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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클랜의 멤버
“어차피 사체 운반을 할 날은 별로 남지 않았어요.”
임정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쨌든 지금은 안 되고. 저녁에 봐줘요.”
“그래요, 그럼.”
나누는 말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임정은 엄청난 친밀감과 믿음을 느꼈다.
2025년 7월 29일 21시 37분
일이 끝나고 훈련을 하는 동안 지우의 몸이 불편해 보여서 더 이상 치료를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임정이 지우를 재촉했다. 임정은 지우를 따라 지우의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따로 꾸미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처음부터 헌터 협회에서 워낙 잘 준비해주기도 했고.”
임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우를 바라보았다.
“아픈 데가 어디예요?”
“내가 급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바위에 부딪친 것 같던데.”
“나는 별로 다치지도 않았어요.”
“나도 고쳐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임정은 지우의 상처를 보자고 말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편하게 자세를 잡아요.”
“차크라도 다 회복되지 않았잖아요.”
“차크라야 뭐. 기다리면 회복이 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지우는 조용히 침대로 올라갔다.
이게 엄살이라는 걸 임정이 알게 되면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임정은 침대에 따라 올라와서 지우의 곁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차크라를 실은 손으로 지우의 어깨를 눌렀다.
“아! 아프긴 아프네.”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간이 걸릴 거예요. 자도 돼요.”
임정이 말했지만 지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몇 분 후에는 이미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2025년 7월 30일 01시 03분.
태풍 소식이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태풍이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유리창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에 지우는 눈을 떴다. 그리고 깜짝 놀란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습기 아래에서 파란 빛이 뿌려지고 있어서, 불을 켜지 않아도 주위가 완전히 어둠에 가라앉지는 않았다.
지우는 어깨를 휘휘 둘러보았다. 처음에도 별로 아프지 않았던 터라 나은 건지 어쩐 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지우는 침대 옆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비어있는 베개가 옴폭 들어가 있었다. 지우는 베개를 쓰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임정이 거기에 누워있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우는 자기가 자느라고 임정을 놓친 건줄 알고 우당탕탕거리면서 일어섰다. 그때 옅은 불빛 속에서 임정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임정은 넓은 책꽂이 앞에 서 있었다.
“뭐해요. 거기에서? 불도 안 켜고.”
지우는 반가운 마음을 억지로 눌러 담으면서 말했다. 임정이 웃는 것이 보였다.
“불 켤까요?”
임정이 물었다.
“눈 부실 거예요.”
그러더니 불을 켰다.
임정은 지우의 몸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나은 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눈으로 꼼꼼하게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지우는 드로즈 하나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지만 임정의 전문가적인 관찰은 멈추지 않았다.
“아픈데는 없어요?”
임정이 물었다.
“네.”
지우는 임정과 거리를 둔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임정은 책장을 향해 몸을 돌리고, 정돈되어 있는 책들의 책등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공부 안 하나봐요. 괴수랑 맵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 결과는 부지런히 읽어두는 게 좋아요. 새로 발견되는 개체도 있지만 널리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는 숙지를 해야죠.”
임정이 말했다.
길지 않은 머리를 머리끈으로 묶어서, 귀 밑으로 짧은 머리카락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땀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지우가 임정에게 다가갔다. 임정은 지우가 뒤에서부터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우의 기척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지우는 임정의 팔을 손으로 잡은 채 그대로 임정을 안아왔다. 지우의 얼굴이 임정의 목에 닿았다. 지우는 임정의 체취를 깊이 빨아들이려는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임정이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임정을 뒤에서 안은 채 임정의 팔을 보고 있었다. 치유 능력을 가진 탱커는 자신이 가진 재생 능력을 다른 사람의 몸에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정의 팔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다.
지우는 임정의 팔을 잡아 임정을 돌려 세웠다. 얼굴과 목, 팔 할 것 없이 온통 상처 투성이였다. 자신의 재생 능력을 사용해서 그런 잔챙이 상처들을 치료하는 것은 임정에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우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태인을 구하려고 하다가 다쳤다는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상처를 아껴두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우가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지우의 가슴은 그저 찢어질뿐이었다.
“후우우우…….”
지우는 고집불통 여동생을 바라보는 것처럼 임정을 바라보았다.
“내가 해 줄 건 없을까요? 내 차크라는. 그 쪽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겠죠?”
“아쉽게도 그러겠죠?”
“맛사지라도 해 줄까요?”
지우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에 차크라를 모았다. 가진 거라곤 무한에 가까운 차크라밖에 없는데 이럴 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 속상했다.
지우의 손에서 특이한 차크라가 만들어졌다. 녹색과 붉은 색이 서로 힘을 겨루듯이 움직이는 것이 꼭 수박석 같았다. 임정은 설마설마 하는 눈으로 지우의 차크라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차크라가 깃든 손으로 임정의 상처 입은 팔을 어루만졌다.
‘…….’
간절히 바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런 색이 나와가지고 괜히 기대를 하게 만든 건지.”
지우의 말에 임정도 웃었다. 하지만 그건 지우가 모르고 한 말이었다. 상처를 낫게 한 건 아니었지만 기운이 차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우가 차크라를 실은 손으로 몸을 만져준 후부터, 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지우의 차크라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임정은 분명히 거기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좋은데요?”
임정이 말했다.
“정말이예요?”
지우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로요. 영양주사를 맞은 것처럼.”
“그러면 누워봐요.”
“다른 뜻은 없는 거죠?”
임정이 물었다.
“우선은 없어요.”
지우가 말했다.
피노키오 코처럼 드로즈 안에서 무언가가 길어지고 있었다. 침대에 엎드리기까지 엄청나게 어색해하기는 했지만 일단 엎드린 후에는 임정도 지우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편하게 붙은 티셔츠 위로 지우가 맛사지를 해 주었다. 핏 좋은 청바지 위로도 손이 옮겨갔다.
임정은 이제 됐다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냥 생각으로만 멈췄고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화로운 곳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는 것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지우의 손길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 같았다.
이런 차크라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었다. 내재된 차크라의 양이 많다보니 이런 것도 할 수 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차크라는 심신(心神)을 치유하는 것 같다고 임정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한테도 해 줄 거예요?”
임정이 물었다.
“이 맛사지요? 아뇨. 그런데 왜요?”
“맛사지로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서요.”
말을 해 놓고 임정의 얼굴이 하릴없이 붉어졌다.
“서규태 써전님은 곧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면 사체 운반 일하고는 작별이겠죠. 써전님이 돌아오시면 레이드를 해요. 써전님이 계시면 2급 늪도 공략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한 번의 레이드로 E급으로 올라갈 수가 있어요.”
임정은 제가 한 말에 대해 지우가 오래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고 재빨리 이 말, 저 말을 늘어 놓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내가 E급 헌터로서 자격이 되는 걸까요?”
다행히 지우는 임정의 말에 관심을 가졌다.
“충분하다고 봐요. 그렇게 한 다음에는 태인씨랑 강현씨도 등급을 올려주고 그렇게 계속 준비를 하자고요. 공격력이랑 방어력을 높여가면서 스스로를 강한 무기로 만드는 거예요.”
“그럼 내일부터라도 바로 사체 운반 일을 정리 해야겠군요.”
“아니, 아직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고요. 써전님이 돌아오신 후에도 몇 주 정도는 레이드를 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강현씨의 나이 때문에요. 특례 제정에 그만큼 시간이 걸릴 거니까 그 기간만큼만 기다리면 이제 사체 운반 일은 안녕인 거죠.”
“나는 그 일. 싫지 않았어요.”
“그런 것 같아요. 서규태 써전님 같은 분을 만나서 그렇게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면 절대로 그 일이 싫지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지우가 임정을 바라보았다.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나한테요?”
“네. 용하라고 내 친구녀석이랑, 우리 천기정 대리님요. 만나볼래요?”
“왜요?”
“소개해주고 싶어서요. 나한테 이렇게 멋있는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면 좋아해줄 사람들이거든요. 혹시 내가 너무 앞서 나갔나요?”
“아뇨. 아뇨. 고마워요. 기대도 되고. 언제요? 내일 만날까요?”
“내일 괜찮겠어요?”
“좋아요. 기대되네요.”
말을 해 놓고 임정은 뭘 입고 나가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지우는 은근슬쩍 떠 본 말에 반응이 나와서 신이 났다.
지우가 척추 마디마디를 따라서 차크라를 실은 손으로 꾹꾹 누르자 임정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죽였다. 지우는 손가락으로 셔츠를 슬쩍슬쩍 스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주 결연한 동작으로 셔츠를 말아 올렸다. 임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우는 임정이 거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청바지의 허리춤을 만지다가 임정의 앞으로 손을 돌려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임정의 목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치료 목적이예요. 아주 순수하게. 빨리 나아야 하잖아요.”
엎드린 자세에서, 몸에 꽉 붙은 바지가 벗겨지질 않아 애를 먹자 임정이 스스로 바지를 내리고 다리를 빼냈다.
“훨씬 낫네요.”
지우는 엎드린 임정의 허벅지를 타고 앉아 임정의 부드러운 속살을 꾹꾹 문지르고 눌러댔다.
지우는 눈을 감은 임정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누웠다. 임정이 고개를 들고 지우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대충 예상한 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임정은 지금 자신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겠다 생각만 많았지 막상 이런 순간이 닥치고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그냥 하얗기만 했다.
지우가 좋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언젠가는 둘 사이가 발전하기를 원했고, 언젠가는 키스 이상의 것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무언가를 한 번 넘어서기는 해야 할 텐데 지우와의 첫경험이 임정에게는 인생을 통틀어 첫경험이었다. 과도하게 빼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엄청난 스킬을 보유한 것처럼 과장하고 싶지도 않았다.
임정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처음의 어색한 이 순간이 지나가버리고 두 번째, 세 번째가 얼른 다가오면 좋겠다는 생각.
바지를 벗고 임정은 자기가 너무 쉽게 굴었나 하면서 고민 중이었다. 지우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지우의 얼굴을 보니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자신을 열망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임정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