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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체 운반 헌터
준비를 마치고 편의점에 나가는데 40분이 걸렸다. 성민은 지우를 격하게 반기면서 헌터 생활은 어떤지를 물었다. 듣고 싶은 말은 많은 모양이었지만 연신 시계를 보더니 조금 일찍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네. 다녀오세요.”
지우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묻지 않았다. 자기가 일을 할 때 지우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그냥 조용히 시간을 빼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왜 시간을 비워야 하는지 자신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채 그냥 이해받고 싶은 적이 있었다.
처음 몇 번은 버벅거렸지만 이내 지우는 예전의 능숙한 편의점 알바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성민이 말했던 것처럼, 시간 상으로는 그렇게 오래 지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게 변했다. 그런데 하필 그 많은 변화를 까맣게 모르는 사람이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김인아였다. 김인아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김인아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김인아를 다시 보게 됐지만 지우에게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한 마음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개미가 빵부스러기를 등에 지고 지나가는 걸 보면서 느끼게 될법한 감정 같은 것, 쟤도 나름 열심히 사는구나 라는 정도의 추상적인 감정밖에는 없었다.
“어머. 지우 오빠 아냐?”
김인아가 말하면서 다가왔다. 남자는 지우에게 관심을 보이며 김인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는 사람이야?”
남자가 물었다.
“네. 아는 오빠예요. 지우 오빠. 여기에서 일해? 왜? 좋은 회사 다니고 있었잖아.”
김인아가 말했다.
림스를 말하는 건가?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하면서 지우는 인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인아는 아직 모르는 거라는 것을 지우는 깨달았다. 하긴 지우는 최소한의 사람들에게만 자기가 헌터가 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뉴스에 지우에 대한 보도가 나오기는 했지만 26세의 남자에게서 헌터 타투가 나타났다는 정도였다. 얼굴이나 신상 정보가 공개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 후에 지속적으로 지우와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아니라면 뉴스에 나온 남자가 지우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지우는 일이 재미있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오빠를 여기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빠. 이쪽은.”
김인아는 멋대로 지우에게 제 옆의 남자를 소개했다.
“올댓툴즈 알지? 헌터들 장비랑 무기 만드는 회사. 우리 오빠는 올댓툴즈 코리아 수퍼바이저야.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하는 기업 1위라잖아.”
"1위는 아니고 6위야. 1위는 바디 펌이지."
남자가 말했다. 김인아가 떠들어대는 동안 올댓툴즈 코리아의 수퍼바이저라는 남자는 겸연쩍어하면서도 그 상황을 누리는 표정을 지었다.
“이현석입니다.”
남자가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그걸 뭐하러 줘? 편의점 알바가 올댓툴즈 코리아 수퍼바이저한테 볼 일이 뭐가 있다고.”
김인아의 말투에서는 이현석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지우에 대한 경멸이 함께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불필요하게 길기만 한 호칭을 계속 말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우는 웃음이 나서 가리지도 않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명함을 받았다.
“주시니까 받기는 하는데. 나를 누구랑 헷갈리신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지우는 김인아를 보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했다.
“어머.”
인아는 생각하지 못한 반응에 얼굴을 씰룩거렸다.
“뭐야? 자기. 사람을 잘못 보고 아는 척을 한 거야?”
이현석이 실없이 웃으면서 놀려대자 김인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를 모른다고?”
김인아가 톤을 높이면서 말했다.
“누군데 그러세요? 나를 아세요? 어디에서 봤는데요? 나하고 뭘 했는데요?”
지우가 되묻자 김인아의 얼굴에서 홍조의 강도가 더 높아졌다.
“뭐든지 같이 한 게 있으니까 안다는 거 아닌가 해서요. 학교를 같이 다녔거나. 운동을 같이 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쪽을 모르겠네요. 나랑 뭐했어요?”
지우는 인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하다’라는 단어가 품은 많은 뜻 중에 가장 은밀한 뜻으로 받아들여지길 의도한 채로.
“자기야. 그만해. 자기가 잘못 본 것 같아. 필요한 것 있다며. 살 것만 사고 빨리 나가자.”
이현석이 김인아를 달래려고 하자 김인아는 점점 화가 나는지 지우가 있는 카운터쪽으로 바짝 다가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진짜 나를 모른다고? 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김인아가 지우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 혹시. 걘가? 고등학교때 복도에서 우리 교실 훔쳐보던 애야? 학원 갈 때마다 나 따라 다니던 앤가?”
지우가 한가롭게 말하자 김인아는 그야말로 뒷골이 당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헛소리야?”
“인아야. 그만해라. 너만 추해진다.”
이현석이 그쯤 말렸으면 김인아도 그냥 거기에서 멈췄으면 좋았으련만 김인아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좀 더 생각해 보면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똑바로 봐. 생각날 텐데?”
김인아가 말했다.
지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옆에 다른 분이 있고 해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쪽이랑 아주 닮은 애를 내가 알기는 하거든요. 근데 걔는 한국에 없어요. 나도 처음에는 걔랑 진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김인아는, 이제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거냐는 듯이 팔짱을 끼고 지우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래도 그쪽이 걔는 아니죠. 근데 우연이라고 해도 희한하기는 하네. 어제 자다가 걔 생각을 하기는 했거든요. 걔가 나이에 비해서 테크닉이 좋아서 그걸 잘 해 줬거든요. 그래서 걔랑 떡이나 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걔랑 닮은 사람이 딱 들어오는 걸 보고 나도 깜짝 놀라기는 했어요.”
지우는 할 말을 다 해 놓고 김인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김인아의 동공이 길 잃은 당구공처럼 이리저리 굴렀다. 옆에 서 있던 이현석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아아아. 맞네. 맞다. 누군지 이제 확실히 기억났다!”
지우가 말하자 김인아의 얼굴이 이제는 하얗게 질렸다.
“너. 김인아 아냐? 김인아 맞지!”
지우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김인아의 어깨가 위로 한 번 솟구쳐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이현석은 이번에야말로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
“우리 인아를 압니까, 정말로?”
이현석이 물었다.
“네. 인아랑 내가 보통 인연은 아니죠.”
지우가 태연하게 말을 하는 것에 비해서 이제 김인아의 몸은 앞뒤로 흔들리기까지 했다.
“그래요? 우리 인아랑 어떻게 아는데요?”
이현석은 김인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면서 지우에게 물었다.
“대화를 많이 나눴죠.”
'수없이 많은 몸의 대화를.' 이라는 말은 그냥 눈빛으로만 해 주었다.
“그래도 용케 인아가 나를 기억하네. 오빠는 인아가 오빠를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지. 근데 인아가 오빠를 좀 잘못 알았나보다. 오빠를 쉽게 봤나봐? 그냥 대책없이 착하고 바보같은 사람인 줄 알았나? 건들면 건드는대로 구르면서 말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냥 멋대로 오해하지 말고 물어보지 그랬어? 나는 너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맞냐고. 그럼 오빠가 적당히 설명을 해 줬을 텐데.”
지우가 계속해서 말하자 김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현석의 팔을 붙잡았다.
“가자, 오빠. 내가 잘못 알았어. 모르는 사람이야.”
“모르는 사람이긴 뭘 모르는 사람이야? 네가 김인아라는 것도 알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떨어?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뭐고. 어?”
이제는 이현석이 김인아를 추궁했다. 그러다가 지우를 보더니 생필품 코너로 가서 적당한 것들을 골라왔다.
“남의 업소에서 장사 방해하면서 지들끼리 싸우는 년놈들 보면 진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네요. 대충 계산해 주세요.”
이현석의 말에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을 해 주었다. 김인아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고 있다가 지우가 계산을 마치자 이현석은 더 들을 말이 없다는 듯이 먼저 나가버렸고 김인아는 놀란 얼굴로 그를 뒤따라 나갔다. 문을 열어 놓고 나가버려서 지우가 문을 닫으러 따라 나가야 했다.
“쟤, 다니던 회사에서 사기 당하고 회사에서 짤려서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열등감으로 푹 쩔어있는 애라서 그러는 거야. 오빠가 좋은 회사에서 돈도 잘 버는 것 같으니까 헛소리하는 거라고. 생긴 거 보면 몰라? 저렇게 생겼으니까 회사에서 직장 동료한테 사기나 당하지. 쟤가 제일 많이 당했대. 지금도 그 돈 갚느라고 여기에서 뺑이치는 거고.”
김인아가 달려가면서 이현석에게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잠깐만요.”
지우가 큰 소리로 이현석을 불렀다. 이현석은 자기가 세워두었던 차로 가까이 다가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이 불쌍해서 그냥 입 다물고 말려고 했는데 제가 지금 입을 다물면 그쪽 인생이 똥 되는 건 순식간일 것 같아서 아무래도 말을 해 줘야 될 것 같네요.”
김인아가 지우를 보고 표정을 일그렸다. 지우가 따라 나왔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김인아는 그 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우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거의 패닉에 빠질 지경이었다. 왜 지우를 건든 건가 하는 생각에 후회를 했지만 이제 활은 시위를 떠나 있었다.
“예. 얘가 방금 한 말 전부 맞아요. 얼굴도 그저 그런 인아랑 헤어지지도 않고 다섯 달이나 만난 거는 순전히 그냥 얘랑 떡치는 게 좋아서 그런 거고요. 떡은 잘 치잖아요. 아직 모르시나? 얘 처음에는 잘 안 줄 걸요? 안 그래요? 아직 안 해 봤을 수도 있겠네요. 꼭 해 봐요. 이런 오크한테 걸렸는데 그런 재미라도 봐야죠. 보나마나 얘한테 돈은 엄청 빨렸을 것 같은데.”
김인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미있네요. 마저 해 보시죠. 그 얘기.”
이현석이 다가오며 말했다.
지우는 김인아에게 조금도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입을 다물면 이현석의 인생이 좆이 될 거고 입을 열면 김인아의 인생이 좆이 될 텐데 자기가 김인아의 인생을 걱정해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피해자를 구제해 주는 게 낫지 않은가.
“얘가 처음에 하는 말은 다 똑같을 걸요? ‘나는 오빠를 정말 많이 좋아하고 특별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잘 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오빠가 나를 쉽게 대하는 게 싫어. 나는 내가 오빠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오빠도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주면 좋겠어. 그러니까. 때가 되면 나도 오빠랑 잘 거지만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서로에 대해서 확신이 들 때 하자.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런 말 안 하던가요?”
이현석은 어느새 담배를 빼물고 있었다.
“그나저나. 둘은 언제부터 만난 거예요?”
“다섯 달 됐습니다.”
지우의 질문에 이현석이 담배를 입에서 빼내면서 곧바로 대답했다.
지우가 하는 말에 어지간히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세요? 확실히 양다리였네요. 얘랑 헤어진지 시간이 좀 되긴 했지만 분명히 겹치는 시기가 있긴 하네요.”
지우의 말에 김인아가 이현석을 향해 돌아섰다.
“오빠. 지금 이 말 믿는 거 아니지?”
“더 얘기 해 봐요.”
이현석은 김인아를 완전히 무시하고 지우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