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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그 조건이라는 게 뭡니까?”
“1급 괴수와 A급 헌터. 그건 서로 돌고 도는 거죠. A급 헌터에 대한 수요와 기대는 1급 괴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높아진 거죠.”
“하지만 A급 헌터들이 두 명이나 한꺼번에 투입되고도 1급 괴수를 해치우지 못했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1급 늪이 몇 개가 있죠.”
“그래도 아직 저는.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천기정이 말했다.
“클랜 A가 1급 괴수를 공략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1급 괴수를 처리해주고 미국 정부에 캐츠 아이 스톤을 요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얘깁니다. 적어도 매수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치고 적절한 선에서 협상을 할 수는 있겠죠.”
“클랜 A가……. 정말로 그럴 정도의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천기정이 물었다. 이익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은 당신에게도 있지 않냐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천기정은 그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냥 웃음이 지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크흐흐흐, 하는 소리까지 나와버렸다. 그 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심기를 자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우리 없이 부사장님이 혼자서 이 제국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동안 조용히 굴러간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모든 일들을 전부 부사장님이 이룬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익헌을 향해서 날선 공격들이 이어졌다.
“왜요? 바디 펌을 그만두면 여러분의 인맥을 동원해서 바디 펌을 고립시킬 계획이라도 세우고 계십니까? 하긴. 한 분 한 분이 다 그런 일을 벌일만한 역량은 충분히 되는 분들이죠. 바디 펌에 소송을 걸고 흔들어대면서 다른 사람을 내세워 경쟁업체를 세우고 거래처를 빼갈 생각도 해 보세요. 어쨌거나 여러분도 살아남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이익헌이 한가하게 말했다.
‘저런 미친!’
천기정은 하마터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적이 아직 하지도 않은 생각을 왜 자기가 먼저 알려주면서 공격을 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도대체 저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이를 갈았다. 바디 펌에 투자하라는 말이 혹시 함정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는 동안 지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바디 펌에서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나면 용하를 여기에 취직시켜 달라고 부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사심가득한 생각이었다.
***
시간은 부지런히도 지나갔고 모두가 바쁜 나날을 보내는 동안, 계속해서 미뤄두기만 했던 일의 기한이 드디어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임정의 익스트림 헌터 화보 촬영이었다.
선아영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임정은 안 그래도 선아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우가 아침에 이불 속에서 임정의 배를 더듬으면서 '이제 자기도 어엿한 임산부'라고 말을 한 것 때문에 임정은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배가 나왔나? 티도 안 나는데.'
임정은 제 손으로 배를 쓰다듬어 보면서 생각했다. 지우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는 게 불안하고 무서웠다. 배가 불러온다면 그런 기분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익스트림 헌터와의 계약 내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익스트림 헌터의 홍보물을 제작하려면 쌔끈한 몸으로 모델이 되어야 할 텐데 이대로 있다가는 그림이 영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았다.
임산부 헌터란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선아영도 그런 문제를 전화를 건 거였다.
“치안부장님이 모델로서 상품 가치가 있을 때 찍어야 우리로서도 손해가 덜 하니까요.”
선아영은 그렇게 말했다.
임정은 한 마디를 쏘아주려다가 지우의 아이를 가진 자신에게 선아영이 얼마나 패배감을 느끼고 있을지 이해를 하고 참아주기로 했다.
“말 나온 김에 당장하죠. 올 수 있죠?”
선아영이 말했다.
“무슨 스케쥴 관리를 그렇게 해요? 그럴 거였으면 몇 주 전에는 미리 얘길 했어야죠.”
임정은 어이가 없어서 따져물었다.
“계약을 했으면 언제든지 촬영에 임할 수 있게 관리를 하고 있었어야죠.”
선아영의 말에 임정은 재빨리 거울 속의 모습을 살폈다.
'뭐. 저 이기적인 몸매며 얼굴은, 방심하고 있을 때 조차도 빛을 발하는군.'
임정은 거울을 보고나서, 자기가 괜히 겁을 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요. 가죠. 지우씨를 만나서 같이 가야 하니까 시간은 좀 걸려요. 지우씨가 나를 혼자 다니게 놔두질 않아서요. 거기도 어차피 스탭들 동원해야 할 테니까 시간 걸리잖아요.”
선아영은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은 것처럼 혼자 격렬히 분노했다.
“늦지나 말고 와요!”
정작 지우는 기대를 갖게 한 적도 없었는데 혼자 김칫국을 몇 사발이나 들이키고 아직 열병에 시달리는 중인 듯했다.
임정이 지우에게 연락을 해서 상황을 알려주자 지우 역시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고 있을 때조차도 예쁘더라’라는 임정의 말에 빵 터져서 언제 화를 냈는지도 모른 채 웃어댔다.
선아영은 역시 타고난 사업가였다. 두 사람이 매장에 도착해보니 선아영은 임정이 익스트림 헌터에 뜬다는 사실을 적극적인 홍보 기회로 삼고 익스트림 헌터의 매장 여기저기에 플랭카드를 걸어 놓았다. 가만보니 그날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건 것이 아닌 듯했고 그 행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이 돼 있었던 것 같았다.
매장에 도착해서 먼저 상황을 파악한 지우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선 대표가 뭘 노렸는지 알겠다. 갑자기 연락을 받으면 자기가 못 나올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자기가 안 나오면 자기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몰아가려고 한 거겠지. 자기는 자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눈 뜨는 그 순간까지도 완벽하다는 걸 모른 거지.”
“어머. 어머.”
임정은 그런 소리를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떻게 하냐면서 지우의 팔을 두들겨댔다.
마침 선 대표가 그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잔뜩 일그린 채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선착순으로 백 명한테 싸인을 해 주는 행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죠?”
선아영이 말했다.
그 말에 지우는 당장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계약 내용에도 없던 것들을 하나 둘씩 밀어 넣으면서 요구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안돼요. 조금만 힘든 일을 하면 팔이랑 다리가 붓거든요. 예정에 없던 내용 자꾸 넣지 맙시다.”
지우가 제법 인상까지 써 가면서 말하자 선아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는 다들 서비스 차원으로 해 주는 거라. 그리고 임정 탱커님이, 아니, 치안부장님이 온다고 해서 새벽부터 사람들이 많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은 특별히 익스트림 헌터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기도 했고.”
선아영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알만도 했다. 미국에서 1급 괴수가 출몰하고 사람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한 사건 때문에 이제는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헌터 무기에 관심을 보였다. 익스트림 헌터는, 이전에는 헌터만을 소비자로 삼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익스트림 헌터의 입장이 어땠는지는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절차상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 주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 대표님이 아주 정중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겠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한테요.”
지우가 말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선아영은 어느새 저자세가 되어서 말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일을 진행시켜 놓으면 마지 못해 떠밀려서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강경하게 거절을 하고 나오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선 대표님.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걸로 알겠습니다. 이거 굉장히 실망인데요? 기본은 아는 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우가 말했다. 다행히 한 발 물러나 주는 줄 알았더니 싸인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내 싸인을 왜 당신이 해요?”
그 점에 대해서는 임정도 선뜻 수긍이 안 갔는지 그렇게 물었다.
“'헌터 임정의 남자, 안지우'라고 써주려고.”
“어머. 어머.”
임정이 안지우의 팔을 두들겨대는 걸 보고 선아영은 심호흡을 했다.
“알았어요. 싸인해 주기로 한 건 취소할게요.”
지우는 자랑스럽게 임정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선아영을 따라갔다.
촬영 장소에는 사진 작가와 스탭들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뒤에는 배경이 되어줄 장면이 인쇄되어 있었다. 촬영이 끝나면 그곳은 익스트림 헌터의 대표적인 포토 존으로 계속 개방이 될 거라고 선아영이 말했다.
왼쪽 귀퉁이에 익스트림 헌터라는 영문 표기가 새겨져 있었고 피를 뿌리며 목이 잘린 괴수의 모습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앞에서 치안부장님이 포즈를 취해주시면 됩니다. 의상 먼저 갈아입으시고요.”
사진 작가는 군더더기 없이 꼭 할 말만 했다.
임정은 평소에 입던 것과는 다른, 선아영이 준비해 놓은 갑옷을 입고 나왔다. 지우의 마음에도 퍽 드는 깔끔한 갑옷이었다. 부츠가 무릎을 덮을 정도로 길게 올라오고 어깨와 가슴이 견고하게 보호되었고 하의는 짧은 스커트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임정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검과 방패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머리는 그냥 그렇게?”
메이크업 담당과 스티일리스트, 사진 작가가 서로 의논을 하더니 따로 손을 대지 말고 현장감을 생생하게 살리는 걸로 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임정은 단발을 찰랑거리면서 방패와 검을 들었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콩알을 가진 후로는 거의 금지당한 일이었으니.
“지우씨. 차에 내 태블릿을 놓고 왔는데. 가져다 줄 수 있어요?”
깜빡하고 있었던 듯, 임정이 말했다.
“그래. 다른 건 필요한 거 없고?”
“네. 혹시 치안대에서 연락이 오면 그걸로 먼저 확인을 해야되는데 옆에 없으니까 불안해서요.”
“알았어. 금방 갔다올게. 조심하면서 찍어. 너무 과한 동작은 하지 말고. 감독님. 아, 작가님이신가요? 이 사람 임신 초기니까 무리한 동작은 요구하지 말고 살살 해 주세요.”
지우는 말을 해 놓고 쌩하니 나갔다. 바깥 매장은 사람들로 가득차서 이동을 하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헌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참변 이후로는 훨씬 더 관심이 지대해졌다.
외국인들의 모습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임정의 얼굴이 프린팅된 옷을 입고 있었다. 지우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여자랑 살고 있었던 건지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놀랐다.
서둘러서 주차장으로 내려가 임정의 태블릿을 가지고 돌아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게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할 수 없이 비상계단 쪽으로 향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지우 오빠 아냐?”
응, 안지우 오빠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으로 지우는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두 사람의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거봐, 내가 맞다고 했지?”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잊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잘만 잊히면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다릴 임정 때문에 지우는 마음이 급했고, 비상계단보다는 엘리베이터에 끼어 타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띵동.
그 옆의 엘리베이터 두 대가 거의 동시에 연달아 도착을 하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 많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물 빠지는 것처럼 줄어들었고 지우도 마지막으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편하게 탈 수가 있었다. 집념의 달음박질 소리는 계속 이어지다가 잔뜩 상기된 얼굴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