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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술 친구로는 별로였다. 지우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우가 일어서자 모두들 일어섰다.
아마 다시 회식을 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회식을 하더라도 술을 마시지는 않을 것 같다.
이태림은 지우에게 자기가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뇨.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네요.”
그 말이 어디가 어떻다고, 이태림은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지우는 용하를 소환해냈다. 용하는 지우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곧바로 나와주었고 지우는 용하의 앞에서 신세 한탄을 했다. 용하는 지우가 그런 문제로 고민하게 될 거라고 처음부터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친구가 그 문제를 현실적으로 맞닥뜨리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좋질 않았다.
그럴 때 용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이었다. 묵묵히 입 다물고 지우의 술잔을 채워주는 것.
지우도 용하가 딱히 다른 것을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지우가 용하에게 기대한 것도, 하소연을 조용히 들어주고 술잔을 같이 비워주는 거였을 것이다.
“그래도 인마. 너는 헌터잖아. 그 무슨, 비슷한 말 있지 않나? 속담 중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나? 마찬가지야. 개똥 밭에 굴러도 헌터가 나은 거지. 도저히 못 참을 만큼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생각하라고."
"그게 무슨 개같은 비유냐? 네가 뭐가 어때서?"
"에효. 말을 말자. 이 새끼, 저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회사 다니는 놈이었으면서 직장인의 비애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쌩까네."
용하를 만나면 역시 얼큰하게 욕을 얻어먹는 재미였다.
"그래도 너. 돈은 제법 모았겠다?”
용하가 제 잔을 기울이면서 물었다.
“그런 것 같다. 빚도 한 번에 갚았고 그 다음부터는 돈 쓸 시간도 없이 벌기만 하고 있으니까.”
“하루에 50만원씩?”
“아니. 써전님이 더 챙겨주셔.”
“사체 운반은 일당제 아니야?”
“일당젠데 그런 게 있어. 우리 써전님이 애초에 바디 펌이랑 성과제로 계약을 하셔서 우리한테도 더 넣어주고 계셔.”
“그래? 원래는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거잖아.”
“그렇지.”
“좋은 분이네. 너는 인복이 있다니까?”
“인정.”
“네 인복의 근원은 나고. 애초에 나를 만나서 네 일이 이렇게 잘 풀리게 된 거야.”
“너를 만나서 내가 텐텐이 된 건 아닐까?”
“에이. 그럴 리가 없지. 네가 텐텐이 된 건 네 잘못이고 네가 잘 된 것만 내 덕인 걸로 하자.”
용하가 익숙한 웃음을 보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런 걸로 해라.”
“너희 집은 가 봤어? 오피스텔 말고. 늪 나온 집.”
“못 가봤지.”
“나는 거기에 엄청 가보고 싶은데. 나 가끔 그 꿈 꾼다? 꿈에 너희 집에 가서 노는 꿈.”
“꿈에도 우리 집 거실에 늪이 있어?”
“아니. 없는 것 같아. 언제든 갈 수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갈 수 없게 된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애틋하고 그리워지나봐. 그게 뭐라고 꿈에까지 나오냐?”
“그러게. 웃긴다.”
잠시 말이 없다가 지우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우리 가 볼까?”
“어디? 너희 집?”
용하가 물었다.
“응.”
“아. 거기 못 가. 안 알려줬으면 너 괜히 거기까지 갔다가 허탕칠 뻔 했다. 일단 나한테 고맙다고 해. 알려줬으니까.”
“못 가? 왜?”
“내가 가 봤는데 아주 그냥 철통 보안이더라. 철통 보안.”
“철통 보안? 아니. 그보다. 거길 가 봤다고?”
“응. 회식하고 술에 쩔었는데 갑자기 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랜만에 내 친구 좀 보자, 하고 거기로 갔지.”
“이 새끼도 꼴통 새끼네. 술 취했으면 지 집에 가서 처 잘 것이지, 남의 집에 와서 토하고 이불 다 버려 놓으려고.”
“하아. 이 새끼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용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술을 털어 넣고 입을 길게 늘이면서 키이익 소리를 냈다.
“아요, 맛있다.”
“근데? 그 얘기나 끝내봐.”
지우가 용하를 재촉했다.
“너희 아파트 한 동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던데? 경비 아저씨도 바뀌었고. 절대로 못 들어간다고 하더라고.”
“그래?”
“응. 거기에 상주하는 사람들도 있나봐. 아파트 주민 같지는 않은 사람들이 몇 명 들락거리더라.”
“헌터 협회 사람들?”
“헌터 협회 사람들이겠지?”
“아, 그래? 불쌍하게 됐네, 우리 집.”
“그렇지? 그래서 형이 형 얼굴이라도 보여주려고 갔던 건데 못 보고 그냥 왔어.”
“누구한테? 우리 집한테?”
“응.”
“미친 새끼. 근데 거기에 있던 괴수는 어떻게 됐나? 벌써 사냥했을까? 그렇게 하면 늪이 사라졌을 텐데. 아, 모르겠다.”
“네가 가도 안 들여보내주겠지?”
용하가 물었다.
“가 볼 시간도 없어. 일, 훈련, 일, 훈련. 그렇게 살기도 바빠.”
“하긴. 그러니까 전화도 못 한 거겠지. 훈련은 잘 돼 가냐? 어느 정도야? 이제 어디까지 할 수 있어?”
“이런 건 민간인 앞에서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니야. 심장마비에 걸릴 수가 있거든.”
“지랄을 하시네. 심장은 건강하니까 보여줘봐.”
지우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서 안 보여줄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곧바로 언행불일치를 시전했다. 용하는 지우의 손가락 끝에 차크라가 맺히는 것을 목격했다.
지우가 술잔 가까이 손가락을 가져갔을 뿐인데 술잔 위에 조그만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어!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나 취했나보다.”
용하는 그게 자기가 취해서 그런 거라고 단정을 짓고 그 후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옹. 근데 이거 맛있네. 너 그거 계속해라. 술이 다네. 달아. 지우야. 너 기본 스텟 때문에 망할 것 같으면 우리 동업해서 술이나 만들어서 팔자. 그거 사업 아이템으로 좋을 것 같은데? 술 마실 일은 이 사회가 계속 만들어 줄 거니까 마케팅은 저절로 될 거고.”
달다고 계속 마시면 안 되는 거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좀 차다 싶더니 실내의 구조물 대신 뻥 뚫린 하늘이 보였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배 위에 덮고 있던 신문지가 날아가고 있었다.
'신문지를 덮어준 건 누구였을까.'
용하는 지우의 배를 베고 자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도 한 켠이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지우는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창피해서 죽을 뻔 했다. 지우는 후다닥 용하를 깨워서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가서 대충 씻고 반나절 동안 계속해서 잤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술잔을 기울이고 한숨을 나누는 것만으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자기가 잊고 있던 행복감을 느꼈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이태인은 태림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지우씨 여자 친구 있는지 우리 누나가 알아오래요.”
태인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없고 사귈 계획도 없습니다.”
“아.”
간단하게 대화가 끝났다.
“그게 뭐예요?”
강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대화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한 번 죽은 대화는 여간해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첫 늪에서의 일은 기록적으로 빨리 끝났다. 세 사람이 팀을 이룬 이래, 어쩌면 서규태가 써전으로 일을 한 이래 가장 빨리 끝난 일일 수도 있었다. 써전은 괴수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에에이이이이이!”
그러고는 하급 헌터들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곧장 해부를 시작해 버렸다. 무슨 일인가 해서 제비 새끼들처럼 셋이 주르르 모여들어서 왜 오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해부를 시작하시는 거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런 건 안 보는 게 나아요. 전교 꼴찌인 애 답안지를 훔쳐보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라서. 보다보다 괴수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네. 이건 그냥. 아휴. 이건 빵점짜리 레이드지. 용케 성공을 하긴 했나보네.”
써전은 오랫동안 불평을 해댔다. 괴수 사체를 보니 써전이 왜 그러는지 짐작이 되기는 했다.
“이런 일은 어떤 때 생겨요?”
강현이 묻자 써전은 마지못해 대답을 해 주었다.
“탱커가 형편없으면 이런 일이 생기죠. 이 녀석은 거대 흑고양인데 체력은 340만 정도거든요. 무기없이 F급 딜러 아홉 명이랑 탱커 하나가 붙으면 여덟 시간에서 아홉시간 사이에는 어떻게든 끝낼 수 있는 녀석인데.”
써전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헌터들에 대해서 평가를 하는 것은 써전으로서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지금은 자기와 같이 일한다고 하지만 이 사람들도 언젠가는 레이더가 돼서 자기 품을 떠나게 될 텐데 그때 지금의 괴수를 사냥한 사람들을 만나지 말란 법도 없다. 말이라는 게 어떻게 전해지느냐에 따라서 원수 하나를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냥 일반론으로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우가 살살 꼬시는 바람에 써전은 결국 넘어가버렸다.
“좋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입니다. 특별히 이 괴수를 사냥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써전은 그렇게 일단 못을 박은 후에 설명을 시작했다.
“탱커가 어그로를 제대로 끌어줘야 딜러들이 딜을 넣는데 이 경우에는 탱커가 그러지를 못했던 것 같아요. 아니지. 나는 지금 일반론 얘기를 하는 중이지.”
“네.”
하급 헌터들이 웃으면서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 공격이 쉽게 이루어지지도 못하고 집중이 되지도 못해요. 그러면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중에는 초조해지겠죠. 늪에 헌터가 입장한 시간부터 열 두 시간이 지나도록 괴수를 죽이지 못하면 괴수의 체력이 리셋되니까. 탱커가 미숙하고 딜러가 조급해지면 이런 결과물이 나옵니다. 최악의 경우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기는 하겠지만.”
써전은 그것으로 논평을 마쳤다. 절단되어지는 괴수의 사체를 보고 있자니 써전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괴수나 헌터 모두에게 힘든 레이드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생긴 건 두 번째 늪으로 이동한 후였다.
첫 번째 늪에서 사체 운반을 마치고 바디 펌을 통해 알아봤을 때 두 번째 늪의 레이드 시간은 여덟 시간을 경과하고 있었다.
바디 펌은 공대장으로부터 사체 처리를 의뢰받을 때 공대장으로부터 레이드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입수한다. 그래야 그 레이드가 대략 언제쯤 끝날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공대장은 늪에 입장을 하기 전에 그 레이드에 투입되는 헌터들의 스텟과 무기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바디 펌에 넘겨준다.
5급 늪을 공략할 때는 일반적으로 2명을 근딜로, 7명을 원딜로 세우고 4급 이상의 늪을 공략할 때는 근딜과 원딜을 각각 3명과 6명으로 구성한다. 그 구성에 변동이 생기면 공대장은 그 사실도 바디 펌에 미리 고지를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늪에 들어가면 늪에 나타난 정보창을 통해서 괴수의 체력을 알려주게 되어 있다. 그 정보들을 가지고 바디 펌에서는 레이드가 얼마나 걸릴 거라는 사실을 대략적으로나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400만의 체력을 가진 괴수를 만났을 때 몇 급의 헌터가 몇 명이 들어갔는지, 근딜과 원딜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면 리로딩 시간을 고려해서 대충 계산이 나온다. 그런 정보를 기반으로 바디 펌은 써전과 하급 헌터들의 일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바디 펌에서 들어온 정보를 바탕으로, 써전은 자기들이 이동을 하고 잠깐 대기를 하면 곧바로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드는 아홉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열 두 시간이 지나도록 레이드가 끝나지 않으면 괴수의 체력은 리셋 될 터였다.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