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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그렇다고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아니었다. 해부와 절단에 30분이 소요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거였고 서규태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얼마든지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하급 헌터들이 운반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 명의 하급 헌터가 전부 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자 훨씬 짧은 시간에 간단하게 일을 해치웠다. 그렇다고 일당제로 일을 하는 잡역부가 남들보다 많이 일을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서 지우와 강현은 남는 시간을 괴수 공부에 쏟았다.
어떤 때는 강현이 모르는 괴수를 마주하게 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써전은 어느 틈에 다가와서 그 괴수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런 걸 보면 애초에 맵의 정보를 모은다는 것은 괜한 핑계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써전은, 강현이 괴수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맵을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태인은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는 채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태인은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래도 자기가 할 분량은 확실하게 채워서 해 냈다. 사교성도 없어서 누가 말을 시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말을 시켜도 ‘네’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아니요’라는 말도 안 나왔다. 뭐라고 묻건 나오는 말은 언제나 ‘네’였다. 그렇다보니 이태인이 대답한 것 중에 반절은 거짓말일 거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이태인에게 따로 관심이 가지도 않았다.
그 날의 일정을 거의 마쳐갈 즈음, 써전은 일정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원래는 한 군데에 먼저 들러서 사체를 운반할 예정이었는데 그곳에서 헌터들이 레이드를 끝내지 못하고 전원이 늪 밖으로 나왔다고 해요.”
그렇다는데 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시간 안에 다른 늪이 구해지지 않으면 하나를 덜 채운 채로 그 날의 일정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50만원을 받는 것은 똑같았다.
써전은 바디 펌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고 결국 마지막 늪만 처리하고 일정을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오늘은 일찍 끝나겠네요.”
써전의 말에 모두가 즐거운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순간에는 이태인조차도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늪에 있던 괴수는 첫 번째에 해부하고 운반한 괴수와 같아서 따로 괴수에 대한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써전이 맵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해부를 하려고 하자 이태인이 이상하다는 듯이 써전을 바라보았다.
“이 맵은 안 살펴보십니까?”
이태인이 물었다.
“맵을 왜 봐야하는데요?”
써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우에게는,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써전의 자세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자기도 써전이 되고 싶다고 지우가 마음을 먹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써전은 말 그대로 ‘쏜살같이’ 괴수를 해부했다.
할당받은 늪 중 하나가 펑크나자 한 시간 정도의 여유를 갖고 일찍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50만원이 입금되었다.
써전은 내일도 같은 장소에서 보자고 말을 하고 먼저 떠났고 이태인도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서 떠났다.
써전이 떠난 자리에서 써전이 떨어뜨리고 간 약병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강현이었다.
“형, 이거……!”
지우도 그것을 알아보았다.
“이거 써전님 약이야? 이게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써전님이 어디에 사시는지 알아?”
“아뇨. 저도 모르는데요?”
“바디 펌에 전화를 하면 알려주려나?”
“일단 중요한 일이라고 하고 물어볼까요?”
바디 펌으로 전화를 하려다가 지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써전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써전은 태평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는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지우는 강현이 약병을 찾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걸 가져다 드리겠다고 하자 써전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퉁명스럽게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수중에 약병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럴 수가 없게 된 것 같았다.
약병이 없어졌을 때와, 약병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두 가지 상황 중 뒤의 상황이 써전에게 훨씬 크고 즉각적인 데미지를 입혔다.
강현과 지우가 써전과 접선에 성공했을 때 써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심한 불안 증세에 시달린듯한 모습이었다.
“막상 있으면 잘 먹지도 않는데 이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아오, 죽겠더라고요.”
써전이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가져다 줘서 고맙습니다.”
써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돌아온 약병을 소중하게 감쌌다.
“집에 가면 있기는 한데. 집으로 가는 동안 갑자기 통증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긴 해도 이게 옆에 없으면 불안해요. 그건. 아, 정말로 끔찍하거든요.”
써전은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서였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자꾸 했다.
“통증이 한 번 찾아오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거든요. 내가 레이드를 할 때 거의 20미터가 되는 놈이랑 붙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놈 발에 밟히면 아마 이런 기분일 거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파서.”
“써전님은 왜 써전이 되셨어요? 그런 일을 겪으셨으면 이 바닥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실 법도 한데요.”
지우가 물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으니까요.”
써전이 말했다.
“써전이 되면요. 이건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얼마를 벌게 되나요?”
지우가 묻자 써전이 지우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써전도 깨달았다. 지우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세찬 고민이 이루어지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자기도 헌터가 됐는데 레이드를 해서 돈을 벌고 싶은 게 당연할 터였다. 하지만 괴수 사체 운반을 하면서, 헌터들이 레이드에 애를 먹는 것을 실제로 보고 접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자신의 낮은 공격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레이드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써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계약 방식 중에 선택을 할 수가 있어요. 연봉을 정하고 그걸로 계약할 수도 있고 기본급여 얼마에 성과제 몇 퍼센트, 그런 식으로 정할 수도 있고. 나는 성과제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그런 쪽이 나하고도 맞거든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고위험 고수익. 위험부담을 선호하는 편이죠.”
“성과제라면 어떤 부분에 대한 성과요? 하급 헌터들이 운반한 바디 팩의 중량요?”
조용히 있던 강현이 물었다.
“그렇죠.”
당연한 얘기라는 듯이 써전이 말했다.
“그럼 저희가 일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이 버시는 거네요?”
지우는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네. 그래서 써전들끼리 물밑 경쟁도 하고 그래요. 그냥 연봉 계약으로 들어간 써전들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성과제로 계약한 써전이라면 좋은 하급 헌터를 구해야 써전이 많이 가져가니까. 내가 미쳤나?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나왔다.
“그런데 왜 저희를 몰아붙이지 않으세요?”
지우가 물었다.
“눈에 띄게 게으름을 부리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면 되는 거지 뭘 몰아붙이기까지 합니까?”
써전은 그냥 딱 그런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것은 그냥 말없이 처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면에서 서규태는 정원 가위를 손에 들고 열심히 일하는 정원사와 비슷했다. 거슬리게 튀어나온 것은 자르고, 움트려고 하는 것은 응원해주고, 자라나려고 하는데 그 위에서 햇빛을 가리는 게 있으면 과감하게 그것을 잘라내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헤어질 때까지 서규태는 써전들이 하는 일과 보수와 환경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지우는 주의깊게 이야기를 들었다.
강현은 일찍 관심을 잃은 것 같았다. 자기는 레이드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써전의 일이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시간이 꽤 많이 지나있었다.
“어서들 들어갑시다. 내일도 또 바쁜 하루가 될 텐데.”
서규태가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
다음 날에도 비슷한 일과가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태인의 표정이 아침부터 좋아보였다. 이태인은 자랑하고 싶은 것을 애써 꾹 참고 있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점심을 넘기지 못했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이태인이 마침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요. 곧 레이드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이태인이 일동을 향해 말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지우였다. 강현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기도 레이드를 할 수 있는 스무 살이 되기만 하면 레이드를 구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태인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사지멀쩡한 헌터가 사체 운반이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우는 헌터 타투가 늦게 나타나서 그런 거지만 이태인은 지우 같은 특수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태인은 여전히 차크라 숙련도가 낮았지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은 공격 증폭률을 높이는 무기를 사서 채우기로 하고 레이드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태인은 F등급에 차크라 등급은 6등급이었다. 차크라 등급은 헌터 타투가 막 나타났을 때 6등급이다. 차크라 등급이 여전히 6등급이라는 것은 이태인의 차크라 운용능력이 바닥이라는 뜻이었다. 차크라 등급이 올라가면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승되었다. 그런데 차크라 등급이 6등급이다보니 무기를 장착하지 않으면 기본 공격력인 200의 지원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지우가 보기에 이태인에게는 전투 센스가 없었다. 민첩하지도 않았고 근성도 없었다. 목표에 대한 치열한 열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레이드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가장 솔직한 감정은 역시 부러움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서운해 하실 필요는 없어요. 바로 이 일을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거든요. 무기를 어떤 걸로 할지 그것도 정해야 되고요. 돈도 조금 더 모아야 돼서 적어도 한 달 이상은 사체 운반 일을 계속 해야 돼요.”
이태인은 혼자서만 상황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려했다.
써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강현은 가만히 있다가 이태인에게, 무기는 활 종류로 할 거냐고 물었다. 이태인이 대답을 했겠지만 지우는 이태인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듣지 못했다. 관심이 뚝 끊긴 것이다.
지우는 괜히 의기소침해지려는 것을 억지로 수습하고 이태인에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처음 입장한 늪에서 써전은 괜히 의욕을 보였다.
“이태인씨가 곧 레이드를 하게 됐다고 해서 오늘부터는 일을 좀 다르게 진행해볼까 합니다. 그래도 내 팀에 있었던 사람인데 이태인씨가 잘 해서 A급까지 가면 나도 흐뭇할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태인 핑계를 대고 지우를 가르치려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강현은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강현에게는 그런 써전이 이해가 되었다. 지우에게는, 왠지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지우에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포기하고 사체 운반 일이나 힘 닿는 데까지 열심히 하라고 방향을 잡아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에게는 뭔가가 있었다. 낮은 스텟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뭔가가.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뭔가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