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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지우는 천기정이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그 소리에 잠이 깼는지 천기정이 움찔하면서 일어났다.
“아, 깜짝야! 뭐예요?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천기정은 지우를 보자마자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천기정의 테이블 앞에는 각종 인쇄물이 수북했다. 안 잔 척 하면서 고개를 들었지만 볼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풀만큼이나 접착력이 좋은 침은 턱까지 흐르고 있었고 천기정은 재빨리 침을 닦다가 종이가 붙은 걸 깨닫고 종이를 떼냈다.
체면이 영 말씀이 아니었다.
“공부하시는 중이었어요?”
“이거요? 갑자기 안 하던 일을 맡았는데 잘 해야죠. 그런데 엄청 어렵네요.”
천기정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산관리를 해 달라고 부탁드린 건 돈을 크게 불려달라는 의미가 아니었을 테니까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빵꾸나면 제가 레이드해서 메워 드릴게요.”
“그럴래요? 좋은 생각이네요.”
지우는 얘기를 어떻게 꺼내는 게 좋을까 하다가 천기정을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천기정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익헌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 말을 못 꺼내는 지우를 대신해서 천기정이 물어 주었다.
“치안대 특별 수감실에요. 익스트림 헌터에서 지원해준 구속 장비로 완전히 묶여있고 감시 장치도 살벌하게 있어서 문까지 다다르기 전에 이미 경보가 울리게 돼 있어요. 모니터로 볼 수도 있고요.”
“도망가진 못하겠네요. 하긴. 나나 됐으니까 속수무책으로 당한 거지, 헌터들 여러명을 동시에 상대하지는 못하는 것 아니예요? 아무리 이익헌이라고 해도.”
“네. 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헌터 여러 사람을 동시에 쓰러뜨리지는 못할 거예요. 방심하는 건 안 되겠지만 지금 상태라면 안심은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할 말이 뭐예요?”
“천 대리님한테 먼저 말씀을 드리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어요.”
지우가 말했다.
그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천기정으로서는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그럴 이유가 있었겠죠. 그래도 지우씨가 먼저 말을 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요. 그냥 살려주기로 한 것도 아니고 클랜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라면서요. 그러면 서로가 자기 생명을 맡겨야 되는 걸 텐데. 나는 잘 모르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익헌 부사장이 뭘 할 수 있는지 알게 된 후에는,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생겨날지 알게 된 이후에는 다른 결정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천기정은 재촉하지 않고 지우의 말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아이를 가졌대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지우가 말했다.
“네에? 탱커님 말입니까?”
“네.”
“그런데 왜 그 얘기를 이제야. 두 사람 다 건강한 거죠? 병원에는 가 봤대요? 언제 알았대요? 축하해요. 안지우씨. 정말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제가 먼저 애 아빠가 돼서 괜히 죄송하네요.”
“먼저 애 아빠가 되는 것만 죄송합니까? 나는 아직 연애도 못하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익헌 얘기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요.”
“네. 그 결정을 내린 게 아이 때문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1급 늪이 곧 오픈 될 거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A급 헌터가 아니면 1급 괴수를 공략하는 건 어려울 거고요. 지금까지 1급 괴수를 공략하려고 시도를 해 왔지만 한 번도 공략에 성공한 적이 없잖아요. 그 사람은 아이를 걱정하고 불안해했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실감이 안 나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제가 뭘 해야할지 확실히 알 것 같아요.”
지우의 말에 천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A급이 되려면 캐츠 아이 스톤이 필요하대요. 그건 몇 급의 어떤 괴수한테서 나온다는 게 정해진 게 없대요. 그래서 이제 닥치는대로 레이드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어떤 놈이 캐츠 아이 스톤을 토해낼지 모르니까 일단 전부 다 공략을 해 보는 거죠. 그리고 A급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등급을 올려놔야 될 거예요. 1급 늪이 성장하는 건, 지금은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특이한 일이지만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고요. 그때를 위해서 대비할 생각이예요.”
“그래요. 잘 결정했어요. 혹시라도 내가 이익헌 그 인간이랑 잘 지내지 못할까봐 걱정하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번은 호되게 앙금을 풀어야 되겠지만. 뭐. 그 다음에는 뭐. 서로 만나지 않게 그냥 피해다니면 되겠죠.”
“네?”
“농담이예요. 그래도 내가 그 인간이랑 꼭 잘 지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네. 천 대리님이랑은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을 거예요.”
“잘 됐네요. 다행이예요. 바디 펌이라는 회사가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네요. 그런 정보를 이익헌이 다 알려준 거죠?”
"네."
"그 사이코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넘긴 건 아니고요?"
"그건 아닐 거예요. 이익헌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사람이예요. 지금까지 바디 펌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다 해 온 걸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이익헌한테서 얘기를 들은 후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알아봤어요. 캐츠 아이 스톤처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정보는 우리도 확인을 할 수 없었지만 다른 얘기들은 전부 사실이더라고요. 그리고 이익헌이 얘기를 털어 놓을 때의 상황이 거짓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어요."
“이익헌은 A급 헌터들과도 교류를 해 왔던 모양이예요.”
"네."
이익헌과 그들의 공통의 관심사가 뭐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천기정은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더이상은 이익헌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들일까요, 딸일까요? 탱커님을 닮았겠죠? 탱커님을 닮아야 되는데.”
천기정은 정말로 기대된다는 듯이 황홀한 웃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저를 닮아도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요?”
“않을 걸요?”
지우는 어려운 숙제를 끝냈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다.
“그럼 이제부터 정말 바빠지겠네요?”
천기정의 말에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감도 있었지만 기대하는 마음도 컸다. 어쨌거나 이익헌이 낀다면 레이드 시간이 단축되기도 할 거고, 평소에 론 디어의 자국을 보면서 동경해 왔던 헌터의 실력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이제는 임정이 홀몸이 아니니 경우에 따라서 이익헌이 탱킹을 해야 할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몰랐다.
탱커도 될 수 있고 딜러도 될 수 있으니 이익헌의 몸이야말로 편한 몸이었다. 생각난 김에 이익헌의 헌터 팔 콜렉션에 대해서 말해주었더니 천기정은 쉽게 믿지 못하면서 그게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런데 나야말로 이제부터 바짝 정신을 차려야되겠네요. 클랜 A가 본격적으로 레이드를 하면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할 텐데. 아, 이거 진짜 스트레스 받는 일이네.”
천기정은 일어난 김에 공부나 해야겠다면서 책을 폈고 지우는 파이팅을 외치며 그의 집을 나왔다.
***
자라나는 1급 늪에 대한 정보는 한동안 통제되었다.
그러나 정보가 통제되는 것과 상관없이 늪은 성실하게 성장했다.
미국에서는, 왜 하필 자기 나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1급 괴수를 공략하는 작전은 신중하게 세워졌다. 늪으로 들어가서 공격을 하려면 인원이 열 명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괴수가 밖으로 나온 후에는 공격인원에 제한이 없었다. 그것이 이점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단점도 존재했다. 일단 늪에서 나오게 되면 괴수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도 어렵고 괴수를 놓치게 되면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얼마나 일어날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1급 괴수의 처리를 앞두고 모인 A급 헌터는 두 사람이었다.
다른 한 사람인 프랑스인은 끝내 합류를 거부했다. 그것은 헌터의 의견이기도 했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그 레이드에 참여하지 말도록 헌터에게 사전에 강력하게 권고를 하기도 했다. 만일의 경우, 레이드 도중에 그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프랑스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레이드를 총책임져야 할 A급 헌터 라미실과 해리는 여덟 명의 딜러를 추려 늪이 오픈되기 전에 공략을 하기로 최종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낭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여덟 명의 딜러들은 모두 B급 헌터들이었고 차크라 등급과 차크라 숙련도는 상위급이었다. 각자가 공격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린 무기를 서 너개씩 준비해 놓고 있었고 몸에는 갑옷을 입은 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들어가기 전에 몇 번 더 작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열 명의 헌터는 드디어 1급 괴수를 공략하기 위해 늪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늪에 들어가서 마주한 괴수는 10층이 넘는 건물의 크기로, 녀석은 진흙 구덩이에서 머리를 내밀고 기어 나왔다. 늪 아래로 내려갔는데 거기에 다시 늪이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침착하게 하면 됩니다. 할 수 있어요.”
라미실이 딜러들을 격려했다.
늪 아래의 늪에서 기어나온 괴수는 두꺼비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탱커는 어그로를 끌면서 딜러들이 공격할 기회를 만들었다.
처음은 순조로웠다. 괴수는 엄청난 덩치 때문인지 속도가 느렸고, 움직일 때마다 헌터들에게 동작을 읽혔다. 너무 쉬워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딜러들은 막강한 공격력으로 괴수에게 데미지를 입히고 괴수의 체력을 성실하게 깎아나갔다.
레이드가 오래 걸릴 거라는 것을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기에 힘의 안배에도 신경을 썼다. 이대로 페이스를 유지하기만 하면 시간 안에 괴수를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모두에게 생겨났다.
괴수는 변변한 공격도 하지 못했다. 그저 헌터들을 향해 커다란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허공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헌터들은 가볍게 그 공격을 피했다.
헌터들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레이드가 시작되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괴수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며 이동할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다리가 무거워졌다.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옆을 돌아보았을 때는 동료들이 모두 그런 상태였다.
“해리, 바닥이 끈적거려. 이 자식 몸에서 나온 액체가 바닥에 고였나봐.”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좀 더 신중하게 대응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정도로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은 신경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들은 괴수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었고,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괴수의 체력을 깎아내고 있었다.
그 맵의 진정한 괴수는 두꺼비 모양을 한 괴수가 아니라 괴수가 쏟아놓은 액체라는 것을 헌터들은 깨닫지 못했다.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B급 딜러 한 사람이 괴수에게 공격을 하려고 차크라를 모았다. 그리고 힘을 실어 무기를 내려치려다가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앞으로 넘어졌다. 그는 곧 손을 떼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동료가 그를 도와주러 가려고 했지만 이미 바닥은 사망의 기운을 더해가고 있었다.
“모두 나가요. 모두 늪 밖으로 나가요!”
라미실이 소리쳤다.
“차크라를 아끼고 퇴각하세요!”
라미실과 해리는 차크라를 발에 모아 바닥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