애초에 미친 짓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12시간을 꽉 채우는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 도전은 해 보자는 이익헌의 말에 지우는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살아남는 건 각자가 하는 걸로 합시다.”

천기정으로부터 캐츠 아이 스톤에 대해 들은 이후로 지우는 A급 헌터가 될 사람은 이익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익헌은 거기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웅노릇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나이는 지났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1급 괴수는 지금까지 우리가 사냥해 왔던 괴수들이랑 다를 겁니다. 그냥 그것들보다 괴수의 개체랑 맵만 사이즈 업 되는 걸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을 새로 개척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접근해야 할 거예요. 거기에 맞춰서 준비를 해야 될 거고요."

이익헌이 늪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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