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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늪은 괴수가 죽은지 열 두시간만에 사라지는데 내장 적출에 시간이 많이 걸리면 어떻겠어요? 레이드가 많은 날에는 여러 탕을 뛸 수도 있는데 써전을 잘못 만나면 그 늪에서 못 움직이게 되는 일도 생겨요. 손해가 크죠. 정해진 일당이 전부 나오지도 않고 패널티도 받아요.”
강현이 말했다.
“일당을 다 안 줄 수도 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 꼭 부당하기만 한 것도 아니예요. 할 일을 다 하지도 않고 돈은 다 챙겨가겠다고 하면 그게 뻔뻔하지 않나요?”
“사업자 마인드네.”
“가끔 가다가 진짜 얄미운 사람이랑 같이 운반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아오. 그때는 진짜 빡쳐요. 차라리 그냥 몸이 힘들어버리고 말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일은 안하고 빈둥거리다가 남이 날라놓은 성과에 기대서 돈을 챙기거든요.”
김강현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드디어 괴수의 사체가 담긴 바디 팩이 차곡 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가죠. 이게 우리가 할 일이예요."
김강현이 말하며 먼저 바디 팩을 들었다. 그 후의 일은 그냥 단순 노동의 반복이었다. 다행히 김강현이 같이 다니면서, 그들이 나르고 있는 괴수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어서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괴수는 사냥하는데 여덟 시간이 걸렸대요. 딜러들이 대부분 하급 딜러로 구성돼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무기도 특출난 게 없었고..”
“아. 그래?”
“형은 어떤 무기를 쓸 건지 생각해 봤어요? 나중에는 형도 레이드를 할 거죠?”
“그래야겠지? 일단 헌터가 된 이상 나도 A급 헌터가 되겠다는 목표는 갖고 있거든.”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차크라 운용 능력은 이제 자유롭게 하는 수준이 됐어요?”
강현이 물었다. 여러 가지로 남들과 다른 지우라서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직이야. 아직 확실하게 감을 못 잡겠어. 매일 훈련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뭐라고 할까.”
“너는 어느 정도야?”
“저도 대단한 정도는 아니예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고요.”
강현이 겸손해서 하는 말인지 실상을 털어놓고 있는 건지, 지우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저는 무기를 사려고 돈을 모으고 있어요. 훈련을 계속해서 차크라 숙련도도 높이고 무기를 사서 공격 증폭률도 올릴 거예요. 그러면 레이드를 할 때 딜량을 조금은 높일 수 있겠죠.”
“무기 가격도 만만치 않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일해야죠. 저는 헌터 테스트에서 타투가 나타나고 처음 사체 운반을 시작한 후로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했어요. 주말에는 쉬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루 쉬었다가 다시 일을 하려고 하면 몸이 더 힘들더라고요. 어차피 훈련은 빠지지 않고 계속 해야 되는 거잖아요.”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사체 운반을 하는 모양이지?”
“네. 근력도 생기고 확실히 도움이 돼요. 사체 운반을 노가다로 생각하고 이 과정을 건너 뛴 헌터들이랑은 실전에서 싸울 때 차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어떤 높은 딜러한테서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
어린 녀석이 그런 생각까지 한다는 사실이 대견해 보였다.
“덕분에 돈도 꽤 모았고요.”
“그래? 나는 어떤 무기를 사용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데.”
“저는 처음에는 검을 살 거예요.”
“우리는 나중에 레이드에 투입되더라도 원거리 딜러로나 뽑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원거리 딜러만 할 것도 아니잖아요. 원거리 딜러로 뽑힐 거라고 생각하면서 활쏘는 연습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기회를 노려서 근접 딜러가 될 거고 경험치를 쌓아서 바로바로 승급할 거거든요. 그리고 원래 고수들은 활을 잘 못 쏜대요.”
"정말이야?"
지우는 대단한 정보를 들었다는 듯이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말이 있기는 한데. 그건 활을 잘 못 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 같기도 하고. 제가 아는 딜러중에는 활을 잘 쏘는 분도 많았어요."
"그것도 재능일까?"
"노력도 노력이지만 재능도 필요하겠죠? 헌터 타투가 나타났으니까 우리한테도 어느 정도 재능은 있는 거라고 믿어버리죠. 마음이라도 편하게요."
“그래. 그러자.”
강현은 꾀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게 지우의 마음에 들었다. 서규태와 강현을 보고 있자면 팀을 정말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대로 팀이 고정되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 팀의 문제는 허무영이었다. 허무영은 강현과 지우가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을 보고서 두 사람보다 한 템포씩 느리게 움직였다. 두 사람이 두 번을 갔다오면 그제야 억지로 몸을 움직이기도 했다.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말을 할까?”
지우가 말하자 강현이 웃었다.
“그냥 놔둬요, 형. 저렇게 하면 어차피 써전님한테 찍혀요. 우리 눈에 보이는 걸 써전님만 못 보시지는 않거든요. 오늘만 참으면 아마 다음번 부터는 사라질 거예요.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일한다는 걸 모르는 다른 사람이 뽑아갈 테고 저 사람은 거기서도 저런 짓을 하겠지만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해.”
써전은 하급 헌터들이 운반을 하는 동안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서운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괴수 사체를 해부하고 절단하는 일도 전부 차크라를 사용해서 해야 하는 일인데 차크라의 양은 무한하지 않다. 다음 늪으로 가기 전까지 써전은 충분한 휴식을 취해서 자신의 차크라 컨디션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걸 언제 다 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몇 번 옮기다보니 어느새 바디 팩을 쌓아둔 곳이 허전해 보였다.
“한 번만 더 하면 되겠네요.”
강현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써전도 말없이 뒷정리를 했다.
허무영은 마지막에 바디팩이 세 개가 남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게 됐다는 듯 하나를 들고 늪 밖으로 나갔다. 결국 강현과 지우는 다시 돌아와서 남아있는 두 개의 바디 팩을 나눠들고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마지막에 써전이 늪을 나왔다. 이제 곧 이 늪도 소멸될 터였다.
늪 밖에서는 일반인들이 부지런히 바디 팩을 나르고 있었다. 바디 펌이라는 로고가 박힌 트럭이 바디 팩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써전은 하급 헌터들이 전부 차에 오르자 다음 늪을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쉴 틈도 없이 빡빡한 하루가 지나갔다. 일정에 있던 마지막 늪까지 순회를 끝내고 바디 팩을 전부 나르고 늪에서 나오자 써전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겨우 그 한 마디를 하고 떠나는 써전이 좀 야속해보이기도 했지만 강현은 써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을 마치고 떠날 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써전이 다리를 전다는 게 느껴졌다.
“남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컨디션이 안 좋거나 날씨 때문에 통증이 심한 날에는 지팡이를 짚고 오시기도 해요. 레이드를 하다가 다친 명예로운 부상인데 결국 다친 사람만 고생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고.”
강현이 써전에 대해서 모르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전혀 몰랐어."
지우가 말했다. 써전이 이유없이 퉁명스럽게 군다고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다.
"서규태 써전님이랑 같이 일한 적이 많아?"
지우가 물었다.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렇구나."
"형이랑 일하니까 좋네요. 서규태 써전님이야 원래부터 제가 존경했던 분이고. 이렇게 팀이 꾸려지면 좋겠다."
"그럴 수도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걸요? 한 번 같이 일해봤다고 바로 팀을 꾸리는 써전은 없거든요."
"그렇겠지. 그럼 오늘도 바디 펌 구인 게시판을 기웃거리면서 내일 할 일을 알아봐야겠군."
"그래야겠죠."
허무영은 써전이 사라지자마자 자신도 사라져버렸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첫날이라 힘드셨죠? 그래도 훈련은 빼먹지 마세요, 형. 그리고 나중에 또 뵐 수 있으면 봐요. 이 바닥이 좁아서 금방 다시 보게 될 것 같기는 해요.”
강현은 제법 의젓한 소리를 하고 사라졌다.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 버렸다.
50만원이 입금된 것을 보니 자기가 헌터가 되긴 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하와 만나기로 했었지만 시간이 늦어버렸다. 조금 늦게 만나자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더 컸다. 괴수 사체를 나르면서 강현에게서 들었던 레이드 이야기가 지우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레이드에 여덟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
하급 헌터들로 이루어진 공대라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이야기.
지우는 언젠가 자기도 레이드를 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끼었다는 것 때문에 레이드 시간이 길어지고 다른 사람들한테 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F급의 다른 딜러들이 괴수에게 200의 데미지를 입힐 때 자신은 10의 데미지밖에 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돈이 모아지면 장비도 사겠지만 지금은 차크라 숙련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그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과 헤어진 직후에 지우는 써전으로부터 문자 하나를 받았다.
[바디 펌 구인 게시판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내일도 같은 시간에 나와요. 특별한 말이 없을 때까지는 계속.]
“어…….”
지우는 자기가 단 하루만에 서규태의 팀에 자리를 꿰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써전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에 답은 없었다. 하지만 딱 그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딱히 아쉽거나 서운한 것은 없었다.
***
다음 날도 사체 운반팀은 늪 근처의 피자 가게에서 모였다. 강현도 그 자리에 있었다. 강현 역시 그 상황에 놀란 눈치였다. 서규태 팀의 고정 멤버가 됐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구성원에 변화가 생겼다.
지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강현이 눈을 찡긋거렸다. 허무영이 없었다. 허무영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무색 무취의 남자 이태인이었다. 이태인은 서른 살이었고 지우가 그곳에서 만난 사체 운반 헌터 중에 유일하게 지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써전은 그 날의 일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여전히 약병을 들고 있었지만 하급 헌터들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약을 한 알도 먹지 않았다.
지우는 그날도 신기에 가까운 써전의 해부를 보았다. 첫 날은 정신이 없어서 괴수를 구경할 시간이 없었지만 이제는 해부당하기 전에 괴수의 모습을 관찰할 여유도 생겼다.
지우가 강현에게 괴수에 대해 묻자 강현은 자기가 아는대로 설명을 해 주었다. 써전은 해부를 시작해야 하는데도 괜히 맵을 둘러보고 돌아다녔다. 특이한 맵이라서 맵이 사라지기 전에 그려둘 필요가 있겠다는 거였다.
지우는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없냐고 물었지만 써전은, 그런 건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혼자 할 수 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렇게 말씀하시기는 해도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괴수를 보고 공부할 시간을 주시려고요. 써전님이 맵의 정보를 모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강현이 그렇게 말했다.
어떤 게 맞는 말인지 아리송하기는 했지만 써전은 그날부터 매번 모든 맵을 그려나갔고 지우는 해부되기 전의 괴수를 보면서 공부할 시간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