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49화 (49/331)

0049 / 0331 ----------------------------------------------

2. 사체 운반 헌터

경험치는 아직 0이었다. 그러나 경험치가 0인 것을 보고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재욱은 공대장을 바라보았다. 공대장은 임재욱의 시선을 오래 견뎌내지 못했다. 왠지 진실을 전부 꿰뚫는 시선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임재욱은 공대장이 예상하지 않은 말을 했다.

“레이드를 하면서 부상당한 헌터는 없었습니까.”

“예? 예……. 다행히…….”

“애 쓰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충분히 쉬면서 차크라를 회복하도록 하시죠. 이 사체 운반팀은 적당한 처벌을 받을 겁니다.”

공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이더는 전부 입을 맞춰서 거짓말을 할 거고 레이더와 하급 헌터들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면 치안대는 레이더들의 말을 믿어줄 거라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건 분명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그는 불똥이 자기한테 떨어질 것을 걱정하면서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충동적으로 치안대를 불렀지만 정말로 치안대가 도착했을 때는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오면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레이더들이 떠나자 임재욱은 써전을 향해 말했다.

“치안대가 출동해서 사체 운반 일정이 지연되면 바디 펌이 사체 운반 헌터들에게 패널티를 내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안대에서 따로 처벌하지는 않을 테지만 다음부터는 기강이 바로 세워질 수 있게 신경을 더 쓸 수 있도록 하시오.”

지우는 멍해진 얼굴로 임재욱을 바라보았다. 치안대가 정의의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반면 임재욱은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지은 채 돌아섰다. 경험치 50을 추가로 채워야 하게 되었으니 안지우가 3년 안에 D급으로 올라가는 건 더 어렵게 됐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꾼 꿈은 그렇게 유쾌하게 끝나지 않았다. 임재욱과 다른 치안대원들이 지바겐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또다른 지바겐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말 그대로 미친 듯한 질주였다.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미친 게 틀림없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지바겐은 임재욱이 타고 온 지바겐 앞을 막으면서 섰다. 거기에서 임정이 내렸을 때 지우는 어쩔 수 없이 강현을 노려보았다.

“너!”

지우가 강현을 바라보며 꾸짖듯이 말했다.

“별 수 없잖아요. 왜 우리가 이런 병신 지랄에 장단을 맞춰야 되는데요?”

강현은 지우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꾸했다.

차 안에서는 임정이 완전히 굳은 얼굴로 내렸다. 임재욱은 임정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임정이 안지우를 믿는 쪽으로 돈을 걸었다는 거야 알았지만 설마 개인적으로 인연을 계속 이어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임정.”

“선배님.”

임정은 임재욱에게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다가왔다.

“혹시 너……. 무슨 사이인 거냐.”

“‘혹시?’ 하고 생각하시는 그런 사입니다. 지금부터는 입으로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중을 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이 사안은 치안대장님께 올라갈 겁니다. 심각하게 불편부당한 판단이 내려진 경우에는 치안대장님께 올릴 수 있잖아요?”

“뭘 알고 나온 거야!”

임재욱은 그렇게 쏘아놓고 지우를 향해 돌아섰다. 지우도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치안대장한테 올라갈 사안이라는데, 그러면 이렇게 숨죽이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제 입으로 선배님이 내린 그 엄청난 결정에 대해 코멘트하고 싶지 않습니다. 선배님을 존경한 적도 없고 선배님한테 뭔가를 기대한 적도 없지만. 이건 좀. 대단하네요. 어떤 의미로.”

임정은 그렇게 말하고 지우의 뒤에 서 있던 써전과 하급 헌터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바디 펌에 제가 소명하겠습니다. 여기에 계신 헌터분들에게 바디 펌으로부터 패널티가 주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치안대장님께는 제가 사실관계를 알려드릴 거고요. 그럼, 이 늪에는 운반할 사체가 없는 것 같으니까 다음 늪으로 이동하시죠. 그리고 두 분은 사실관계 파악에 필요하니까 잠깐 남아주세요.”

임정이 강현과 지우에게 말했다.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임정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떠났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임재욱이 말했다.

“후회 좀 하게 되면 어떤가요? 선배님도 후회할 걸 무서워하면서 행동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임정이 말했다.

“뭐? 진짜 후회하게 만들어줘?”

“왜요? 선배가 치안대장은 아닐 테고. 혹시 그런 거예요?”

임정이 말을 하며 웃었다.

싸늘하게, 라는 수식어만으로는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웃음이었다. 임정도 임재욱이 치안대장인 척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임재욱은 태어나서 그런 웃음을 본 적이 없었다. 임정이 단지 웃음을 지은 것 뿐인데 임재욱을 둘러싼 대기가 꽝꽝 얼어붙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선배보다는 괜찮은 치안대장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는데. 제 예상은 보통 잘 맞아요.”

임정의 말에 임재욱은 화를 내면서 자리를 떠버렸다.

다른 치안대원들은 임재욱처럼 서두르지는 않고 임정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렸다. 여러 말로 설명을 할 시간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안 되었지만, 자기들은 여기에 차출돼 나왔을 뿐 임재욱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불쌍한 눈빛과 휘어진 눈썹으로 임정에게 전달했다.

임정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치안대원들은 안심한 듯이 임재욱을 뒤따라갔다.

한바탕 엄청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지우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임정은 지바겐이 떠날 때까지 보고 있다가 마침내 두 사람을 향해서 돌아섰다.

“두 분 다 괜찮아요?”

임정이 물었다.

“누나. 완전 멋있었어요!”

강현이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임정이 제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저 사람은 너무 심했어요. 우리는 진짜 아무 것도 안 했다고요!”

강현이 분한 듯이 말하자 임정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웬만해선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저 사람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임정은 자기가 치안대 사람들과 내기를 한 것을 실토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지우와 강현은 전혀 현실감각을 찾지 못했다.

“지금 78억 5천 4백만원이라고 했어요?”

지우가 되물었다.

“누나. 제가 4백만원은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3년 동안 그 정도는 모으겠죠.”

강현은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되는대로 입에 주워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거예요? 나를 믿어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심심풀이? 혹시 경험치를 몰아주겠다고 나를 늪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던 거예요?”

지우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오해하는 건 안지우씨 마음이고 이 상황이 꽤나 오해할만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 안해요. 그러니까 미안하지도 않고요. 내가 안지우씨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다거나 안지우씨 인생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돈을 벌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나는 그냥, 그런 것들을 안지우씨하고 하고 싶었던 것 뿐이고. 만약에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할 수 없다면 나도 실망이네요. 더 이상 구차하게 사과하지는 않을 거예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아우우. 멋있어요, 누나! 지금껏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당당한 사과예요.”

강현이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과 아니라니까요?”

임정이 말하자 지우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허, 하고 자꾸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다.

“나도,”

지우가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요. 78억 5천 4백만원이라고 했어요? 지게 되면 반절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아휴, 진짜! 다음부터는 미리 싸인이라도 주고받고 하면서 합시다. 에? 반이면 얼마야? 아우우. 진짜 미치겠네!”

지우는 충격이 안 가시는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우리 돈이 나갈 일은 절대 안 생길 거니까 걱정 안해도 돼요. 정 안 되면 2급 늪만 다니면서 경험치 몰아주기를 해도 되고.”

임정이 한가롭게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페어 플레이가 아니잖아요.”

지우가 말했다.

“페어 플레이를 하자는 약속은 안 했거든요. 그리고 페어 플레이를 먼저 포기한 쪽은 저쪽 같은데요? 바디 펌을 종용해서 경험치 50을 강제로 뺏으려고 한 거랑 마찬가지잖아요.”

지우는 자기가 엄청난 음모에 휘말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훈련강도가 높아져도 이해해야 돼요. 그럼 나는 바빠서.”

임정은 충격에 빠진 두 사람만 남겨 둔 채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

첫 레이드를 했던 날 지우가 밥을 사준다고 했을 때, 임정이 다음 날 있을 일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다고 한 이유는 몇 주 후에 밝혀졌다.

사체 운반을 위해서 모임 장소에 미리 나가 기다리고 있는데 TV에 임정이 나왔다. 임정은 에너지 음료를 광고하고 있었는데 임정이 하는 말은 하나도 믿기질 않았다. 분명히 저 에너지 음료는 아무 효능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혼자 웃어버렸다.

당대의 가장 유능한 헌터가 CF를 석권하는 게 트렌드다보니 임정이 여러 개의 광고 촬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게, 그리고 그런 사람과 밤마다 통화를 하는 게 이제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었다는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날 임정이 말했던 '일'이라는 것이 광고 촬영이었던 모양이라고 지우는 뒤늦게 생각했다. 광고 촬영을 해야 해서 늦은 시간에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기다리는 동안 임정이 출연한 광고가 하나 더 나오고 있었다. 소주 광고였는데 터틀 네크의 민소매 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있는 임정의 모습을 보는 게 불편했다. 지우의 얼굴에서는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따져보면 노출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고, 임정이 천박한 표정을 짓거나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나빴다. 지우는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인 건지 한동안 고민을 했다. 키스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서로 천천히 알아가는 단곈데 ‘네가 그렇게 입고 나온 거 마음에 안 들어!’ 라고 말하면 임정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이 되었다.

지우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놓기를 수 십번을 하다가 마침내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일단 말은 해 놔야 할 것 같았다.

-출동중인데. 간단한 거면 통화할 수 있어요.

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한 건 아닌데 간단하게 말할 수는 있어요.”

-그래요? 그럼 간단하게 말해봐요.

임정은 아직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이제 몇 초 후에, 지우가 그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출동중이라고 하니 지금 말을 해서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는 그냥 다음에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우의 입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소주 광고 찍은 걸 봤는데. 내가 이런 기분 느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화가 나네요.”

-왜요?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하죠.”

-얘기해도 돼요. 괴수가 늪을 들고 도망가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내가 탱컨데 나보다 먼저 들어가겠다는 사람은 없을 거고요.

임정이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