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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35화 (3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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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체 운반 헌터

“맞아. 내가 원한다고 해도 돈 안 쓰면 애초에 나를 받아준다는 공대장도 없고.”

태인이 말했다.

“저는 나이가 안 되고요.”

강현이 뒤를 이었다.

“나는 다리 다친 약쟁이고 말이죠.”

써전까지 나서서 가락을 맞췄다.

지우는 두 손으로 비벼서 후다닥 눈물을 훔쳐버렸다. 임정만이 말이 없었다. 그 후로는, 다른 사람들도 전부 말이 없었다. 가망 없는 것을 얘기하고 괜히 희망고문을 한 격은 아닌가 해서 강현의 얼굴은 급속히 굳어졌다. 태인은 이도저도 아닌 제 처지가 딱했고 써전은 애제자를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이 팀은 회식 안 하나요?”

느닷없이 임정이 물었다.

“왜요? 한다고 하면 끼시게요? 저희 팀이 다른 건 몰라도 회식 하나는 정말 재미없게 해요.”

강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모두들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술들은 좀 하시나요?”

임정이 묻자 지우가 대표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오늘은 회식 한 번 하시죠. 같이 있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좋은데로 모실게요.”

임정이 말했다.

유능한 상급 헌터, 그것도 치안대원과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콜이었다.

***

회식 자리에서는 도무지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누군가 좀 길게 얘길 한다 싶으면 자기도 말을 하고 싶어서 초조해하는 모습들까지 보였다. 임정이 하나 끼었을 뿐인데 평소보다 훨씬 화기애애한 회식자리가 되었다.

태인은 아직 도끼에 확신이 없는지, 틈만 나면 임정에게 도끼 얘기를 했고, 써전은 단도를 쓰는 헌터에 대해서 얘길 했다. 강현은 지우와 어떻게 만났는지 그 얘기를 해 달라고 해서 지우를 긴장시켰다. 다행히 임정은 그때마다 센스좋게 넘겨주었다.

지우가 계속 말 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형도 무슨 얘기든 해 보라고 강현이 재촉하자 지우는 임정에게, 치안대에 있는 동안 재미있었던 일은 없었냐고 물었다.

"재미있는 일이라기 보다. 묻지마 폭행 사건이 또 벌어졌어요. 그 말부터 바꿔야 돼요. 이건 단순히 폭행이 아니거든요. 묻지마 살인이라고 해야 한다고요. 이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어요. 폭행을 당한 사람 중에 한 사람 빼고는 전부 다 죽었다는 건 알고 있죠?"

임정의 말에 모두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는 것보다 실상이 훨씬 더 중대하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죽었어요? 전부?"

태인이 물었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천기정이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천기정도 죽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범인은 차크라를 실어서 사람을 공격해요. 헌터인 거예요. 그래서 치안대에서 사건을 맡게 됐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기미가 안 보여요. 오히려 덮기에 급급하죠."

"왜요?"

임정의 말에 강현은 뜻밖이라는 듯이 물었다.

"간단한 거지. 레이더랑 사체 운반 하급 헌터가 싸우면 치안대가 어떻게 하는지 그걸 생각해보면 뻔한 거잖아. 누가 잘했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상관없이 레이더가 우선적으로 보호되잖아. 그 사람들은 레이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앞으로도 계속 레이드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태인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말로 그런 이유라고요?"

강현이 임정에게 묻자, 임정은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협회와 치안대에서는 슬슬 그런 말들이 나오고 있어요. 1급 늪이 지금은 침묵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입을 벌릴 거라고요.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거예요.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임정이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치안대에서 재미있었던 일을 얘기해 달라고 했더니 분위기를 다운시켜 놓기만 하네."

지우가 핀잔을 주고 임정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임정은 고개를 뒤로 탁 꺾으면서 시원하게 잔을 비우고 턱을 괸 채 지우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지우의 타투를 만졌다.

"이건 희한한 효과가 있네요. 둘 다 10이긴 해도 어쨌거나 같잖아요. 차크라 증폭률 적용도 같이 받을 거고. 둘이 나란히 있으니까 음, 기대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네요. 이 숫자들이 커지면 같이 커질 거라는 기대감. 그때가 되면 안지우씨는 막강한 딜탱이 되겠죠?"

"어느 세월에요? 그리고 그런 거 핑계대면서 남의 팔 자꾸 만지지 맙시다."

"어. 나는 아직 우리가 연인 사이인 줄 알았죠?"

그 말을 듣고서야 지우는 굳은 얼굴 그대로 써전과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얘기에 팔려서 임정이 한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 거짓말을 들키지는 않은 듯했다.

"아니예요?"

임정이 물었다.

"맞아요. 계속 부탁 좀 할게요."

"맡겨만 주시라니까요."

임정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태인은 다른 날보다 말이 많았다. 술을 마시는 속도도 조금씩 더 빨라졌다. 태인은, 이 팀을 떠나면 모두들 너무 보고 싶을 거라는 둥, 자기 잘못으로 레이드를 망치게 될 것 같다는 둥 끝도 없이 걱정을 했다. 임정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안 그래도 중압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한테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듯했다.

태인은 계속해서 술을 들이붓더니 견디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이 형 토하려나 본데요?"

강현이 먼저 알아차리고 태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탱커님 앞에서 이러지 말고 화장실까지만 참아요, 형."

태인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일어서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써전은 말짱한 정신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의식이 정전된 것 같았다. 써전은 임정이 자신의 다리에 손을 얹고 있는 동안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물은 여러 모금을 마셨다. 자기가 마신 물에 의식을 잠재우는 약이 녹아 있었다는 것을 써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써전은 몸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혈관을 타고 얼음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몸 속이 쾌청해지는 것 같은 희한한 느낌이었다.

그 기분은 다리쪽에 집중이 되었다. 얼굴 근육이 경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는 웃었을 것이다.

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임정은 자리에 없었다.

“써전님. 탱커님은 간 거예요?”

강현이 물었지만 써전은 깊이 잠이 들었는지 강현의 말도 듣지 못했다.

“써전님, 많이 드셨어요?”

지우가 묻자 써전은 겨우 눈을 떴다.

“탱커님은요?”

써전은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임정의 행방을 물었다. 자기들이 물으려고 준비했던 말을 오히려 질문으로 받자 세 명의 하급 헌터들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게요. 저희가 오니까 없던데요?”

겨우 한 말이 그거였다. 강현의 말을 듣고 써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일어섰다.

세 사람의 고개가 자력에 끌리듯이 써전을 따라 움직였다.

“걸음이 굉장히. 뭐랄까. 편해보이시네.”

태인의 말에 지우와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진짜 대단하네요. 술에 떡이 된 와중에 그런 말을 하다니. 다음부터는 좀 조절해가면서 마셔요. 술에 약한 사람이 뭘 그렇게 죽자고 마셔요?”

지우가 태인을 타박하자 태인은 자기도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처들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내가 언제 또 치안대원이랑 술을 마시겠냐? 그것도 B급 탱커님이랑. 미모의. 가장 중요한 건, '미모의'. 응. 미모의. 그리고 레이드 때문에 긴장이 되기도 하고. 나 지금 미쳐버릴 것 같아. 긴장돼서. 그렇다고 어렵게 얻은 기회를 날릴 수도 없고. 잘 할 자신도 없고.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아?"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으면 하던 얘기는 끝을 맺고 잠이 들던 뭘 하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우와 강현이 안타까워 하면서 뒷얘기를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조용했다. 두 사람이 태인을 바라보자 태인은 쌔근쌔근 소리를 내가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지우의 잔을 채워주었다.

"태인이 형도 힘든가봐요. 전이랑은 엄청 달라졌죠?"

"형? 그렇지. 처음에는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속감 때문이려나요? 전에는 그냥 겉돌기만 하면서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 같았는데. 솔직히 저는 태인이 형이 하는 말 듣고 놀랐어요."

"어떤 거? 같이 레이드를 해서 나한테 경험치를 나눠주고 싶다던 말?"

"네."

"내가 놀란 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걸."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태인이 형은 그날 이후에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가 레이더하고 부딪쳐서 치안대가 출동했던 그 날요. 태인이 형만 그런 게 아니고 저도 그랬죠. 근데. 태인이 형이 몇 번이나 저한테 그 얘길 하더라고요. 형이 그때 태인이 형한테 고맙다고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못했다는 것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형이 자기 마음을 전부 알아준 것처럼 그 한 마디를 해 준 게 너무 고마웠대요. 변명을 안하고도 이해받은 기분이 들더래요."

"태인이 형한테 정말 고마웠으니까.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을지도 알 수 있었고. 더군다나 형은 레이드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고 레이더들한테 찍힐 수도 있잖아. 나하고도 완전히 상황이 달랐던 거라고."

"태인이 형요. 정말 레이드를 제대로 할 수는 있을까요?"

"그러게. 형이 떠나면 아쉽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형이 계속 사체 운반만 하기를 바라지도 못하겠고."

"태인이 형 꼬셔서 우리 계속 사체 운반이나 할까요? 써전님이랑 넷이 같이요. 죽을 때까지요."

"아니."

"저도 정말로 그러자고 한 말은 아니예요."

수습이 안 되는지 강현은 지우의 빈 술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가득 찬 술잔에 지우의 웃는 얼굴이 어른거렸다.

***

이제 임정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처음에 임정을 봤을 때의 두근거림과 흥분은 이제 이 하급 헌터들에게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심하면, ‘우리, 임정 탱커를 불러서 회식이나 할까?’ 라는 말이 이제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

‘어, 내가 아는 탱커가 치안대에 있는데.’ 라는 말은 예사로 나왔다.

그렇다고 임정의 이름을 팔아서 대단한 사기를 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소소하게 인맥 자랑을 할 때는 그 이름을 사용했다.

임정은 이제 치안대에 붙어있는 시간보다 이 팀을 따라서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사실 치안대원이라고 해서 치안대에 붙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레이드를 위해서 오픈일이 다가오는 늪에 나가거나, 헌터가 낀 분쟁을 해결하러 출동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정해진 임무 수칙이라는 것이 없었다.

치안대는 국민을 위한 봉사기관이라는 성격이 강해서 의무가 많지 않고 권위는 막강하게 부여되는 기관이었다. 치안대원이 그렇게 농땡이를 부려도 되느냐고 강현이 말할 때마다 임정은 넓은 의미로 순찰중이라고 항변하곤 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급 헌터들이 임정을 더욱 친근하게 대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써전과 임정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분명히 성적표가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는 딸과 아버지 사이의 긴장감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딸이 스스로 성적표를 가져와서 보고를 하기를 기다렸고 딸은 아버지가 그 일을 자연스럽게 잊어주기를 바라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자신을 보는 써전의 시선을 임정은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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