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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클랜의 멤버
천기정은 주차할 자리를 알려 주었다. 사실, 새삼스럽게 알려줄 필요가 없기는 했다. 주위가 전부 공터였던 것이다.
임정은 천기정에게 공손하게 인사했고 천기정은 아버지같은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로 즐거워했다.
“우리 안지우씨한테 이렇게 좋은 사람이 생긴 걸 보니까 정말 좋네요. 안으로 들어가죠.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이것 저것 만들어 봤습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는데.”
“장사는 잘 되세요?”
지우가 물었다.
“돈 벌려고 하나요? 어차피 이건 덤으로 얻은 인생인데. 돈도 중요한 것 같지 않고.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다 둘러보면서 살려고요.”
천기정이 말했다.
“여기에 있으면 그런 것들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바람. 햇살. 비. 계절이 오는 소리. 계절이 가는 소리.”
천기정의 말을 들으면서 지우는 그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천기정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에서는, 죽음의 문턱을 밟고 저쪽으로 넘어갔다 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통찰력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2층도 카페예요?”
들어가면서 지우가 묻자 천기정이 고개를 저었다.
“2층은 집요. 2층에서 살아요. 1층에서 일하고.”
“적적하거나 무섭지 않으세요?”
“무서워요.”
천기정은 웃으면서 털어놔 버렸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사람들이 함부로 쏟아내는 말들이라.”
“아…….”
지우가 안타까운 듯이 탄성을 쏟자 천기정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카페는, 좋게 말하면 고즈넉한 분위기였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쓰러져가는 폐가를 연상시키는 분위기였다.
임정은 카페의 벽에 적힌 글들을 보았다. 천기정의 묵직한 글씨체로 이런 저런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인테리어를 하고 싶기는 했는데. 얘가 시한부 인생이예요. 이 건물. 그래서 투자를 하기가 겁이 나요. 건물을 허물겠다고 하면 그때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비워주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엄청 싸게 쓰고 있어요.”
천기정이 말했다.
“건물이 시한부 인생이라고요?”
임정이 물었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이 남의 땅에 건물을 지은 거라. 땅주인인 줄 알고 그 사람한테서 땅을 샀는데 알고 보니까 땅주인이 아니었더래요. 나는 그 말 듣고 왜 안지우씨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말 잘 믿고 퐁당퐁당 걸어들어갔다가 진흙탕을 뒤집어 쓴 모습이 꼭 안지우씨 같잖아요.”
천기정이 웃으며 말했다.
"등기부 등본 확인도 안 했대요?"
임정이 묻자 천기정이 고개를 저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같이 속였나봐요. 중개업자가 자기만 믿고 하라고 하는 걸 정말 믿었던 모양이죠."
천기정은 해맑게 웃는데 그 말을 듣는 지우는 갑자기 뒷골이 뻐근해졌다.
“이제는 그렇게 사기당하고 다니지 않아요, 대리님.”
세 사람은 서로 알고 지낸지 오래된 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임정은 천기정의 요리 솜씨에 감탄의 수준을 넘어 경악을 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요리를 할 수 있냐고 몇 번이나 말을 하면서 그릇들을 부지런히 비워내고, 심각하게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는 더 쪄도 돼.”
지우가 말을 하자 임정은 힘을 얻고 그릇을 더 열심히 비웠다.
한창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기에, 치안대의 출동 명령이 떨어졌을 때 임정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 택시를 타고 가야 될 것 같은데 택시 다니는 길까지 태워다 주고 차 좀 맡아줄래요?”
임정이 지우에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지우가 같이 일어섰다. 임정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전을 하지 못했다. 치안대에서 임정을 찾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운전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일이 생긴 듯했다.
“데려다 주고 올게요, 대리님.”
임정은 천기정과의 만남이 그렇게 빨리 끝난 걸 아쉬워했다. 천기정은 가져가서 먹으라고 임정에게 음식을 싸 주었고 임정은 전혀 사양할 생각을 하지 않고 냉큼 냉큼 받았다.
천기정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은인에게 음식으로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나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났을 때 그는 흐뭇한 기분으로 지우를 기다렸다. 지우가 돌아오면 가게 문은 아예 닫고 집에서 편하게 얘기를 나눌 작정이었다. 그래서 천기정은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오 분쯤이 지났을 때, 밖에서 차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리는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2층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왠지 주인을 여러 번 바꾼 것 같은 느낌이 나는 승용차가 카페 앞으로 다가와 멈췄다.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간판은 멀리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사람이 누굴지 궁금해졌다.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아직 더운 날이 이어지고 있는 계절이었는데도 남자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깃까지 세우고 있었다. 거기에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루돌프 발렌티노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스니커즈에 진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기묘한 불균형이 느껴졌다.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뭔가를 찾는 것처럼 시선을 움직였다. 천기정은 미처 피하지도 못한 채로 남자의 눈과 마주쳐 버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그 남자가 어디를 보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천기정은 그 남자가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천기정의 심장이 얼어붙어버렸다. 호흡이 제대로 되어 나오질 않았다. 천기정은 가까스로 문으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소파를 문 앞으로 밀어놓고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그 앞으로 전부 집결시켰다.
천기정은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속절없이 그것에 잠식당하는 중이었다. 천기정은 창문 가로 가서 서 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실에는 야구 방망이와 스턴건이 있었다. 천기정은 그것들을 들고 나왔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기정은 그 소리가 저절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오해일 거다. 손님이 잘못 알고 이층으로 올라온 걸 거다. 가겠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가겠지.’
천기정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 손잡이가 움직였다. 한계를 넘어선 힘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 천기정의 눈에 보였다. 잠겨있던 문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천기정의 입이 얼굴의 반을 차지할만큼 크게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헌터다! 차크라를 쓰고 있는 거야!’
천기정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손잡이가 있던 자리에 구멍이 생겼지만 그 구멍은 이내 다른 어떤 것으로 막아졌다. 거기에 나타난 게 사람의 눈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천기정은 비척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등에 벽이 닿았다. 끔찍했다. 공포라는 감정에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기정은 창틀을 손으로 더듬었다.
저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위험을 각오하고 뛰어내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한 가지 기대할 것이 있기는 했다. 문 손잡이는 뜯겨 나갔지만 문에는 아직 단단한 잠금쇠가 걸려 있었다.
밖에 있던 남자가 절제하지 않은 힘으로 문을 잡아 당겼다. 손잡이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기에 손잡이가 있던 구멍에 손을 넣어 문을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잠금쇠는 엿가락처럼 늘어나다가 툭, 끊겨버렸다. 그와 동시에 문이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문 앞에 쌓여있던 것들을 간단히 발로 차버렸다.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제법 육중한 것들이 커다란 거실의 중간을 넘어 거의 천기정이 있는 근처까지 밀려왔다.
남자는 이제 모자도, 선글라스도 끼고 있지 않았다. 문틈으로 천기정을 보기 위해 벗어버린 모양이었다.
천기정은 자기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 남자였다.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 일을 잊으려고 정신없이 도망치듯 달려왔는데, 천기정이 버텨낸 시간들이 전부 사라진 것처럼 천기정은 지금 그 남자와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천기정은 자기가 당할 일을 하나 하나 전부 다 세밀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천기정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경험해보지 않은 고통이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미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고 장기들이 쥐어짜지다가 으깨질 때는 정신이 까마득해진다. 천기정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어느 순간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스스로 끝내야 한다. 저 미친 놈이 나를 농락할 수 있는 건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만이야.’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천기정은 모든 고민을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 천기정의 손이 창틀에 얹어졌다. 그리고 막, 팔에 힘을 주고 반동으로 창틀에 뛰어오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천 대리님!”
지우의 목소리였다.
지우가 어느 새 문 앞에 서 있었다. 천기정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이거야말로 가장 나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지우가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는 절대로 저 남자를 상대할 수 없다고 천기정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요, 안지우씨!”
천기정은 제발 안지우가 자기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지우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지우는 집 안의 상황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한 번에 파악을 마쳤다. 지우는 천기정을 알았다. 천기정을 이렇게까지 패닉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일 것이다. 천기정을 공격하고 천기정을 죽음에 이를뻔 하게 했던 헌터.
지우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천기정은 지우에게 담이 돼 주었던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던 사람이었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었고, 지우에게서 많은 말을 듣지도 않은 채 그저 믿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천기정이 정신나간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우는 천기정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가 방금 죽으려고 했다는 것, 이 남자에게 다시 몸이 내맡겨지고 끔찍한 고통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거라는 것을 지우는 알게 됐다. 2층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지우는 절대로 눈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지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동안에도 천기정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일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지우를 향해 돌아섰다.
지우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헌터군.”
지우의 말에 남자는 웃음을 지었다.
“꽤나 운이 없군.”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사람들의 감정을 조종할 줄 알았다.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자기가 철저하게 믿어왔던 세계를 흔들어버리기만 하면 사람들은 요동치는 세계 위로 스스로 올라가 거기에서 불안에 떨고 공포에 잠식된다. 남자는 그런 순간을 즐겼다.
처참하게 인격이 무너져내리고 부정되는 순간. 인간은 그다지 존엄하지 않다. 생존의 위기에 닥치면 다른 무엇보다 추해지는 게 인간이다.
그것이 이익헌의 생각이었다.
이익헌은 갑자기 나타난 어린 녀석을 철저히 뭉개고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을 전부 다 처치하고 떠나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