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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월급날이 돌아왔다. 그간 받아왔던 것을 통틀어 가장 적은 액수였지만 뭔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지우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천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언제나처럼, 귀찮아죽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천기정이 전화를 받았다.
“대리님. 우선 50만원은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오늘 월급을 받았거든요.”
-목돈으로 빌려가서 푼돈으로 갚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돈이 흩어져요.
“그래도 그냥 받으세요. 빚이 4백만원이라는 거랑 350만원이라는 거는 느낌이 다르잖습니까.”
-쓸 건 남겨놓고 갚는 겁니까?
“네. 쓸 건 남겨놨어요.”
-그래요. 그럼. 사정 나아질 때까지는 얼마든지 써도 되니까 너무 부담갖지 말고 천천히 갚아요. 내가 안지우씨한테 이자 내 놓으라는 말은 안 하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번 달은 일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이것밖에 못 갚는 거고요. 다음달에는 가불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음달까지만 기다려주시면 가불을 해서 대리님한테 빌린 건 전부 갚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다음달에도 대금이 나가지 않아요?
“네?”
-림스요.
“아!”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그건 제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볼게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요. 사회 경험 많은 사람이랑 적은 사람이 이럴 때 차이가 나는 겁니다. 나는 돈 빌리는 거 어렵지 않고 급하게 돈 쓸 일도 없으니까 천천히 갚아요. 다해서 내야 될 돈이 얼마예요?
“이제 1200정도 남았어요.”
-금방 갚겠네. 인생 경험 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초기에는 사기도 당하고 진짜 힘들었는데.
“그러셨어요? 저는 제가 멍청해서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책도 많이 하게 됐고 제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우가 말했다. 하소연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말을 하다보니 어느덧 속에 있던 얘기들이 나왔다.
-언제 한 번 만나서 밥이나 같이 먹어요.
천기정이 말했다.
“안 돼요. 아직은 식사 대접할 돈이 없어요. 더 모아서 다 갚고 나서 사 드릴게요.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빚 다 갚는 날 제가 정말로 좋은 데에서 모실게요. 대리님.”
-그건 안 되지. 돈 빌린 사람이 짐 빼서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내가 집이랑 직장은 알아둬야죠.
“네? 직장에……. 찾아오시게요?”
-당연하죠. 내가 안지우씨를 뭘 믿고 돈을 빌려 주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빌려주기 전에 하셨어야죠.”
-어쨌든 내 채무자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지 보긴 해야 될 것 같으니까 다음 주 쯤에 불시에 한 번 찾아가죠.
“오셔도 제가 시간을 못 낼 텐데요?”
-알았어요. 농담이예요.
몇 번 놀려먹으면 저도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진지하게 대답을 하자 천기정이 먼저 포기를 했다.
-그런데 안지우씨는 우리 회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천기정이 물었다.
“네? 그거야……. 그때 나온 걸 후회하고 있죠. 그때는 림스라는 회사가 엄청난 기회가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가 많이 되었다. 그때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는 게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몰래 이직 준비를 했고, 림스에 합격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망설임도 없이 림스로 떠났다. 림스 안에 들어간 후에는 림스가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림스 밖에 있는 동안에는 림스가 엄청나게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요? 인사팀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오늘 얘기를 해 봤는데 어쩌면 좋은 소식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요?”
-그렇다고 지금 다니는 곳에 미리 말을 하지는 말고. 언제 채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꼭 안지우씨한테 먼저 기회를 준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저는 회사를 배신한 사람이나 마찬가진데. 저한테 다시 기회를 주신다고 해요?”
-이익이 선이죠. 착한 사람은 필요가 없습니다. 제대로 일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거죠.
“저는 일도 잘 못하는데요.”
-그러니까 일단은 눈치를 못채게 해야죠. 안지우씨가 일을 못한다는 걸.
“일단은. 감사해요. 대리님. 저 때문에 인사팀까지 가서 알아봐주시고.”
-50만원씩 받으려니까 감질맛나서 그러는 거지. 내 돈 떼일까봐서.
“50만원 갚겠다는 말씀은 오늘 드렸는데요?”
-다음 주에 봅시다.
전화가 끊겼다.
지우는 새로운 기대감에 부풀었다. 재취업이 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미래가 희망에 찬 것처럼 느껴졌다.
지우는 포스트잇에 ‘-50’이라고 적어넣었다. 보폭이 아무리 짧더라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모든 순간을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다.
지우는 자기 인생이 꼭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수와 부사수였다는 인연만으로 지금까지 챙기고 도와주는 천기정도 있고,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아니라도 쉬지 않고 걱정해주는 신용하도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기회를 주는 편의점 사장도 그렇고.
그래도 자기 인생이 조금만 더 풀렸으면 좋겠다는 소망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
지우는 욕실 앞에서 양치질을 하면서 정수기를 노려보았다. 정수기 근처로만 가면 몸이 안 좋아져서 정수기를 놔두고 물을 사다 먹는 판이었다. 지우로서는 그게 집 때문인지 자기 몸 때문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 가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정수기 근처에만 안 가면 말짱하니 급한 마음이 안 생겼다.
용하에게 얘기를 했을 때 용하는 대뜸 기가 쇠해져서 그런 것 같다고 말을 했다. 기가 쇠하면 가위에 눌리기도 하고 남들보다 장소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되기도 한다고 하면서 용하는 지우에게 요즘 악몽을 꾸느냐고 물었다. 지우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용하는 거기에서부터 말문이 막혀서, 그럼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어나서 편의점에 나오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가시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계속되는 수면 부족으로 지우는 다른 날보다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실수 없이 고객 응대를 하고 물건을 받아 정리하고 자기가 맡은 일들을 착실히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일이 완전히 손에 익어서 처음에 비해서는 훨씬 편해졌다. 할 줄 아는 게 없었을 때는 자기가 할 줄 모르는 걸 부탁하는 손님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곤 했다.
'편의점 알바의 신, 안지우!'
이제는 그렇게 불려도 손색이 없겠다는 망상에 잠길 정도였다.
담배를 사러 오는 손님도 이제 완전히 눈에 익어서 손님이 들어오면 미리 담배를 꺼내서 카운터에 올려놓고 기다리는 정도가 되었다. 누가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 누가 한 번에 한 갑씩을 사고 누가 두 갑씩을 사는지도 시간이 흐르자 저절로 외워졌다. 긴장할 일이 줄어들다 보니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
지우는 이제 자기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제법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말대로 정말 ‘불시에’ 찾아온 천기정은 지우에게 시간날 때 보라고 책을 네 권이나 가져다 주고 갔다. 읽어보니 업무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가득했다. 그렇게 시간을 알차게 보내다보면 어느덧 퇴근할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시간이 화살 같다는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저녁에 한 번, 손님들이 밀려드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보내고 이제 좀 한가로우려나 하고 있는데 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 우리 너무 오랫동안 안 본 것 아냐?
용하가 대뜸 말했다.
“별로 상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했다가 지우가 얼른 말을 바꿨다.
“신용하. 너 오늘 우리 집에 잠깐 올 수 있어? 나도 곧 퇴근하는데.”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집으로 가 있을게. 비밀 번호는 안 바꿨지?
“응. 그대로니까 가 있어. 가서 청소도 해 놓고 밥도 해 놓고 빨래도 해 놔주면 더 고맙고.”
-놀고 있네.
지우는 정수기 옆을 지나갈 때 용하에게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나 두통이 느껴질지 궁금했다. 집에 있는 동안 두통이랑 어지럼증을 느끼는 때가 있다는 말은 용하에게 여러 번 했었지만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정수기 근처를 지나갈 때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용하를 상대로 해서 실험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집으로 가는 동안 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집에 도착했다는 얘기였다. 지우는 이제야말로 제 집에 얽힌 비밀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현관 문을 여는 순간, 지우는 정수기 앞에 서서 물을 마시면서 멀뚱히 저를 바라보는 용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왔냐?”
용하가 말했다.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더냐고 따로 물을 필요도 없었다. 용하의 얼굴은 더할 나위없이 평온해 보였다. 지우는 가방을 내려 놓으면서 용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폈다. 용하는 거실과 주방을 돌아다니면서 간단하게 먹을 것들을 챙겼다. 정수기 앞을 지나간다고 표정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냐.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하지. 올 때 뭐라도 사오게. 엄청 배고픈데.”
용하가 냉장고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너. 아무렇지 않냐?”
지우가 물었다.
“뭐가? 배 고프다고 말했잖아.”
“아니. 배 고픈 거 말고. 어지럽다거나.”
“어?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너는 그렇다고 했지? 나는 그 얘기, 생각도 못 했다. 아무렇지도 않던데?”
“그래? 이상하네. 나만 그런 건가?”
지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수기 근처로 다가갔다. 용하가 워낙 평온한 얼굴이어서, 이제는 저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근거없는 기대감까지 생겼다. 그러다가 정수기 옆으로 다가간 순간 지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움츠렸다.
용하야말로 놀라서 지우에게 다가왔다.
“여기야? 여기로 오려고 하면 그러는 거야?”
용하가 정수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지우는 대답할 정신도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느낌이었는데?”
용하가 물었다.
지우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는 달라진 느낌이었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갑자기 무서운 것을 마주한 것처럼, 호흡을 제대로 잇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괜…찮냐?”
용하는 지우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안지우. 병원에 갈래?”
“아니.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지우는 엄청나게 빨라진 심장 박동을 느끼면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용하는 지우의 얼굴을 보다가 제 호기심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지우는 용하의 발이 살금살금, 정수기 근처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용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아예 반대쪽으로 휙 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발을 앞으로 조금씩 뻗었다. 결국 용하의 다리는 정수기 바로 앞까지 뻗어졌지만 용하의 얼굴은 아무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제외하곤 말끔했다.
지우도 멍해진 채 용하를 바라보았다. 용하도 지우를 바라보았다.
“너.”
용하가 지우를 의심스럽게 보며 말했다.
“나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아니지?”
신용하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정수기 가까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았다.
“이러다가 나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에는 어지럼증에 구토가 느껴지다가 이번에는 심장이 멎을 뻔 했어.”
지우가 말했다.
용하는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점점 대담하게 굴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기도 하고 정수기 본체를 만지기도 하고 정수기 앞에 서있기도 하고. 지우를 괴롭히는 기운이 뭐든지간에 용하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상하면 무당을 불러봐.”
용하가 말했다.
지우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도, 돈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내가 가끔 와서 청소를 해 주기는 해야겠네. 너, 정수기 근처는 못 가는 거잖아. 이러다가 그 위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이고 그게 온 집안을 다 돌아다닐 텐데.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겠어. 네가 지나다닐 수 없는 반경이 커진다고 생각해 봐라.”
용하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이사 가야 되려나?”
지우가 물었다.
“그래야 되지 않겠냐? 언제까지 피해다니면서 살 거야?”
지우는 정수기 앞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건지, 여전히 단서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우에게 나타나는 증상도. 영향을 미치는 범위도.
***
편의점에서 폐기로 나온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천기정이 가져다 준 책을 보고 있는데 용하로부터 카톡이 왔다.
사진이 전송된 것을 보고 확인을 했더니 제 집 거실이었다. 가구의 배치가 바뀌어 있었다.
이게 뭔가, 하고 있는데 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진 봤냐?
“어. 뭐 한 거야? 너 지금 우리 집이야?”
-어. 나 천잰가봐.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생각해 봐라. 정수기는 너한테 필요한 물건인데 네가 정수기한테 못 가잖아. 그래서 내가 둘이 만날 수 있게 해 준 거지.
정수기, 정수기 하는 게 꼭 ‘정숙이’란 여자 이름처럼 들려서 지우는 실없이 웃었다.
-림스 쓰레기들을 그쪽으로 옮기려고. 그것들은 어차피 공간을 차지해야 되니까 네가 사용을 못하게 되는 공간에 그것들을 옮겨놓는 거지.
“으음. 좋은 생각이네.”
-냉장고까지 빼면 자리가 나올 것 같은데 그건 혼자 못 하겠더라고. 일단은 정수기만 옮겨놨어. 냉장고 옮기는 건 주말에 해 줄게. 내 친구한테 말했더니 와준대. 짜장면이나 사줘.
“그래. 그렇게 할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너는 생각을 했다고 해도 옮길 수가 없잖아. 이 앞에 오면 심장이 멎을 것 같다며. 마침 생각이 나서 바로 해치웠지.
"제법 추진력도 있고 머리가 잘 돌아가네?”
-그치? 나는 천재였던 게 틀림없어.
“손님 온다. 있다 통화하자. 정수기 옮겨준 건 고마워.”
-어. 수고.
진작 그렇게 했으면 됐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우는 전화를 끊고 혼자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