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6화 (6/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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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지우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잠을 자는 내내 꿈을 꾸었는데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꿈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런 꿈이었다. 지우는 자기를 깨운 것이 전화벨 소리였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지우씨 되십니까?

처음의 말투는 상냥했다.

"네. 그런데 누구십니까?"

-예. 림스에서 가전제품 구입하셨죠?

"아, 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고객센터에 계속 연락을 했는데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예. 대금 납부를 해 주셔야 하네요.

"예? 아니. 그게 아니라요. 사실은 그 계약에 문제가 많았어요."

-안지우씨. 저희는 물건을 판 곳이랑은 상관이 없습니다. 안지우씨가 계약하실 때 저랑 하셨어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대금을 받으려면 그 계약이 유효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먼저 알아보셔야 하는 거잖아요."

-아니죠.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니죠. 물건은 지금 안지우씨가 가지고 계시잖아요.

"사용도 안 했어요."

-그래도 가지고 계시잖아요. 일단 점유를 시작한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잖아요.

"계약이 정상적인 게 아니었다니까요? 저는 림스의 영업사원이었고 그 계약은."

-그래서요. 계약할 때 안지우씨가 싫다고 하는데 안지우씨 손목을 잡고 강제로 사인을 하게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안지우씨가 안지우씨의 자유 의사로 계약을 한 거잖아요. 그건 엄연히 얘기가 다른 거예요.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분이 법법거리시네. 변호사한테 물어보세요. 변호사라고 사기치는 놈 말고 진짜 변호사한테요. 그러면 돈 내셔야 되는 거라고 알려줄 겁니다.

상대방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여보세요!"

지우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신용불량자 되느니 기일 지켜서 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거 지금 협박입니까?"

-정보 제공이죠. 잘못하시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는 정보 제공요.

"저는 림스의 영업사원이었고요! 그 계약은 서지열 부장이 실적을 우선 맞추자고 해서"

-그건 저하고 상관이 없다고요. 저는 대금 납부에 대해서 안내를 드리려고 전화드린 것 뿐입니다.

"나는 이 계약을 절차에 따라서 취소할 겁니다. 지금까지는 고객센터에서 일부러 피하고 연락을 받지 않는 방법을 쓰기로 한 것 같은데 내용증명을 보내고 변호사를 선임해서 대응할 겁니다."

-그러세요. 잘 해 보십시오. 한 가지만 알려드릴까요? 버틸수록 안지우씨한테만 손해가 갈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말까지 해 줄 필요는 없지만요. 안지우씨가 계약을 취소할 수가 없을 거라는 얘깁니다. 안지우씨가 받은 그 물건은 안지우씨 말대로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안지우씨한테 배송된 물건은 새로 출고가 돼서 나간 게 아니예요. 서지열 부장이 먼저 떠맡아가지고 있던 물건이 안지우씨한테 간 거고 그 물건은 취소나 반품이 불가능한 상탭니다.

"지금, 그게,"

-예. 서지열 부장이 일을 지저분하게 해서 그런 거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실적을 부풀리려고 자기가 계약을 해 놓고 물건을 받아뒀다가 아랫사람들이 계약을 하면 그걸로 밀어내기를 한 겁니다. 결국에는 드러나겠지만 그 전에 날라버릴 생각을 했으니까 걱정이 없었겠죠. 그래놓고 자기는 또 다른 곳에 가서 새로 시작을 할 거고요.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괜히 변호사 선임하네 어쩌네 해서 헛돈 날리게 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겁니다. 변호사 선임비용 육 칠 백이라도 아끼려면 그냥 있는 게 나아요.

“저더러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할 말을 잃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지우가 물었다.

-납부 방식을 5개월 분할 납부로 정하셨군요. 첫 달에 400만원을 내기로 하셨고요. 안지우씨가 그렇게 하기로 정하셨으니까 납부기일이 지나기 전에 대금 지불을 하셔야겠죠.

“4, 4백……요?!”

지우는 갑자기 지점이 사라지는 바람에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우는 방법이 생길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과장과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기가 들은 얘기를 말해 주었다. 과장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래놓고 서지열 부장은 어느 성형외과에서 실장 자리 꿰차고 새로 일 시작했다던데. 주둥이 놀려서 사기쳐 먹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이건가 보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맞을 거야, 아마. 억울하겠지만 일단 그 돈은 내야 될 것 같은데. 알아볼 수 있는대로 더 알아는 봐. 나도 계속 알아보고는 있는데. 하. 별로 낙관적이지는 않아."

세상은 스물 여섯 살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비합리적이고 차가웠다. 그리고 지우는 지금 온몸으로 그 사실을 깨우쳐가는 중이었다.

당장 4백만원을 구해야 하는데 그만한 돈을 빌려달라고 손 벌릴 곳이 마땅치 않았다.

때마침 용하가 전화를 걸어왔다. 돈이 필요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런 저런 쓸데없는 얘기만 하는데 용하가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 있냐? 목소리에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용하가 물었다.

“내 상황 알면서 뭘 물어. 그냥 뻔한 거지.”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다른 건 아니고. 물건을 떠 안았으니까 돈을 내야 되잖아.”

-아아……!

“첫달에 4백만원을 내야 된다는데 돈 들어갈 곳은 많고 월급은 안 나왔고.”

-그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직장 동료들이랑 노동청에 가기로 했어. 월급은 어떻게든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물건 값이 문제다.”

용하는 그 돈이 언제까지 필요한 거냐고 물으면서 자기도 돈을 빌려보겠다고 했지만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사람만 좋았지 능력이 없기는 지우나 용하나 매한가지였다.

지우는 그 후로도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부탁을 했지만 모두들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얘기만 했다. 지우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천기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기정은 지우가 림스로 옮기기 전 잠깐동안 다니던 회사의 사수였다. 지우는 천기정의 목소리를 듣고도 본론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동안 변두리만 찔러대고 있었다.

-시간이 많질 않아서요. 요점을 듣고 싶네요.

천기정이 말했다.

“그게요…….”

-혹시 돈이 필요한 거면 그렇다고 말하면 됩니다.

“네?”

천기정은 급하게 필요한 게 얼마냐고 물었다.

"예?"

지우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지금 회의중인데 잠깐 나온 거라서요. 계좌번호하고, 필요한 금액 문자로 남겨줘요. 회의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는데 한 시간 안에는 입금할게요.

천기정이 말했다.

"대리님."

-그럼 나중에 통화합시다.

닭살 돋는 대화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못할 천기정이었다. 정말로 천기정에게 그런 부탁을 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우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지우는 천기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고 어쩌고 저쩌고 구구절절 적어 보냈지만 그에 대한 답문자는 없었다. 십 오분인가 지나자, 입금했으니 확인 해 보라는 문자 하나가 왔을 뿐이었다. 확인을 해 보니 정말로 입금이 돼 있었다.

천기정도 여유있게 사는 편은 아니었다. 언젠가 회사 회식이 끝나고 술에 떡이 돼 버린 천기정을 택시에 태우고서 그의 집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임대료가 낮다고 알려진 곳의 원룸촌에 허름한 원룸 건물 반지하에 천기정의 작은 방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천기정이 그곳을 벗어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우는 이 돈을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갚아야 한다는 생각과, 다음에는 절대로 천기정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를 믿고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주려는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우는 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수많은 구직 사이트 중에 유독 헌터를 구하는 사이트가 많았다. 헌터는 돈도 잘 벌면서 일자리도 많다는 생각에 부럽고, 동시에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건가 하는 생각, 자기는 왜 헌터가 될 수 없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순서 없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일용직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지우는 재취업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지우는 재취업을 위한 준비를 병행해가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중점적으로 알아보았다. 가끔 개인 시간을 갖고 책을 볼 수도 있는 자리라면 좋을 것 같았다.

지우는 지금까지 살면서 자기가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운이 좋다고 느꼈다. 자기가 찾던 조건과 딱 맞는 자리가 지우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을 때 새로 나타난 글이었고 조회수는 0이었다.

지우가 그 사이트를 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편의점 야간 알바를 구한다는 글이 새로 올라왔던 것이다. 지우는 사장의 휴대전화로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것 저것 재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 갈까봐서 걱정이 됐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인광고 올리신 거 보고 전화드리는 건데요. 혹시 아직 사람을 못 구하셨으면 지원을 해 보고 싶어서요.”

-아이구, 깜짝야. 올린지 십 초도 안 됐는데요?”

상대는 정말로 이렇게까지 빨리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딱 접속을 해 있는데 글이 올라오더라고요.”

-운이 좋으시네요. 인연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그럼. 내일 면접을 볼까요?

“내일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올 때 이력서 준비해서 가지고 와요.

목소리를 들어봤을 때 사장은 삼십 대 중반 정도나 되는 것 같았다. 그는 편의점의 위치와 면접 시간을 자세히 알려주면서 내일 보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장은 지우가 림스의 영업사원이었다는 말을 듣고 장사를 잘 하겠다고 했다. 그런 물건을 사도록 설득하는 게 일이었으니 이 일은 껌일 거라는 거였다.

지우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자기가 주간, 야간 알바를 전부 하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일하다가는 죽어요. 젊을 때는 모르지만 나이 든 다음에 골골 거리게 되고요."

사장도 그런 말을 할 만큼 나이를 많이 먹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반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가 지금 상황이 별로 안 좋아서요.”

"그럼 이렇게 하죠. 세 시간 정도 파트 타임으로 일할 사람을 구할 테니까 세 시간은 쉬어요. 사람은 미래의 자신한테 책임을 져야 되는 거거든요. 지금 몸을 혹사시켜버리면 미래의 안지우씨한테 원망을 많이 들을 겁니다. 세 시간을 뺀다고 하더라도 안지우씨는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지우는 한시름을 놓으며 인사를 했다.

***

편의점에서 임시로 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지우는 사람들의 얼굴을 잘 외우는 편이었고 한 번 왔던 사람을 기억해뒀다가 친밀하게 인사를 건네는 방법으로 단골을 확보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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