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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클랜의 멤버
-오늘부터 출장이라서.
용하가 말했다.
“아, 그래? 그럼 너는 다음에 봐야 되겠구나.”
-왜? 무슨 일인데?
“어? 아니. 여자친구가 생기면 너한테 가장 먼저 소개해 주기로 했었잖아.”
-뭐? 이 미친 자식! 드디어 생긴 거야? 어디까지 갔어? 잤어? 잤네. 잤어. 너같이 소심한 놈이 여자친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면 잔 거지. 근데 어떡하냐? 나 오늘부터 출장인데.
“그 말은 방금 전에도 했잖아.”
-아휴, 나쁜 새끼. 너 내가 오늘부터 출장간다는 거 미리 알고 오늘로 날짜 맞춘 거 아냐?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놈처럼 보이냐?”
-너. 그 여자랑 헤어지는 건 상관 없는데 그래도 형한테 얼굴은 보여주고 헤어져라. 어? 진짜 궁금해. 혹시 헌터야? 그건 아니지? 헌터라고 다 헌터를 만나는 건 아니겠지?
“헌터야.”
-뭐? 진짜? 세상에. 나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
“치안대원이고.”
-미친! 너 지금 그냥 막 갖다 붙이는 거 아냐? 어차피 나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하고. 나중에 인사시켜 달라고 하면 그때 가서 헤어졌다고 말하려고 그러는 거지. 맞지?
“웃기고 있네. 조심해서 갔다 와. 너 돌아올 때까지 안 헤어질 거니까. 언제 오냐? 오는 날 보자. 너무 피곤하면 그 다음 날 봐도 되고.”
-정말? 정말 그래도 돼? 빨리 와야겠네. 그래도 5일은 있어야 돌아와.
“걱정하지 말고 갔다와. 몸 조심하고.”
-오케이. 고마워. 야, 인마. 전화 좀 자주 해. 내가 먼저 연락하기는 그렇잖아. 괜히 너한테 뭐 바라는 것처럼 느껴질까봐서 부담이 된다고. 그래서 네 소식이 궁금하고 너 보고 싶고 그래도 그냥 참는다고.
“알았어. 이제는 더 자주 연락할게.”
-고마워. 아무튼 정말 잘 됐다. 진짜 잘 됐어.
기쁜 소식을 듣고 같이 좋아해줄 수 있는 친구야말로 정말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면서 지우는 전화를 끊었다.
“안 된대요?”
임정이 물었다.
“응. 불은 좀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 벌써 위험한 냄새가 나.”
“그래요?”
“내가 할까?”
“아뇨. 재밌는데요?”
“요리를 재미로 하나?”
지우는 정말로 걱정이 돼서 말했다.
“빨리 전화나 해요.”
임정의 말에 지우는 천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기정은 특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 진짜! 대리님. 따뜻하게 좀 받아주세요. 전화를 받으실 땐.”
지우는 천기정의 일관성 있는 태도에 기가 질려 하소연을 했다.
-받아준 게 어딘데 그래요?
천기정이 말했다.
“네. 그런 것 같긴 하네요. 대리님. 오늘 찾아뵈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야 뭐. 시간 내는 건 별로 안 어렵죠. 다른 데로 출퇴근 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러면 가기 전에 연락드릴게요.”
-그런데 무슨 일이예요?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해서 천기정이 물었다.
“좋은 사람이 생겼는데 대리님한테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아아. 난 또.
천기정이 안심을 하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오늘 매상 왕창 올려드릴게요. 개업식 때도 못 가서 죄송했었는데.”
-그런 말은 할 필요도 없어요. 바쁜 게 좋은 거죠, 요즘같은 세상엔.
“가기 전에 전화드릴게요.”
-조심해서 와요. 안 그래도 요즘에 부쩍 생각이 많이 나고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좋은 사람한테 물어보고 나한테 알려줘요.
“그럴게요.”
전화를 끊는 것과 동시에 지우는 전화기를 침대에 던져놓고 홈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주자처럼 전력질주를 해서 전기레인지의 불을 껐다.
“아……. 실패네요.”
드디어 임정도 인정을 하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먹을 게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가장 먹고 싶어할만한 걸 나한테 주고, 그 다음에 나가서 아침을 먹는 걸로 하면 어때?”
임정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고 고집불통 아가씨의 입술을 제 입술로 막으면서 지우는 까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후라이 팬을 싱크대에 집어 넣고 물을 틀었다.
이로써 후라이 팬은 완전한 사망을 맞은 듯 했다.
***
여섯 개의 주요 도시에 있는 지사를 방문하고 임직원을 독려하고 현장 실무자들의 고충을 듣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익헌은 이런 일이 왜 필요한 건지 마음 속으로는 아직도 동의를 하지 못했지만 회사의 전통이라고 하니 묵묵히 그것을 따르는 중이었다. 괜히 제 의견을 냈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은 익헌이 진취적이지 못하고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려는 게으른 대장이라고들 말했지만 그거야말로 익헌이 듣고 싶었던 평가였다.
익헌은 뻐기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요란한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한다면서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드디어 풀려나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진저리가 났다.
“날파리같은 새끼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익헌은 넥타이를 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익헌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절대로 상상되지 않을 터였다. 문에서 욕실까지 가는 동안 그의 옷이 전부 벗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익헌은 헤어 스프레이를 뿌려 딱딱하게 굳어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렸다.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물을 틀었다.
거울 속에 그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서른 여덟이라고 하지만 이십대 중반의 녀석들과 붙어도 전혀 꿀리지 않을만큼 전투적으로 다져진 근육이 드러났다.
익헌은 결혼하지 않았다.
미혼이 아니라 비혼이다.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트집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헌의 쾌속 승진을 달가워하지 않던 사람들은 익헌이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익헌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호재가 되었다. 그들은 익헌의 결혼을 전제조건으로 걸었다.
익헌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꼭 나이들어 쭈글쭈글해진 시누이들 같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익헌은 그 후로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자고 느닷없이 서둘러 여자를 만들고 결혼을 한다는 거야말로 인생 최대의 코미디가 아니겠는가. 결과는 미리 정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익헌이 이겼고 그들이 졌다.
익헌이 부사장이 되고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그 사람들의 비위(非違) 사실을 들춰내서 회사를 떠나게 하는 거였다. 제 앞에 거치적거리는 인간들을 보면 익헌은 언제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익헌은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뺏고 각종 소송을 걸고, 스스로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괴롭혔다. 그 일을 지휘하는 사람이 익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접 발이 되어서 움직이는 감사팀과 법조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아는 익헌은, ‘회사를 위해서 애쓰신 분들이었는데. 조용히 좋게 좋게 넘어갈 방법은 없을까요?’ 라면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결단력 부족한 남자였다. 익헌은 지금까지 제 모습을 영리하게 숨겨오고 있었다.
익헌이 주목했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은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노숙을 하다가 각각 시설과 길에서 죽었다. 한 사람은 얼어죽었고 한 사람은 살해당했다.
거울을 바라보던 익헌의 눈가에 초승달같은 웃음이 만들어졌다. 어떤 것을 기억해냈기에 즐거워진 건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익헌은 말간 눈으로, 거울 속에 비친 몸에서 헌터 타투를 찾아냈다.
그는 어깨를 만졌다. 이물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익헌은 팔에 새겨진 헌터 타투에서 시선을 돌리고 제 몸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익헌이 나타나면 여자들은 성적인 긴장감을 느꼈다. 익헌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익헌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너무 잘생기고 호감가는 얼굴인 것이 귀찮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대충 평범하게만 생겼으면 그게 더 좋았을 텐데.'
거울을 볼 때마다 익헌은 그런 생각을 했다. 신은 그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고도 불평만 들었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에 물을 뿌려서 제 모습을 찾아내고 잠깐동안 서 있다가 익헌은 밖으로 나갔다. 가운을 걸쳐 입고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소파로 다가가면서 그는 TV를 켰다.
TV에서는 톤이 높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 짜증나. 왜 저런 걸 쓰지? 말투는 저게 뭐야?”
확 꺼 버리려고 하는데 그 순간 다음 소식이 전해졌다.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옮겨졌던 30대 직장인 남성이 병원에서 숨졌습니다.
익헌의 어깨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이로써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병원으로 옮겨진 후 사망한 사람은 모두 열 여덟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희생자들은 무참한 폭행을 당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지만 대부분 2, 3일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묻지마 폭행이 아니라 묻지마 살인이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생존한 사람은 인천에서 공격을 당한 30대 직장인 남성 천모씨가 유일합니다. 천씨를 치료한 의료진들은 천씨가 대단한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습니다.
“왜!”
익헌이 마시던 맥주캔이 TV를 향해 날아갔다. 내용물이 분수처럼 쏟아진 것은 상관도 하지 않고 익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 너는 안 죽는 거야!”
익헌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TV 화면을 쏘아보았다.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평정을 유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이루어질 때에 한해서 그럴 뿐이다.
변칙이라는 것이야말로 이익헌이 가장 싫어하고, 절대로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왜 저기에서 변칙이 생겨난 건지, 왜 저 남자는 죽지 않은 건지, 익헌은 알 수 없었다.
‘변칙이라니. 왜!’
익헌은 자리에 다시 앉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익헌은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왜!”
‘왜 저 남자는 죽지 않았다는 건가! 왜! 왜! 왜!’
어두운 창문에 비치는 저를 향해 익헌은 대답을 요구했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의 분노는, 현실에서 구체화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혼자 사그라드는 법이 없었다.
***
천기정은 TV를 보지 않는다. 그런 습관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라는 것을 천기정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TV를 보면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만 이전에 그는 거기에 그다지 이입을 하지 못했다. 그건 그 사람들한테 일어난 일이고 그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희생자가 되고 피해자가 된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조심하고 대비하면 그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희생자를 탓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고 보니, 세상을 바라보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한동안은 바깥에 제대로 나다니지도 못했다.
죽을 뻔 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거라는 것은 의료진들에게서 수도 없이 들었다. 천기정도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공격을 받고 쓰러지면서 눈을 감았을 때는, 자기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깨어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지우가 자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보증을 섰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한테 진 빚을 갚으려고 그런 거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왜 그러는지. 그 정도 세상을 겪었으면, 그 정도 세상에게 속아봤으면 이제는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우칠 때도 된 게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