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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지우는 임 정에게 천기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묻지마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는 말과, 헌터에게 당한 것처럼 몸의 구석구석이 손상되었다는 설명을 하자 임 정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정말로 헌터가 관여된 일이라면 헌터 치안대에서 나서야 할 문제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병원에 같이 들렀다가 연구소로 가는 걸로 하죠. 제가 병원에 같이 가는 건 상관없죠?”
임 정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지우는 집을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꼭 챙겨가야 할 것들을 챙겼다.
연구소에서 머물러주는 댓가로 한 달 동안 받는 돈이 3천 5백만원이었다. 3천 5백만원이라면, 천기정의 병원비는 충분히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체 운반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한 달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한다면 천 오백만원을 벌게 된다. 주말은 쉬더라도 천 만원은 벌 것이다.
지우는 이제부터 자신의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대금 결제를 하라는 독촉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고 돌려막기 식의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우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헌터라니. 세상에. 내가 헌터라니. 나한테 타투가 생기다니!’
지우는 좋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헌터다. 안지우가 헌터다. 이제부턴 나도 헌터다!!’
보는 사람만 없었더라면 벌써 수 십 번은 더 그렇게 소리치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지우의 암청색 타투가 잠시 반짝이는 듯했지만 지우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
지우가 임 정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 천기정은 아직 수술실에서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지우는 거기까지 간 게 헛걸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임 정은 지우가 생각한 것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폭행 한 사람이 헌터라면 이 일도 헌터 치안대의 소관이죠.”
임 정이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술이 진행중인 수술실에 들어갈 권한까지 부여받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임 정은 당당하게 수술실에 들어갔다. 지우는, 당당하게까지는 아니었지만 수술실에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기정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먼저 수술대로 다가가서 천기정을 본 임 정이 지우에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해서였다. 우길 수도 있었지만 지우는 임 정의 말을 따랐다.
천기정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수술대 위에 누워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지우는 자기가 믿고 기다리면 천기정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임 정이 헌터 치안대 소속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수술을 집도하던 의사가 스탭들에게 턱짓을 해서 임 정에게 자리를 내 주도록 했다. 임 정은 천기정에게 난 상처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천기정의 상처를 만지기도 했다. 그리고 말없이 집도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줘서 고맙다는 표시였다.
스탭들은 임 정이 만졌던 자리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임 정은 이미 나간 후였다.
“과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의 포기상태였던 스탭들이 말했다.
임 정이 수술실에 들어오기 전 그들은 천기정을 살려낼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천기정의 몸이 수술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기가 하나 하나 으깨져있어서 장기를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천기정의 체력이 수술을 감당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대로 폐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도 선뜻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이 환자에게 다음 기회라는 것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 정이 수술실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임 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도의는 임 정의 손이 지나가는 부위가 정확히 천기정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곳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헌터 중에 재생 능력을 가진 탱커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재생 능력을 남에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집도의는, 절단해야 했을 천기정의 장기들이 복원력을 가진 탁구공처럼 재생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늘 수술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한다. 이 환자가 어떤 상태로 실려왔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도요?”
수술보조 간호사가 물었다. 집도의는 불필요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단지 고개를 돌려 임 정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수술실에서 나오면서 지우는 임 정에게 물을 게 많아졌다.
“천 대리님은 살 수 있을까요? 정말 헌터가 한 짓이예요? 그런데 왜 헌터가 그런 짓을 하는 거죠? 그동안은 헌터가 한 짓이라는 걸 몰랐던 거예요? 왜 그동안은 헌터 치안대가 나서지 않았어요?”
“거참 시끄럽네요. 시간이 지나면 알겠죠.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무슨 수로 알겠어요?”
“그래도…….”
“천 대리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예요? 안지우씨한테?”
“네. 집에서 늪을 발견하기 전에 여기에 있었어요. 수술비 보증도 했고요. 집에 돌아가서 수술비가 얼마나 나오려나 걱정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잠에서 깨고 늪을 발견한 거죠.”
지우가 말했다.
“그만한 돈은 있었고요?”
“아뇨. 그래도.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살리고 싶은 분이었어요. 내 눈 앞에 아무 것도 안 보일 때 저한테 손을 내밀어준 분이라서. 너무 절망적이라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 기회를 준 분이고요.”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요?”
임 정은 지우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절망적인 순간은 수도 없이 많았죠.”
지우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궁금한 게 많다는 건 알겠지만 제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네요. 그리고. 안지우씨한테 그렇게 중요한 분이라면 살겠죠. 살아날 수 있도록 저도 기도할게요.”
“…….”
“알았어요. 내가 보증할게요. 살아날 거예요.”
임 정이 힘주어 말했지만 지우는 그다지 신뢰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연구소로 가는 동안 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잠이 오지 않을 때의 평소 습관처럼 말도 없이 지우의 집에 왔다가 지우의 집에 이상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것을 보고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야, 인마! 너 지금 어디야!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네가 어떻게 알고 따라가. 어?"
지우는 용하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설명을 하려고 할수록 더 상황이 이상해졌다.
'우리 집에 늪이 나타났고 거기에 팔을 담갔더니 타투가 생겨서 나는 헌터가 됐고 지금 연구소로 가는 중이야.'라고 말하면 용하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따갑게 쏟아지는 잔소리를 듣다가 나중에 얘기하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헌터가 되면 축하를 받겠죠? 미친 놈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
지우가 말하자 임 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기억에도. 저는 축하를 받았던 것 같네요. 타투가 나타났을 때. 저라도 축하해 드릴게요. 헌터가 된 걸 축하드려요. 안지우씨.”
“고맙습니다.”
지우는 괜히 뻘쭘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직 멀었냐고 물었다.
“거의 다 왔어요.”
그렇게 한참을 달려간 끝에 두 사람은 불 꺼진 커다란 건물 앞에 이르렀다. 건물 입구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넓은 주차장이 완비되어 있었다. 로비는 웅장해 보였고 건물은 세련된 디자인에 최고급 소재로 지어져 있었다.
새벽이라고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엄청나게 높은 건물에 불 켜진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 건물을 만드는데 들어간 괴수 사체가 몇 마리일까 하고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가 임 정을 봤더니 임 정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깃들어있었다.
“뭐, 잘못 됐어요?”
지우가 물었다.
“오늘이 5월 20일이예요?”
“그런가? 아. 그런가보네요?”
“휴관이네요. 오늘.”
'헐…….'
“오늘은 헌터 테스트를 하는 첫 날이라 모두들 거기로 나갈 거예요. 그래서 건물이 비는 틈을 타서 본관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그럼. 저는 집으로 갔다가 내일 여기로 올게요. 아니지. 집에는 그 분들이 있으니까. 그럼 저는 편의점에 가서 사장님이랑, 일하는 형한테 인사라도 하고 내일 이리로 올게요.”
임 정은 그래도 되겠냐고 거듭 물으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우의 머릿속에 왜 자꾸, ‘어쩐지.’ 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지우는 처음부터 임 정이 못미더웠다. 사람을 배신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게 아니라 일을 믿고 맡기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너무 어려보이는 임 정의 외모가 미치는 영향이 가장 컸다.
“그래도 뭐. 다행이예요. 인사 다닐 시간이 하루 정도 생겼으니까 좋은 거죠.”
지우는 애써 임 정을 위로했다.
“미안해요.”
“아니. 아니.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보다 오늘이 벌써 5월 20일이네요. 올해에는 헌터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네요.”
“그렇죠.”
할 말도 없는 채로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마침내 헤어지고 지우는 어쩌면 일반인으로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할 수 있을 날을 마음껏 즐겼다.
***
처음에는 연구소 생활이 재미있을 줄 알았지만 연구소에서의 생활은 지우의 예상과 완전히 어긋났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매일 매일이 테스트의 연속이었다. 갖가지 고가(高價)의 첨단 장비가 지우의 몸을 스캔했다. 지우는 조종실에서 들려오는 지시에 따라 몸을 이리 저리 돌려가면서 누웠다. 지우는 제 몸에서 좋은 것이 발견되기를 바랐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자신을 추앙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꿈이 깨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 지우는 헌터 협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만 18세의 헌터 테스트 때 능력이 각성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후천적으로 능력이 각성됐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요인이 뭔지 알아내기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헌터로 각성시켜서 레이드에 투입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우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다. 지우는 대단한 헌터도 아니었고 공격력과 방어력은 타투에 새겨진 대로 딱 그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신체 능력이 탁월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우가 연구소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한 임 정은 지우가 연구소에 들어온지 2주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허락했다. 저녁까지는 돌아와야 하는 짧은 외출이었지만 지우에게는 그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부모님과 용하에게 전화를 하자 모두들 지우를 보고 싶어했지만 지우는 우선 천기정에게 병문안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용하는 지우의 타투를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기에 그 말을 듣고 서운해하기는 했지만 별 수 없이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지우는 천기정을 찾아갔다. 다행히 천기정은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지우가 병실로 들어가자 천기정은 지우를 바라보고 얼굴을 실룩거렸다. 할 말이 아주 많은 표정이었다.
“괜한 짓을 했던데. 안 그래도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했는데.”
천기정이 말했다.
딱 봐도 지우가 자기 치료비 보증을 선 걸 가지고 잔소리를 하려는 얼굴이었다.
“괜한 짓요? 누가요. 제가요?”
지우는 자기가 사 온 과일과 음료수와 꽃바구니를 착착 챙겨 정리를 해놓고 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