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15화 (1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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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사행성이 짙어서 나중에 계약자체의 무효를 주장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헌터들이 재미로 한 일이라고 우기면 사법당국도 나서기가 힘들 터였다. 힘의 균형이 이미 치안대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서 사법당국으로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한바탕 이체 소동이 벌어진 후에 임 정은 자산 관리사를 바라보았다.

“제 계좌에 있는 돈이 모자라진 않죠? 베팅은 이 정도 선에서 마감하고 이제 제 돈 이체하죠?”

자산 관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 정의 계좌에서 옮겨질 돈이 78억 5천 4백만원이었다. 그들이 헌터 협회 소속이 아니었다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금액이 이체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그것은 그들이 누리는 수 만 가지의 편의중 하나에 불과했다.

전부 157억 800만원이 모아졌다.

3년 후 그 날. 안지우가 여전히 F급이거나 E급이라면 임 정은 개털이 될 판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임정도 솔로 레이드를 몇 번 뛰면 그 정도의 손해는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기는 했다.

정작 당사자인 지우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알았다면 부담감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우는 한 달여의 기간을 연구소에 갇혀 있다가 나와서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용하는 연구소까지 지우를 직접 데리러 와 주었다. 그리고 운전을 하면서도 지우의 타투를 질리지도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아! 그때 거기였어?”

용하가 물었다.

지우는 용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다.

“거기. 정수기 앞이었어? 늪이 나타난 곳 말이야.”

“어? 어. 그러네. 그러고보니까. 정말 그렇다.”

“그래? 희한하다. 너는 그럼 늪이 나타나기 전부터 뭔가를 느꼈다는 거네?”

용하는 정말 신기한 일이라는 듯이 물었다.

“그런 건가?”

“그 늪. 다른 사람들도 손을 넣으면 헌터 타투가 생기는 거야?”

“아닌 것 같아. 그런 사람이 나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동안에 헌터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슬쩍 손을 넣는 걸 봤거든? 근데 안 나타나는 것 같더라고.”

“그래? 왜 너한테만 생기는 거지? 그리고 왜 너희 집에만 생기고. 늪이 생기기 전에 너만 느끼고 말이야.”

“그러게. 나야말로 이 시대를 구할 진정한 영웅인 건 아닐까?”

“지랄하고 있네. 연구소에 짱박혀서 햇빛을 못 보니까 애가 아주 맛이 갔구만.”

친근한 사람한테서 익숙한 욕을 들으면서, 지우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로 드디어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형아가 같이 놀아줘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겠다. 과장님이 오늘 이사를 한다고 집에 와서 이삿짐 나르는 것 좀 도와달래.”

“포장이사를 할 것이지 왜 아랫사람을 고생시킨대?”

“돈이 아까워서 미치겠는 모양이지.”

“자기 돈 아까운 것만 생각하고 아랫사람들 몸 축 나는 건 생각도 안 한대?”

“뭘 그러셔. 이제 너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이야아아. 우리 안지우가 헌터네. 헌터야.”

용하는 신이 나게 웃다가 지우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오늘 뭐 할 거냐?”

용하가 물었다.

“집에 가 봐야지. 집이라고는 하는데 엄청 낯설다.”

“그러겠다. 헌터 협회에서 얻어준 오피스텔. 아직 안 가 봤지?”

“응. 정리나 돼 있을지 모르겠네.”

“에이. 내가 과장 집에 갈 게 아니라 너희 오피스텔에 가서 도와줘야 되는데. 간만에 술도 한 잔 마시고.”

“그러게. 아쉽다.”

“빨리 나도 위로 올라가야지. 그래야 내가 같이 술 마시고 싶은 사람이랑 술 마시지.”

“조금만 더 고생해라. 몇 년 바짝 고생해서 돈 벌어서 같이 사업하자.”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용하는 킬킬 거리면서 지우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안지우. 미안한데 집까지는 못 데려다 주겠다. 과장 집에 늦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말고 가. 여기서부터는 택시 타도 되니까 아무데서나 내려줘.”

“오오오. 안지우. 이제는 부들부들 떨지 않고 택시 타게 된 거야? 요금 올라갈 때마다 심장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기분도 이제 기억 속으로 사라지나요?”

지우는 용하와 아쉽게 작별을 하고 택시를 잡고서 오피스텔로 향했다.

오피스텔은 지어진지 얼마 안 된 신축 건물이었다. 원래 부촌이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유명 연예인이 투자를 했다는 소문이 나고 근처에 극장과 쇼핑몰이 들어오면서 새롭게 각광받는 곳이었다. 늘씬하게 쭉 뻗어 올라간 42층짜리 건물은 잘 가꾼 여자의 몸매처럼 자신감이 넘쳐나 보였다.

‘이제부터 여기가 내 집이라는 거지?’

지우는 엘리베이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꼭 방문객처럼 보였는지 경비원이 지우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엘리베이터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요. 아, 저기에 있네요. 수고하세요.”

지우는 젊은 남녀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신경을 써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었다.

지우도 그 앞에 나란히 서서 멀뚱히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공실이 있다고 분양가 낮춰서 아무한테나 다 내주나봐. 큰일이다. 큰일. 이런 식으로 할 줄 알았으면 이런 데에 안 들어오는 건데.”

그게 지우 자신을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듣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고 바라보았다가, 더러운 걸 보는 시선으로 지우를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아니, 이건 또 뭐래? 내가 가만 있으면 착하게 보이나? 왜 이런 게 겁도 없이 날뛰지?’

헌터 협회에서 마련해 준 오피스텔이라고 해서 그냥 그런 곳인줄 알았는데 이 종자는 자기가 그 오피스텔에 산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지우가 그 남자를 향해서 돌아서는 순간 스마트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하필 자기가 정의를 구현하려는 이 순간에 문자가 올 건 뭔가, 하면서 지우는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잘 들어갔냐? 집까지 못 데려다 줘서 미안. 일찍 끝나면 가서 정리하는 것 도와줄게. 너는 친구도 없잖아.]

용하였다.

[웃기고 있네. 내 걱정은 말고 일찍 끝나면 들어가서 쉬어. 내가 내일 퇴근 시간 맞춰서 너희 회사 앞으로 갈게.]

[이것봐. 이 자식은 나 말고는 친구가 없다니까?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잖아.]

[지랄.]

[ㅋㅋㅋ. 쉬고 그럼 내일 보자.]

[ㅇㅇ. 고생해라.]

엘리베이터는 그때까지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옆의 남자도 조용해져 있었다. 지우가 고개를 들어보니 두 사람이 모두 지우의 헌터 타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헌턴가봐.”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남자의 완성은 헌터 타투다. 지우는 자기가 여러 말로 따지고 반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주눅이 잔뜩 들어서 자꾸만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지우의 팔을 자꾸 보기는 했다.

지우는 스마트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팔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괜히 기본 스텟까지 보이게 할 필요는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지우는 거리낌없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 오피스텔에 헌터도 살고. 우리가 좋은 데로 잘 들어왔네.”

여자가 말했다.

대화의 상대방이 누군지 모를, 굉장히 애매한 화법이었다.

지우는 안내받았던 대로 1203호로 들어갔다. 전에 살던 아파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늑했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책꽂이 하나를 가득 채운 괴수 관련 책들이었다.

새 컴퓨터도 있었고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 손을 댈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새삼 헌터 협회의 일처리에 감탄이 나왔다.

'이게 내 집이래.'

지우는 자꾸만 어리둥절해져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람 운명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

괴수의 사체 운반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은 바디 펌의 구인 게시판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더 쉬웠다. 바디 펌은 다른 사이트에도 구인 광고를 내고 있었지만 바디펌 홈페이지가 본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괴수의 사체 운반 일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루에도 많은 건수의 레이드가 이루어지고 어떤 때는 괴수 사체를 회수해 오지도 못한 채로 늪이 닫히기도 하는 것이다.

딜레마라면 딜레마였다. 일반인은 그 일을 할 수 없고. 늪에 들어가려면 차크라 운용 능력이 발현된 헌터여야 하는데 E급 이상의 헌터는 레이드를 해서 훨씬 더 큰 돈을 빠른 시간 안에 벌 수 있기 때문에 사체 운반을 하지 않는다.

꼭 E급이상이 아니라 F급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드에 뽑아만 주면 레이드를 하지 사체 운반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돈을 더 준다고 해서 인력이 더 늘어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서 하급 헌터에게 주어지는 일당은 계속 그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에 50만원이라는 돈은 여전히 큰 돈이었다. 일반인이 그만한 돈을 버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지우는 바디 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력서나 자기 소개서가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헌터 협회에서 헌터 등록증을 받아서 헌터로 활동할 수 있고 늪에 들어갈 수 있기만 하면 되었다.

절차가 간소해서 지우는 긴장을 덜 수가 있었다. 이제 자신을 텐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첫 약속 장소로 나갈 때까지만 해도 지우는 의욕이 충만했다.

약속 장소는 바디 펌 근처의 피자가게였다. 그곳에서 지우는 써전(surgeon)과 하급헌터 허무영, 김강현을 만났다.

“반갑습니다. 서규태라고 합니다.”

중년의 써전은 자신의 이름만 소개했다.

몇 등급의 헌터인지, 탱커인지 딜러인지, 왜 레이드를 포기하고 써전이 되었는지 그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타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서규태는 거의 항상 의도적으로 타투를 가리고 있었다.

지우가 같이 일하게 된 써전은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매사에 신경질적이었고 항상 작은 약병을 가지고 다녔다. 그는 약병을 꺼내서 손 안에 쥐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매번 먹는 것은 아니었고 약을 먹는 횟수를 줄이려고 스스로 노력 하는 것 같았다. 지우는 써전이 먹는 약이 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것은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그를 믿고 의지를 해야 할 텐데 약쟁이한테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함께 늪에 들어갔다가 그 사람이 판단을 잘못 내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늪에서 퇴장해야 할 시간을 놓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체 운반 일을 위해서는 써전과 세 명의 하급 헌터가 투입되었고 하급 헌터는 바디 펌의 구인 게시판을 이용해서 매번 일을 구해야 하지만 한 번 써전의 눈에 들면 거의 고정적으로 그 써전과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매번 일자리를 찾기 위해 게시판을 확인할 필요가 없게 되니 써전과 팀을 이루는 것이 여러 모로 편리하기는 했다. 써전은 괴수 사체의 해부를 맡아 정교하게 장기를 적출하고 가죽과 뼈를 발라내는 일을 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이 있어야 했고 써전의 실력이 좋은가에 따라 그 팀이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늪의 개수가 차이가 났다.

써전이 시간을 오래 끌면 사체 운반도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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