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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이건 예열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은데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라서. 임재욱 헌터가 저를 후원해주겠다고 말을 하기는 했었는데. 이제는 뭐. 사라져버렸다니까 거기에 뭔가를 바랄 수도 없게 됐네요.”
강지연은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는지 쓸데없는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봐. 늪 안에 있던 괴수가 나왔다가 사라졌다면 그 괴수는 어디로 간 거라고 생각하나.”
서규태가 말했다.
기왕 기다려야 하는 거라면 쓸모있는 말을 하자는 취지였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라졌다는 건 죽었다는 것 아닐까요? 혹시 그 사람을 만나보기는 하셨어요? 안지우씨요.”
강지연의 말에 임정과 서규태는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임정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나야. 어디야? 지금 일어났어. 미안해.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봐. 메모는 봤어. 어디야?”
전화를 받자 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나 혼자 잠들어서 화났어? 나 언제 잔 거지? 콩알이랑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만요. 내가 금방 다시 전화걸게요.”
“무슨 일 있어?”
“아니예요.”
“써전님이랑 같이 있는 거지?”
“네.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냥 하던 얘기가 있어서. 얘기 끝내고 바로 전화할게요.”
“응. 기다릴게.”
임정은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감응기의 끝에 파란 색 불이 들어왔다. 강지연은 버튼을 누르면서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제 화면을 보시면 차크라가 나타날 거예요. 두 분의 차크라가요.”
화면에는 두 개의 차크라 덩어리가 나타났다.
“제가 민감도를 조절해볼게요.”
강지연이 버튼을 조작했다. 화면에는 연한 주황색을 띤 두 개의 차크라 덩어리가 나타났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이 보였다. 강지연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임정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임정의 배를 본 거였다.
태아가 들어있을 부위의 색이 유난히 붉었다. 강지연은 제가 본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신, 중이신가요?”
“맞아.”
“…….”
“잘못된 게 있나?”
“아, 아뇨. 그냥. 예상 못한 일이라서요.”
화면을 보고 있자니, 헌터의 차크라라는 것이 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저건 왜 주황색으로 보이는 거지?"
서규태가 물었다.
"저건 임의로 제가 정해놓은 거예요. 이 감응기는 정보를 읽지만 그걸 표현할 방법은 내가 정해줘야 했거든요. 이런 특성들을 가진 차크라는 주황색으로 나타내자, 그렇게 우리끼리 약속을 한 거죠."
"감응기랑?"
"네."
정보를 모아서 그것을 시각화하고 패턴으로 나타내고 차이를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내는 강지연의 능력은 임정과 서규태에게 인상적으로 보였다. 비교할 기준이 생겼으니 이제 나중에 괴수의 차크라를 보기만 하면 될 듯했다.
"괴수의 차크라는 다르다고 했는데. 괴수의 차크라는 무슨 색으로 나타나지?"
임정이 물었다.
"그건. 나중에 보시면 알 거예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색이예요."
"그것도 사용자가 임의로 정해놓은 것 아닌가?"
서규태가 물었다. 강지연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이 감응기는 확실히 여러 모로 쓸모가 많을 것 같아요. 잘 개발하기만 하면요."
서규태의 말에 임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강지연만은 딴 생각에 잠긴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네요. 호기심이 너무 많은 게 문제긴 하지만.”
임정이 작은 목소리로 서규태에게 말했다. 강지연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을 해도 약속을 지킬지는 미지수예요.”
서규태가 말했다. 임정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두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주고 받았지만 귀를 크게 열고 있던 강지연은 그 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살려주세요. 저를 믿어주세요.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무슨 말을 안 해야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차크라 감응기로 알아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얘기 안 할게요. 안지우씨 늪과 관련된 얘기도 안 하고 임재욱 헌터에 대해서도 말 안 할게요.”
강지연이 떠들어대는 동안 서규태가 임정에게 다가가 임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여자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임정이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탱커님의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도 영향이 있을지 모릅니다.”
“……!”
“우리 중에 이 일에 대해서 이 여자만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사람 하나를 이미 클랜원으로 데리고 있죠.”
서규태의 말에 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널이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네요.”
“그거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연쇄살인범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폭탄이니까 이 여자도 함부로 날뛰지는 못하겠죠.”
임정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치안부장이예요. 제가 이런 짓을 계획하면 옆에서 말려주셔야 되지 않나요?”
그러자 서규태가 웃었다.
“이 여자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고 임재욱한테 네이팜탄을 준비해 줬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사람이요? 이 여자는. 지우씨를 죽이라고 임재욱을 꼬드긴 겁니다. 임재욱한테 이 여자가 놀아난 것 같으세요? 아뇨. 임재욱은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 여자는 임재욱한테 휘둘릴 여자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저렇게 천진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맹랑하잖아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강지연이 물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내 생각엔, 안지우씨 침실에서 사라진 거대한 차크라 덩어리는 안지우씨한테 들어갔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떤가.”
강지연은 우두커니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서로 부딪쳤다. 쉽게 한 가지의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의 어느 부분까지를 쏟아내야 하는 걸지 계산을 빠르게 하는 중이었다.
“둘 중 한 쪽이, 누가 됐든 강한 한쪽이 약한 다른 쪽을 죽였거나 흡수했겠죠.”
드디어 입을 열었을 때 강지연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안지우씨는 살아남았는데. 그럼 강한 쪽은 안지우씨겠군.”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늪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면 안지우씨가 죽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임재욱한테 네이팜탄을 준 거지?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이제 서로 솔직하게 말하자고.”
“그때는 희미하게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정도였죠.”
강지연이 말했다.
“그냥 다 털어놔 버리면 안 되겠어? 어차피 우리한테는 그쪽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서규태가 말하자 강지연은 가늠하는 눈으로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섣불리 믿었다가 또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었다.
“누가 죽는지 보면 늪을 떠난 괴수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겠죠. 죽는 게 괴수일 테니까요.”
강지연이 말했다.
"괴수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는 안지우씨를 안다. 안지우씨는 괴수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세요."
"그 늪은 다른 늪들이랑 다르다고 들었는데. 나도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경우라면 그 안에 있던 게 괴수라고 단정지을 수만도 없는 것 아닌가?"
"그 늪은 괴수 둥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의 서식지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보죠?"
“그 생각은 언제 들었지? 누가 죽는지 보면 괴수가 어디로 간 건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제가 뭐라고 말하는지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관심은 가는데?”
강지연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럴까? 괴수가 그 방에서 사라졌다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괴수? 이 남자가 말하는 것처럼 차크라 덩어리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 방에서 사라진 차크라 덩어리는 안지우라는 남자한테 흡수되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쪽은 안지우고 사라진 쪽이 차크라 덩어리였으니까. 그리고 이 여자의 몸에서 지금 그 차크라 덩어리가 자라나고 있다. 저건 괴수인 건가? 아니면 차크라를 가진……. 그러나 분명히 저 붉은 차크라는 괴수에게서 나타나는 차크란데. 다른 존재? 그 늪은 괴수의 둥지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서식지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강지연이 차마 말할 수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굴려가고 있는 동안 임정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강지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지연은 서규태를 바라보았다. 서규태의 날카로운 눈이 강지연을 옥죄는 듯 했다.
‘이 남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나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임재욱을 조종했던 건지도 모르고. 내가 몰랐던 내 진심을 왜 기분 나쁘게 이 남자가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부정하고 있던 내 본능을. 하지만. 정말로 그게 내 본 모습이었다는 건가? 그게 나라는 건가?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거기에서 내가 찾던 진실을 확인하려고 했던 게 정말 내 본모습이었다는 건가? 정말 내가 그런 것들을 바라고 임재욱을 조종했다는 건가?'
강지연은 창가로 다가갔다.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한 창문은 거울처럼 강지연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저 남자한테서 이런 얘기를 듣기 전까지 나는 내 진짜 모습과 마주할 필요가 없었는데. 효과적으로 내 자신까지 속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 남자는 뭐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강지연은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굉장한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강지연이 물었다.
“우리가 연구를 지원해주지. 어린애 장난감 같은 감응기 대신, 제대로 된 걸 만들 수 있게 해 주고 필요한 인력을 제공해 줄 수도 있어. 괴수하고의 진짜 싸움이 시작되면 우리한테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으니까.”
서규태가 말했다. 그의 눈빛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왜 태도가 바뀐 건지 강지연은 알 수가 없었다. 살려달라고 할 때는 오히려 관심없는 것처럼 굴더니.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이라면 좋겠는데 우리 사이에서 믿음을 기대하는 건 어렵겠지. 그쪽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몇 가지 장치를 해 둘 거다.”
“그래서 내 몸에 폭탄이라도 심으려고요?”
“너무 그렇게 겁 먹지 마. 부작용은 없는 것 같으니까. 파이널이라는 간단한 플라스틱 폭탄이야. 무게는 별로 나가지 않을 테니까 그것 때문에 몸무게가 늘어날 거라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거고. 당신이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언제라도 그게 터질 수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돼. 파이널이 다른 폭탄보다 특별한 건, 그게 터질 때는 혈액 한 방울도 원래의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면서도 외부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청난 폭발이 당신 몸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거지. 찻잔 속의 태풍보다는 조금 스케일이 크겠군.”
소름끼치는 협박인데도 강지연은 무감각하게 얘기를 들었다.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군.”
서규태가 말했다.
“나보다 더 놀라야 할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으니까요.”
강지연이 말하자 서규태와 임정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구? 나? 내 얘기를 하는 거야?”
임정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강지연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