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2 / 0331 ----------------------------------------------
4부. 1급 괴수
괴수는 여전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헌터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느린 동작이 위력적이었다. 괴수의 속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헌터들의 속도가 변해있었다. 이제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라미실과 해리는 절망적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살려주십시오. 손 좀 잡아주세요. 발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이것 좀 어떻게 좀, 하, 씨입, 걸을 수가 없어요!”
헌터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바로 그때 두꺼비 모양의 괴수가 소리를 지르던 딜러의 몸통을 향해 긴 혀를 내둘렀다. 소리를 지르던 딜러의 허리 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닥에 붙은 하체에서 피가 솟아 오르는 것을 보면서 남아있던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살려줘요. 여기에서 이렇게 죽을 순 없다고!”
헌터들이 저마다 바닥에 붙박혀버린 채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연이은 괴수의 공격에 사람들의 절규는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갔다.
“라미실, 나가자. 나가야 돼!”
해리는 두꺼비 괴수의 액체가 바닥으로 더 번지는 것을 보면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저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없어. 여기에서 꾸물거리다간 우리까지 당해.”
해리는 그렇게 말을 해 놓고 먼저 늪을 빠져나갔다. 라미실도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허망한 패배라니.’
어떤 표정도 지어지지 않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늪을 빠져나갔고, 공략의 성공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중에는 늪에서 죽은 B급 헌터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직 헌터들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저희는 레이드를 하러 간 헌터들의 가족인데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왜, 두 분만 나오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은요? 레이드는 끝난 건가요? 괴수는 죽었어요?”
질문은 함성처럼 이어졌고 라미실은 차를 향해 가는 해리를 뒤따라 달렸다.
완벽한 실패였다. 하지만 거기에 대응할 방법을 찾기만 한다면 다시 늪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들이야 딱하게 됐지만 모든 처음은 다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라미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늪의 오픈일이 언제지?”
차 문을 열면서 해리가 물었다.
“저 늪도 3미터가 됐을 때 오픈된다고 가정하면 일주일 후야. 그때는 괴수가 저 안에서 튀어나올 거야. 저 커다란 놈이. 발에 밟히기만 해도 죽을 거야.”
라미실은 고개를 저었다. 고층 건물만한 괴수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짓밟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 전에 끝내기는 해야 되는 거군.”
해리가 말했다.
라미실은 덜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잡은 채 차에 탔다. 라미실이 타자마자 차가 출발했고 B급 헌터들의 가족 몇 사람이 차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내 저만치 뒤로 사라져버렸다.
“내 경력에서 오늘을 잘라버릴 수 있으면 좋겠어.”
해리의 말에 라미실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틀의 공백을 두고 다시 파티가 꾸려졌다.
바닥에 접착성 높은 물질을 흘려 헌터들의 발을 묶는 괴수의 특성을 파악한 해리와 라미실은,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아냈다. 원거리 딜러를 배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1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공략을 해야한다는 문제 때문에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차크라를 모으는데 시간이 더 소요되는 원딜을 두면 시간 안에 공략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헌터 협회에 소속돼 있던 연구원들이 총동원되어 연구에 몰두한 결과, 바닥에 뿌려지는 물질의 접착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물질을 찾아냈다.
라미실과 해리는 이번에야말로 괴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열의로 넘치는 여덟 명의 B급 헌터들과 함께 다시 늪을 찾았다. 라미실의 주도 하에 헌터들은 리드를 열고 늪에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접착 효과를 저해하는 액체를 부어 바닥을 적셨다. 괴수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는 듯 느긋하게 늪 밖으로 기어나왔다.
두 번째 본다고 해서 혐오감이 덜 해지지는 않았다. 괴수는 두 눈을 느리게 꿈벅거리면서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한 번의 패배를 경험한 라미실과 해리는 딜러들을 독려했다.
“저 괴수가 쓰는 공격 방법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제를 이미 해결했고요. 겁 내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들 최선을 다 해 주십시오. 국가의 존망이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라미실이 말을 하고 괴수를 향해 나아갔다.
“라미실. 괴수가 전이랑 다른 것 같지 않아?”
해리가 말했을 때 라미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를 게 뭐란 말이야. 똑같은 두꺼비 형체의 괴수고…….’
그러다가 라미실은 두꺼비 형상의 괴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늪 아래에서 지저분한 점액질 액체를 뒤집어 쓰고 나온 녀석이 어딘지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괴수의 몸에 동그란 것들이 무수히 박혀 들어가 있어 몸이 울퉁불퉁하게 보였는데 그것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늪 안에 살고 있는 게 한 놈이 아니었던 건가봐!”
해리가 말했지만 라미실은 그 말에 동조하기가 어려웠다.
“늪 안에 살고 있는 괴수는 한 마리야. 그동안 쭉 그래왔잖아!”
“그동안 쭉 그래왔다고 그게 영원한 진리라는 건 아니야.”
“그래도 상관없어. 비슷한 녀석이니까 같은 방법으로 죽여주면 돼.”
라미실은 사람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차크라를 안배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초반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하는 겁니다. 도중에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비하라고요.”
중간에 변수가 생길 수 있어서 거기에 대비를 해야 한다면 괴수에게 더 많은 딜을 퍼붓는 것보다 만약을 위해 차크라를 남겨놓는 게 옳은 일이었지만 라미실의 생각은 달랐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는 일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괴수를 죽여야 했다. 사람들이 지금껏 A급 헌터들을 존경하고 대우해 왔던 것은 A급 헌터가 1급 괴수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제 첫 시험대에 올랐는데 그것을 망칠 수는 없었다.
탱커의 도발을 신호로 딜러들은 제각기 괴수를 공격할 수 있는 자리에서 괴수에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공중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바닥으로 날아들자 모두들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아무리 방어증폭률을 높였다고는 하지만 딜러의 방어력으로 괴수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다면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공중에서 쏟아져내리는 것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알이었다. 두꺼비 괴수의 몸체를 덮고 있던 알들이 무작위로 튀어나갔고 그것은 물방울처럼 바닥에서 터지면서 번졌다. 알이 터진 곳은 순식간에 2, 3미터나 푹 가라앉았고 그로 인해서 맵의 지형이 변했다. 헌터들은 괴수에게 제대로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괴수로부터 날아오는 알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격을 해요.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해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자기도 괴수를 향해 달려가기는 했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알과, 울퉁불퉁한 바닥을 신경 쓰느라고 속도를 내지 못했다. 창과 검을 든 딜러들은 어떻게든 괴수에게 공격을 해 보려고 했지만 이건 유황불이 떨어지는 성벽 아래에서 공략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처참하고 헛된 일이었다.
괴수가 커다란 몸을 틀었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 폭탄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던 것에 다시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그렇게 바닥이 끈적해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해리는 절망적인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알 폭탄이 떨어진 곳에는 폭이 3미터 가량되는 웅덩이가 생겨났는데 그 곳으로, 그들이 처음에 퍼부었던 물질들이 흘러들어가 얌전히 고여있는 게 보였다. 불길했다. 그게 거기로 들어가 고여있다는 것은, 두꺼비 괴수가 다시 접착 물질로 공격을 해 올 때 거기에 대비할 수 없다는 말이 되었다.
“라미실, 발 아래를 조심해!”
해리가 소리쳤을 때 라미실은 이미 희망을 버렸다. 그는 해리를 한 번 바라본 채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그가 하는 말 뜻을 해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라미실은 늪을 떠났다.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해리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곧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았다. 해리는 발이 붙어 꼼짝하지 못하는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끝까지 가 봐야만 이길지 질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었다. 헌터들이 지도록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해리는 참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헌터들은 달아나려고 몸을 비틀어댔지만 다리는 바닥에 들러붙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공중에서 알 폭탄이 집중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두꺼비의 몸에 박혀있던 동그란 것이 떨어져 터지는 동안 헌터들의 입에서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해리가 늪을 빠져나갔을 때 라미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해리도 재빠르게 그곳에서 몸을 감추었다.
A급 헌터라고 목숨이 두 개, 세 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늪에서 빠져나올 타이밍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다면 그들도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해리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했다. 귓가에 헌터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곳을 떠나버렸다.
좋은 소식을 남들보다 빨리 전하려고 기다리며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언론은 자국이 보유한 A급 헌터의 레이드 성공 소식을 전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생각 같아서는 늪의 근처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변한 A급 헌터 라미실과 해리가 강경하게 반대를 하는 바람에 거기에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거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임시로 기자회견장을 만들어 놓았다.
1급 늪을 공략한 열 명의 영웅들이라는 플랭카드도 미리 걸어서 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열 명의 헌터들이 늪에 입장한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 날 있었던 레이드에서 여덟 명의 B급 헌터가 죽고 두 명의 A급 헌터는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려졌다.
늪이 공략됐는지 알아야 했던 사람들은 헌터들이 늪에 입장한 이후, 12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갔다. 만에 하나, 아직 공략중인 늪에 들어갔다가 괴수의 체력을 리셋시키는 참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늪 아래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숙련된 헌터들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허리 위에 몸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들은 잔인한 성정을 가진 어린 아이의 장난감처럼 몸의 일부를 잃은 채 바닥에 딱 붙은 채로 서 있었다.
A급 헌터들의 모습은 늪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괴수가 흙탕물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수색을 위해 들어갔던 헌터들은 재빨리 철수했다.
영웅을 만드는 것은 불안에 떠는 약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쉽게 영웅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영웅이 아무리 추하게 망가져도, 차마 그들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웅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모든 희망의 거품이 터져버릴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장과 동료들을 방치하고 사라져버린 A급 헌터들에 대한 평가를 보류했다. 아직은 그들을 적으로 돌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