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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31화 (3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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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체 운반 헌터

“아뇨. 그냥. 말을 할수록 제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서 그만두는 게 낫겠네요. 이 정도했으면 눈치 까야죠. 그래도 나는 김인아가 좋다. 그러면 저는 이 말밖에 드릴 수가 없는 거죠. 네, 네. 예쁜 사랑하세요 라고요. 제가 뭐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지우는,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이 손뼉을 한 번 딱 치고 한 걸음을 물러났다.

“아참. 김인아. 너한테는 할 말이 조금 더 있긴 한데. 너한테 충고 하나만 하자. 길 가다가 누가 쓰러져 있으면 도와주지는 못해도 발로 차지는 마. 그냥 조금만 돌아서 가면 되는 거잖아. 네 눈 앞에서 누워있는 사람이 왜 누워있는 건지 모르는 거잖아. 네 멋대로 상상하지 말라고. 그러다 네 발목 분질러지는 수가 있거든. 그래도 그간의 정이라는 게 있어서 말해주는 거다. 들어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김인아는 지우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은 싹 잊고 이게 전부 지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이현석은 지우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제는 완전히 돌아섰다.

마침 손님들이 편의점으로 향하기에 지우는 잘 됐다 싶어서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이현석이 먼저 차를 향해 걸어갔고 김인아가 그 뒤를 따르는 게 보였다. 김인아가 이현석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그가 돌아서더니 김인아의 뺨을 거칠게 때렸다. 세 대를 연속해서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김인아의 어깨를 밀었고 김인아는 뒤로 비틀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런 때는 통증보다 쪽팔린 게 먼저겠지만 김인아는 저를 두고 떠나는 차를 잡으려고 달리느라 쪽팔림조차 느낄 틈이 없는 것 같았다.

‘쟤는 왜 저러고 살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계산을 해 주고 빈 자리에 물건들을 채워넣으면서 돌아다니다보니 새삼스럽게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생각은 순차적으로 흘렀고 자기가 무일푼에 빚만 잔뜩 떠 안은 일이며 천기정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일, 천기정이 응급실에 실려가고 자기가 보증을 섰던 일까지 떠올랐다.

그리고 늪과 타투와 연구소와 임 정.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지, 그때 임 정이 생각났다.

그 생각들이 든 게 임 정을 떠올리고 싶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서로 용건 없이 전화를 해도 되는 사이인가 하면서 지우는 전화를 했다. 임 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청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문자가 도착했다.

[연락할게요. 출동중이라.]

[아. 넵.]

지우는 재빨리 답문자를 보냈다.

치안대는 항상 바쁘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와중에도 답장을 보내준 게 고맙다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다.

그때는 써전이 말했던, 이상한 능력을 갖고 있다가 죽었다는 탱커에 대한 얘기는 까맣게 잊은 뒤였다.

***

월요일 아침은 활기가 돌았다. 이 사람들에게 월요병 따위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모두가 혼자 살았다. 일요일 저녁에는 각자의 집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이제 슬슬 자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잔 게 전부였다.

강현은, 우리는 왜 항상 피자 가게에서 모이는 거냐고 써전에게 물었다. 써전은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판단하고 강현을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의 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첫 늪이 아직 레이드가 안 끝났으니까 여기서 두 시간 정도 비비다가 가도 될 것 같아요.”

써전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자고 나올 걸 그랬어요.”

강현이 잠이 부족하다는 듯이 아쉬워하면서 말했다.

“진작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공격대 사정으로 일정이 바뀐 거라서요.”

“공격대 사정이라는 게 뭐예요?”

지우가 물었다.

“오기로 한 딜러가 늦었다던가 탱커가 늦었다던가 그런 거겠죠. 그래서 늪에 입장할 수 없게 돼서 기다렸다가 들어간 거겠죠.”

“늦는 사람들은 항상 문제네요. 덩달아 우리 일정까지 다 차질을 빚잖아요.”

강현이 오랜만에 입바른 소리를 했다. 일당제로 일을 하는 하급 헌터들이라면 이런 경우에 그저 좋아하겠지만 이 팀은 성과급을 챙겨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수입에 직결되었다.

그 사이에 태인은 지우에게 이태림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우씨. 우리 누나가 주말에 만나고 싶대. 시간 좀 낼 수 있어?”

“안돼요, 형.”

지우는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왜? 그냥 만나줘버려. 만나서 진상짓을 하면 되잖아. 그런 여자들은 그냥 여자쪽에서 떨어져나가게 만들어버리는 게 좋아.”

“‘그런 여자’요? 형네 누나잖아요.”

“나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야. 그런데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우리 누나도 꽤 괜찮을 걸? 지금은 3선 의원의 문고리 비서관인데 누나가 모시는 국회의원이 나중에 그 지역을 누나한테 넘겨줄 거라는 말이 있어.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봐도 될 거야. 그러면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겠지. 최연소 타이틀은 이미 물 건너 갔나? 아무튼. 그리고 얼굴도 뭐. 그 정도면 수준급이잖아. 몸매도 흠잡을 데 없고.”

“형. 저는 태림이 누나가 싫다는 게 아니고요.”

지우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핑퐁 게임 같은 이 상황이 점점 지겨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이 상황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지우는 얼결에 그렇게 말해버렸다. 하지만 이태인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누군데? 사진 있어? 사귀는 사람이면 사진은 있겠지?”

네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지우는 제 스마트폰에 저장된 여자 사진을 떠올렸다. 다운받아서 저장해 놓은 야동 배우를 애인이라고 우길까 하다가 지우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혈기왕성한 김강현이 야동매니아라는 걸 깜빡 했던 것이다. 지우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 중에 특별히 ‘보물상자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는 건 강현이 보내준 사진들이었다.

“우리 누나가 싫은 거야?”

태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거부할 정도로 싫어?”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형. 정말 사귀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유레카!’

연구소에서 나오기 전날엔가 임 정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연구소 뒤에 있던 정원에서였을 것이다. 지우가 갑자기 센치해져서, ‘나중에는 여기도 그리워지겠죠’ 라고 말했더니, ‘그럼 기념사진 찍어요.’ 라고 임 정이 추진을 하는 바람에 찍게 된 사진이었다.

지우는 어느새 그 사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태림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이태림과 사귀다가 이태림이 싫어졌을 때 편하게 헤어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자꾸 걱정되었다.

지우는, 아니다 싶은 사람과의 인연은 꽤 냉정하게 끊어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태림은 이태인의 누나다. 그런 사람에게 냉정하게 굴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이태림과 관계를 시작하는 게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이태인을 봐서 헤어지지도 못하고 계속 만난다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우와, 엄청난 미인이네요!”

사진을 보고 강현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래?”

지우는 임 정이 그 정도까지인가 하면서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애가 예쁘다는 말을 들은 엄마 같은 흐뭇한 웃음까지 어느새 입가에 걸려 있었다. 써전도 관심을 보였다.

“안지우씨 취향이 나랑 비슷하네요. 나도 결혼을 했다면 이런 스타일의 여자랑 했을 텐데.”

써전까지 호감을 보이자 지우는 기분이 묘해졌다.

“뭐하는 사람이예요?”

태인은 일단 경계를 하면서 물었다.

“허, 헌…….”

어디까지 말을 해야 되는 건가 하면서 주저하고 있는데 강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헌터야, 세상에! 말도 안 돼. 이거 헌터 타투 맞죠?”

사진 속의 임 정은 지우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든 채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강현은 대단한 열의와 집중력을 보이면서 화면을 터치해 사진을 확대했다.

‘설마 김강현이 화면을 확대해서 볼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는데!’

지우를 제외한 세 사람이 입을 벌린 채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건가 하면서 확대된 사진을 보자 헌터 타투가 보였다.

“B…, B급 탱커래! 여기는 헌터 협회 건물인데. 헌터 협회 연구소잖아요, 맞죠? 그럼 이 사람…, 치안대잖아요. 아니예요? 헌터 협회에 있는 헌터는 치안대고. 치안대에 끌려간 헌터가 이렇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 리는 없고. 진짜 치안대원이예요, 이 누나?”

강현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덜덜 거리며 물었다.

“어, 아니, 맞긴 맞는데. 그냥 서로 알아가는 중이야.”

일이 어째 점점 커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지우가 스마트폰을 뺏었다. 그래도 이게 거짓말이라는 걸 들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러프하게 따져 보자면, 자기가 한 말 중에 거짓말은 없었다. 갑자기 말을 지어내느라고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아서 손등을 이마에 얹었더니 정말로 열이 나고 있었다.

이태인은 아쉽게 됐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에이,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 안지우씨가 내 매형이 되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했고 우리 누나 심부름을 하는 게 귀찮기도 했는데 어느 게 더 큰지 모르겠네. 어쨌든 여자친구가 B급 탱커라니, 거기다가 치안대라니 대단한데?”

태인이 말했다.

“형. 내가 그때 말했잖아요. 치안대에 B급 헌터는 다섯 명 뿐이라고요. 우리나라에 다섯 명 밖에 없는 B급 헌터를 사귀고 있다니.”

강현은 지우를 점점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냥, 아니. 그게…….”

이쯤해서 이실직고를 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세 사람은 지우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었다.

“지우 형 여자친구가 치안대 B급 헌턴데. 이제 레이더들, 깝치기만 해봐. 가만 놔두나. 다 죽었어! 진작 알았어야 됐는데.”

강현이 말했다.

지우는 이제 그냥 허허허 웃고 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와서 설명을 해 봤자 이 사람들이 들으려고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지우는 머리를 굴렸다.

이 사람들이 임 정을 만나게 될 일은 없을 테니 당분간 거짓말을 지속하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상심한 얼굴로 임 정과 깨졌다고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나 천재 같은데?’

지우는 혼자서 감탄까지 하고 드디어 그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경쾌한 기분으로 첫 늪에서 운반을 끝냈다. 괴수를 부검하면서 효과적인 공격 방법도 배우고 여러 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써전은 태인과 강현에게도 사체를 절단해볼 기회를 주었다. 이제 그 두 사람도 중량을 맞춰가면서 사체를 절단했다.

그 날은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다. 그게 전부 운명적인 재회의 전조였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네 번째 늪으로 향할 때였다. 태인은 무기를 뭘로 정할지 아직 결정을 못 했다면서 써전과 지우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그들은 레이드를 마치고 나와있던 헌터들을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 보통의 경우에 레이더들은 레이드가 끝나면 안에서 러프 스톤만 챙기고 곧바로 늪을 떠난다. 그러니 그곳에 레이더들이 남아있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 늪이 다른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오픈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늪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치안대다!”

그들을 가장 먼저 알아본 강현이 말했다.

막 레이드를 끝내고 나온 헌터들은 중세 시대의 전투 장면을 그린 삽화에서 튀어나온 기사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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