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21화 (2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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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마지막으로 써전은 기대하는 얼굴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혹시 이번에도?’ 라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아주 아주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칼은 이가 다 빠지게 녹슬고 완전히 무뎌진 것처럼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칼이 잘못된 거라고 핑계라도 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논평 없이 지우에게서 칼을 받아든 써전은 바로 그 칼로 해부를 시작했다. 세 사람의 하급 헌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들었을 때는 나무 장작 같이 무디던 것이 써전의 손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예리하게 빛날 수가 없었다.

칼은 서걱 서걱 소리를 내면서 경쾌하게 사체의 살집을 파고 들어가면서 기름기 많은 살들을 깔끔하게 갈랐다. 써전이 뿜어내는 차크라를 감싼 칼은 그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독립적인 생명체처럼 보였다. 써전의 옆에서 써전이 해부를 하는 것을 본 것은 정말 많았지만 그때는 그 모습이 또 전혀 새롭게 보였다.

새 사람은 홀린 듯이 써전의 칼질을 지켜 보았다. 별 다르게 힘을 들이는 모습도 아니었다. 써전은 편안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차크라를 넣어야 할 때는 무기에 자유자재로 차크라를 넣었다. 버려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육의 강도에 따라서 칼을 잡는 방향이 달라졌고 그때마다 칼에 들어가는 차크라의 종류도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때는 노란 기운이 더 많이 보였고 어느 때는 순전히 파란 기운만 어른거렸다.

"요리를 할 때도 강한 불로 짧은 시간 동안 볶아야 되는 것도 있고 약한 불로 오래 뭉근하게 끓여야 되는 것도 있는 것처럼 이것도 마찬가지죠. 차크라의 강도를 순간 순간 조절하는 겁니다. 하다보면 요령이 생겨요. 지금 어느 정도의 차크라를 넣어야 하는지, 언제 힘을 빼야 하는지. 거기에 익숙해지게 되면 낭비하는 차크라를 줄일 수가 있게 되죠."

써전은 각 부위를 절단하면서 자신의 손 모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칼이 들어가는 깊이가 어떻게 달라질지 미리 알려주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헌터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나 다름이 없었다.

"하다 보니까 내 일은 끝났네요. 그럼 수고들 해 주세요."

정말로 바디 팩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헌터들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넋이 팔려 있었다.

세 사람은 바디 팩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 세 사람은 어떻게 해야 무기에 차크라를 흘려넣을 수 있을지 고심을 했다. 바디 팩을 운반하면서도 그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가, ‘혹시 이렇게 하면 되려나?’ 하는 생각이 들면 써전에게 그것을 물었다. 써전은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었다. 아예 괴수 사체의 넓적살을 한 덩어리 떼서 한쪽에 놔두기까지 했다. 여분의 칼도 그 옆에 놔두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고뇌하고, 괴수의 넓적살을 찔러보고, 안 된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바디 팩을 날랐다. 나중에는 나를 바디 팩이 없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써전은 그런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이동한 늪에서도 그런 상황은 반복되었다. 써전이 해부를 하는 동안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써전이 해부하는 걸 지켜보다가 말없이 세 사람이 바디 팩을 날랐다. 그러다가 괴수의 넓적다리에 칼을 찍어보고 실패를 거듭했다.

어느 순간 써전은 지우가 걸어가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갑작스러운 것이다. 써전은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이태인과 강현은 여전히 새로운 넓적다리에 칼집을 내보려고 도전을 했지만 지우는 묵묵히 바디 팩을 나르기만 했다. 써전은 지우가 괴수의 사체를 절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우가 일부러 남들 앞에서 가장 먼저 성공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대견하게 여겼다.

이태인은 여러 방법을 써보고도 되지 않자 괴성을 질렀다. 그런 과정을 끊임없이 겪어야 했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다시 도전해야 했다.

태인과 강현에게는, 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겨내야 했다.

“그건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게 아니니까 너무 조바심 갖지 말고 하도록 해요.”

써전이 그렇게 달래줘야 할 정도였다. 써전이 보기에 이태인도 계속 연습을 하면 보름 안에는 사체에 칼집을 내게 될 것 같았다. 강현은 그보다는 빠를 것 같아서 일 주일 정도로 예상했다.

마침 강현과 이태은이 동시에 늪 밖으로 나가고 지우가 써전의 곁으로 다가가게 된 순간이 있었다.

“해봐요, 지금.”

써전이 말했다.

“네?”

“해 보라고요.”

써전은 다시 한 번 지우를 재촉했다. 지우는 주저하더니 써전의 눈을 바라보고 칼을 집어들었다. 곧 두 사람이 돌아올 터였다. 그 긴박한 상황이 오히려 지우에게는 득이 되었다.

지우가 든 칼이 괴수 사체를 반토막내고 지나갔다. 써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절단면을 지우의 앞에 들어보였다.

“차크라 운용이 정교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절단면이 이렇게 거칠게 나온다는 건.”

“네?”

“그래도 처음 치고는 좋았어요. 이 느낌을 계속 살려두도록 하세요.”

“아, 네.”

써전이 하는 말이 오히려 지우에게는 어려웠다. 정말로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써전은 그게 지우가 도착해야 할 목표의 끝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너라면 이것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써전은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히로를 한 번 해 보자고요. 히로를 레이드하는 팀이 있으면 좋겠네.”

써전이 말했다.

히로도 요코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자주 발견되다가 거기에서 이름이 붙여진 괴수였다. 히로는 몸 전체가 딱딱한 갑각류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몸을 말면 축구공처럼 동그란 모양이 되었는데 일단 몸을 그렇게 말고 나면 어지간한 힘을 실어 공격을 해도 공격이 잘 먹히질 않았다. 팅, 팅 소리를 내면서 칼이 튕겨나오기 일쑤였다. 지우는 히로를 상대로 어떻게 레이드를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써전님도 히로를 공략해 보신 적이 있어요?”

지우가 물었다.

써전은 고개를 저었다.

“나 때는 그런 녀석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히로를 만났을 때는 탱커가 하는 일이 중요하죠. 탱커가 계속 도발을 잘 해야 히로가 몸을 펴고 일어날 테니까. 이런 괴수는 바깥이 강한 반면 안쪽은 상대적으로 약해요.히로가 이렇게 몸을 말고 있으면 탱커가 가까이 다가가서 이 부분을 자꾸 공격을 하고 건들면서 히로가 몸을 펴게 만드는 거지.”

써전은 몸을 잔뜩 오므리는 시늉을 하고서 배쪽의 빈 부분을 가리키며 말해 주었다.

“히로는 정작 레이드보다 해부가 더 까다로운 괴수예요. 히로가 나오면 그건 거의 나한테 배정이 된다고 보면 되죠.”

“써전님한테요? 왜요?”

강현이 물었다.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이라서 써전은 화가 나려고 했다.

“왜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하니까 그렇겠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하네. 쑥스럽게.”

장난스럽게 하는 말이라서 써전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농담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기는 했지만 지우는 곧 수긍했다.

“히로의 등딱지는 귀한 재료예요. 장식용으로도 나가고. 무기를 제조할 때도 많이 쓰이죠. 히로가 계속 공급될 수만 있으면 우라늄 대체재로 자리를 잡는 건 시간 문제일 거예요.”

“아.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특히 장식용으로 나가는 건, 살에서 단단한 껍질만 분리해내는 게 중요하거든요. 차크라를 정말 정교하게 조절해야 하죠. 이런 건 말로 설명하는 건 어렵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그냥 하게 돼요. 그걸 옆에서 보면서, 아, 저렇게 하면 되는 거구나, 하고 깨닫는 게 더 빠를 거고요.”

“저도 그 정도로 차크라를 잘 다룰 수 있게 될까요?”

지우가 물었다.

“나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될 겁니다. 장식용 등껍질은 어떤 써전이 분리해냈는가에 따라서 프리미엄이 붙기도 하는데 서규태 써전의 작품이라고 하면 좀 알아주죠. 언젠가는 안지우씨가 한 작품이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거래될지도 몰라요.”

지우는 써전이 하는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자기가 전혀 알지도 못하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써전님. 저도 레이드를 할 수 있을까요?”

지우가 갑자기 써전에게 물었다.

써전은 잠깐동안 지우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태인이 레이드를 할 거라고 자랑하고 다녔으니 지우 역시 그것을 생각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도 생각을 해 보기는 했는데."

써전은 이런 말을 어떻게 해야 지우가 상심하지 않을지 고민을 하면서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기본 스텟 때문에 나중에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F급 딜러가 무기발을 받으면 공격력을 100퍼센트, 200퍼센트도 증폭시킬 수 있는데 그러면 공격력 200인 F급 딜러의 공격력이 400, 600이 되죠. E급이 되면 그보다 훨씬 더 커지고. 공격력이 배수로 증가하니까 기본 스텟이 중요하죠. F급이 차크라 등급을 5등급으로 올리면 10프로가 더 올라가고. 그러면 620이예요. 안지우씨는 A급이 될 때 기본 공격력이 60이 될 겁니다. 공격력을 200퍼센트 증폭시켜도 180이 되죠. 그때의 공격력이,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은 F급 딜러의 기본 공격력보다도 낮아요.”

써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우는 혹시라도 희망적인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기대를 하고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떨구었다.

써전도 답답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서규태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계산을 해 보면 답이 안 나왔다. 지우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는 할지, 그것도 부정적이었다.

어떤 공대장이 기본 공격력이 10인 지우에게 기회를 줄까. 근접 딜러 자리는 고사하고 원거리 딜러 자리도 주려고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드에 지우를 우겨 넣는다는 것은 한 명이 모자란 채로 레이드를 한다는 것과 비슷했다. 늪에 같이 입장해서 경험치를 얻게 해 주는 대가로 지우 본인에게서 돈을 받고 데리고 다녀주지 않는 이상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F급에서 E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채워야 하는 경험치가 300이었다. 5급 늪의 괴수를 10명이 공략하면 각 사람은 1의 경험치를 얻는다. E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5급 늪을 300번 공략해야 한다. 4급 이상의 늪을 공략할 수도 있겠지만 F급 딜러의 실력으로는 어렵다. 말이 300번이지, 그게 경우에 따라서 일 년이 걸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보수도 없이, 오히려 레이드를 할 때마다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그렇게 버티고 올라가 봐야 E급이고 E급 딜러가 됐을 때의 공격력은 고작 20이 될 텐데.'

거기에서 다시 D급으로 올라가자면 그때는 경험치 600을, 그 다음에는 1800, 그 후에는 18000을 채워야 한다.

E급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은 그 후에 회수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투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D급이 되더라도 지우는 스스로의 실력으로 레이드에 낄 수 없을 것이고 그 위의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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