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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58화 (58/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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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클랜의 멤버

누굴 믿고 보증을 했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죽어가는 나?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나를 믿고?’

하지만 화가 난 마음의 끝에는 지우를 향해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희한한 일이었다. 천기정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우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지나가고 보면 자기가 지우를 도와줬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지우를 보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지우는 자신의 인생이 엉망으로 꼬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천기정이 보기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로서는 쉽게 얻어낼 수 없는 호의를 지우는 아주 사사롭게 누렸다.

가끔은 그게 안 통해서 림스에서 부장에게 사기도 당하고, 사귀던 여자친구하고 헤어지기도 한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지우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고 천기정은 종종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잘못된 만남이야말로 지우에게 꼭 필요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퇴원을 하고 지우가 몇 번 그를 찾아왔다. 지우는 자기가 헌터가 됐다고 자랑을 하면서, 이제는 차크라를 모을 수도 있게 됐다고 자랑을 했다. 지우가 만들어낸 차크라를 보면서 천기정은 웃었다.

화산이 폭발한다는 걸 아는 것과, 눈 앞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느끼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지우가 눈 앞에서 차크라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지우가 헌터가 됐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는데 정말 헌터는 헌터인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수가 존재하는 세상, 헌터가 돌아다니는 세상은 더 이상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사롭게 차크라를 만들고 그것을 실어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사람들. 천기정은 그런 사람들이 두려웠다.

천기정을 공격한 헌터는 아직 잡히지 않고 있었다. 천기정은 그 사람이 헌터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보도에서는 그 사실을 일부러 부정하는 느낌이었다. 언론은 일반인과 헌터를 갈등 구도로 놓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덮으려는 수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건을 일으킨 헌터는 오히려 더 활개를 치는 것 같았다. 천기정이 병원에 있는 동안, 그리고 퇴원한 이후로도 묻지마 폭행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천기정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결국 숨을 거둔 것이다.

천기정이 TV를 없애버린 것은 열 두 번째 희생자가 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나온 후였다. 그 소식은 기껏해야 4초동안 보도가 되고 끝이 났다. 천기정은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다루어질 수 있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복잡해졌고 그 후에 TV를 없애버렸다.

이제는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래도 자기가 이 순간들을 전부 다 버텨내고 이겨낼 거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조금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 뿐이었다.

웬일인지 지난 밤에는 수면제를 먹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갑자기 이런 걸까 생각을 하다보니 사람들이 하던 얘기가 생각났다. 묻지마 폭행으로 죽은 사람이 열 여덟 명이라는 말을 누군가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열 여덟 명이 아니라 열 여섯 명일 거라고 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그걸 가지고 옥신각신했다. 그러더니 태블릿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열 여덟 명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열 여덟 명이라고 말한 사람은 기고만장해졌고 열 여섯 명이라고 말한 사람은,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열 여섯 명이라고 하는 줄 알았어.’라면서 꼬리를 내렸다.

사건의 본질은 열 여덟 명이 죽었는가, 열 여섯 명이 죽었는가 하는 게 아닐 텐데도 그들은 그 숫자를 장난삼아 읊어대고 있었다. 각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천기정은, 자기가 죽었다면 자기도 그 숫자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동안 심란해졌다.

그 생각이 영향을 미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새벽에 잠깐 잠짓을 했다.

두 시간쯤 잤을까.

전화 벨이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꿈속에서 천기정은, 자기를 공격했던 헌터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다른 골목의 끝에 벽이 있는데 그곳을 향해서 천기정은 달리고 있었다. 달린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걷는다고 하기에도 뭣한 속도였다. 발이 땅에 붙어버린 것 같아서 발 하나를 떼어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진땀을 흘리면서, 이게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화가 온 것이다. 고마운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받았더니 지우였다. 살아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천기정은 저절로 웃음이 지어져서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자기는 한껏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우가 찾아오기로 했다.

천기정은 기쁜 마음으로 지우를 기다렸다. 같이 온다는 사람은 아마도 지우의 새 여자친구인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카페에 나가 청소를 하고 개장 준비를 했다. 지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착할 시간을 미리 알아놨다가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카페를 열면서 천기정은 직원이나 아르바이트를 둘까 하다가 포기했다. 큰 일을 겪고 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내뱉는 말이 거친 무기가 돼서 돌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천기정은 깨달았다. 그래서 힘이 조금 더 들더라도 사람을 두지 않고 자기가 혼자서 꾸려나가는 중이었다. 피곤하다 싶으면 일찍 닫으면 되는 거고, 못 일어나겠다 싶으면 늦게 열면 되었다.

지우는 개업식때 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미안해하는 것 같더니 전화를 걸어서도 그 얘기를 했다.

'아직인가?'

천기정은 자기가 오분 동안 열 번도 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을 기다렸다.

***

차를 타고 오면서 지우는 자기도 슬슬 차를 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임정은 차를 바꾸고 싶다는 말을 했고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경험치와 팀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지우는 임정에게서 들었던 말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지, 정말 단 몇 번만의 레이드로 자기들의 등급이 올라갈 수 있는 게 확실한 거냐고 재차 확인을 했다.

임정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문제라고 단언을 했다. 그러자 지우가 존경하는 눈빛으로 임정을 바라보며 감탄을 했다.

"대단하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야. 나는 엄청나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1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 시간이 넘게 걸렸겠죠. 그리고 무기 말이예요."

"응."

"확실히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요. 우리는 늪을 미리보고 리드를 열고 들어가서 괴수를 먼저 보고 나올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 괴수한테 치명상을 내기에 적당한 공격 방법이 뭔지, 좋은 무기가 뭔지도 알아낼 수 있고요."

"좋은 방법이라는 게 뭔데? 계속 치안대에서 무기를 가져올 거라고?"

"아뇨. 그건 이제 안 돼요. 걸렸거든요. 헌터 협회장. 나쁜 늙은이!"

지우는 임정이 화를 내는 걸 보면서 웃었다.

"그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니잖아. 자기가 무기를 가져온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무기를 가지고 출동할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너무 쉽게 생각한 거였어."

"어쨌거나. 방법이 아주 없지도 않을 것 같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기를 종류별로 갖출 수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무기 하나 하나의 가격이 수 십 억씩을 하는데. 무리야."

"우리한테 괜찮은 스폰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게 누군데?"

"내 마음에 안 들어서 견제를 좀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누구 얘길 하는 거야?"

"'익스트림 헌터' 선아영 대표요."

"그 사장이 왜?"

"선아영씨는 우리 팀에 관심이 많은 게 확실한 것 같거든요. 레이드마다 무기를 대여하는 건 그쪽에도 크게 부담이 안 될 거고. 만약에 금전적인 보상 비슷한 걸 원하면 내가 익스트림 헌터 모델이 돼 줄 수도 있고."

"그거 좋은 생각인데? 익스트림 헌터에 자기 대형 사진이 걸리면 진짜 간지나겠네."

"전에도 한 번 제의가 들어오긴 했는데 안 내켜서 안 했거든요."

"해. 꼭. 하면 좋겠어. 익스트림 헌터는 나한테 진짜 특별하거든. 그 건물을 보면서 헌터가 되고 싶다고 꿈을 가졌었고. 자기가 거기 모델을 하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뭐. 어렵지도 않은 거니까.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해야겠네요. 내가 익스트림 헌터의 모델이 돼 주는 조건으로 우리 팀이 레이드할 때마다 우리가 원하는 무기를 빌려달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써 보다가 이건 구매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있으면 그건 사도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주변에 좋은 인력들이 많이 모여서 좋은 것 같아요. 써전님이 돌아오시고 각자가 등급을 올리고 레이드에 맞는 무기를 매번 익스트림 헌터에서 지원받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무적의 공대가 될 것 같아요."

임정이 말했다.

"믿기질 않아. 나한테 이런 동료들이 생기고 이런 일들이 생기는게. 나는 내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도 마찬가지예요."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그냥 가만히 서 있는데 강한 바람이 내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 전에는 그 반대였거든. 나는 어떻게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보려고 하는데 내 앞에서 강풍이 불어서 내 걸음을 막고 오히려 내 몸을 뒤로 날리는 것 같았어. 그런데 요즘에는 그 반대야."

"다행이네요. 나도 열심히 지우씨 등을 밀어줄게요."

"자기야말로 가장 큰 바람이지. 가장 강력하고 기분좋은 바람. 내가 가장 기분 좋게 기다리고 그리워하게 되는 바람."

임정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지우가 말했다.

그러다가 임정은 자기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지 않냐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지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숍이 있을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차는 험난한 길을 헤쳐나가는 중이었고 인근에는 건물이 없었다.

“이렇게 계속 간다고 갑자기 커피숍이 툭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임정의 말에 지우는 천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리님. 지금 저희 가는 중인데요.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요.”

-길을 잘못 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마 잘 오고 있는 게 맞을 겁니다.

“아, 저긴가 보네.”

임정이 손가락으로 희한한 성냥갑 같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허벌판에 분홍색 2층짜리 건물이 서 있었다. 인가라고 할만한 주택 건물들은 그 건물에서 2백여미터는 떨어진 곳에 밀집해 있었다. 그런 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분홍색 건물만큼 신기하지는 않았다.

그 괴짜같은 건물에는 커다란 LED 간판이 있었는데, ‘오늘은 영업하지 않습니다!’라는 글씨가 한 글자씩 왼쪽으로 천천히 밀려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이라면 멀리서부터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일 테니 그날 그날의 사정을 이렇게 미리 공지를 해 주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때문에 가게 쉬시나 보다.”

임정이 말했다.

천기정이 건물 밖으로 나와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우리 대리님이야.”

지우는 반가운 마음에 임정에게 말해 주었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잊을 수는 없었다. 천기정과 지우는 모르겠지만 천기정이 살아있는 것은 전부 임정의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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