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부터 레벨업-3화 (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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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인아는 백화점 내부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우가 백화점에 거의 도착할 즈음 인아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디냐고 묻자 카페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카페에 계속 있으려고?”

지우가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얘기도 좀 해야지.

“오늘 시간 얼마나 되는데?”

-두 시간쯤?”

인아가 말했다.

“그럼 걷자. 답답한 데 앉아서 시간 보내지 말고.”

인아는 말이 없었다.

‘뭐야. 내가 한 말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또 입을 다무는 거지?’

인아는 지우가 처음 사귄 여자였다. 인아를 사귀면서 느낀 건, 연애를 하면 행복한 시간보다는 기 싸움으로 소모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는 거였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그걸 말로 해 주면 좋을 텐데 절대로 말을 해 주지는 않으면서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는 거냐고 화를 냈다. 지우는 인아가 자기랑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인아가 꼭 필요할 때가 있었고, 인아도 지우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만남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인아는 흰색 셔츠 같은 존재다. 지우는 절대로 흰색 셔츠를 좋아하지 않지만, 갑자기 흰색 셔츠를 입어야 하는 날이 생긴다. 부서별 장기자랑을 할 때나 갑자기 봉사활동을 가야 할 때, 당연히 흰색 셔츠는 하나씩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복장을 정하는 사람들 때문에 난감해지지 않으려면 좋아하지 않아도 갖추고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백화점 앞으로 갈게. 거기에서 10분 후에 보는 걸로 하자.”

지우가 말을 하자 인아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아우, 씨발!’

인아하고는 안 맞는 게 굉장히 많다. 다른 때라면 받아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지우에게는 그럴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데이트를 하는 장소만 해도 그렇다. 우중충하고 답답한 실내에서 음료수 한 잔씩을 시켜놓고 고사 지내듯이 몇 시간이고 앉아서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가끔 할 말이 생각나면 얘기를 하는 식이다. 그러면 앉아있는 동안 서너 번은 지우가 먼저, ‘답답한데 이제 일어나자.’ 라고 말을 했고 인아는 화가 난 표정을 짓고 가방을 휙 들고 일어서서 나가곤 했다.

‘그래도 아직 헤어지지 않고 150일 기념일을 맞게 됐으니까 뭔가 선물을 해 주기는 해야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우는 선물로 뭐가 적당할지 고민을 했다.

직장을 잃은 남자와, 직장과 여친을 같이 잃은 남자 중에 우선은 앞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지금 이별을 한다면 정신적인 충격이 클 것 같았다. 인아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한 번에 두 계단을 내려갔다는 사실로 인한 불안감을 견디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백화점에 가는 길에 헌터 장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장인 ‘익스트림 헌터’가 있었다. 도로에서도 쉽게 구경할 수 없는 최고급 세단들이 매장의 주차장으로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진짜 간지나네.”

지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매장에는 헌터들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업체측에서는 실수요자가 아닌 사람들을 안으로 들여봤자 불필요한 문제만 생길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매장 안에 비치된 물건들 자체가 하나같이 다 엄청난 고가의 제품들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익스트림 헌터’ 매장 밖에는 헌터의 상징인 헌터 타투가 그려져 있었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만 18세가 되는 해의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헌터 테스트를 의무적으로 받아야했다. 테스트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행강제금이 부과되었다. 많은 헌터를 보유하는 것이 국가의 경쟁력으로 인식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정부는 헌터의 수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차례의 시행 착오 끝에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된 테스트 방법은 늪에 오른 팔을 담그는 거였다. 헌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늪에 팔을 담그면 그들의 차크라가 늪의 특수한 물질과 반응을 보이며 팔에 타투가 나타났다. 늪에 팔을 집어 넣었다가 뺐을 때 검은 타투가 생기면 그 사람은 헌터의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테스트를 받은 사람에게는 초기 등급인 ‘F’ 표시와 딜러나 탱커라는 직업, 그리고 능력치가 타투로 표시되었고, 늪에서 얻어진 타투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스스로 수치가 변화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물 여섯 살의 지우의 오른팔은 아직까지 깨끗하기만 했다. 한 번의 테스트에서 타투가 발현되지 않았다면 끝이다. 만 18세까지 차크라 운용능력이 나타나지 않다가 뒤늦게 각성되는 헌터라는 존재는 없었다. 늪에 팔을 담갔다가 빼는 순간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이다. 헌터와 일반인. 한쪽은 타투와 부와 명성을 얻고, 타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이마에는 루저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새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우는 ‘익스트림 헌터’의 외관을 넋놓고 구경하다가 인아와의 약속 시간에 늦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뛰어갔다.

인아는 약속 장소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지우가 헉헉 거리면서 달려가 인아의 앞에서 멈추자 인아는 짜증섞인 표정을 지었다.

“차 안 가져왔어?”

인아가 물었다.

“볼 일이 있어서 밖에 나와 있었거든.”

어쨌거나 자기가 조금 늦기도 했고 별 것 아닌 일로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지우는 인아의 어깨를 감싸고 달래주었다.

“나. 이번 기념일 기대해도 돼?”

인아가 물었다.

“응?”

“내 친구들은 남자친구들이 돈을 잘 번단 말이야. 그래서 꼭 기념일이 아니라도 선물을 덥석 덥석 안기던데.”

“그래서. 그런 애들 보면 부러워?”

“부럽지. 당연한 거잖아.”

“뭘 갖고 싶은데?”

지우가 물었다.

뭘 갖고 싶냐는 거지, 말만 하면 다 사주겠다는 건 아닌데도 즉각 인아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왜? 말하면 사 줄 거야?”

“그동안 많이 사 주지는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사 줄 수도 있지.”

지우는 최대한 완곡하게 말했다.

“정말? 사실은 나,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게 있었거든.”

“그걸 이 백화점에서 파나보지?”

“응.”

“그래. 일단 들어가서 보자. 뭔지.”

“진짜 사 줄 거야? 우와, 나 자랑해야지.”

“우선은 보고.”

“그래도 사 줄 거지?”

“가서 먼저 보자고.”

확답을 받고 싶은 김인아와, 확답만큼은 피해야 하는 지우 사이에 신경전이 펼쳐졌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각 층간에 이어지는 거리가 꽤 되어서,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지루한 감이 있었다. 지우가 비스듬히 옆으로 몸을 기대고 서 있는데 아래에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오른 팔에 헌터의 타투가 있었다. 어깨와 팔에 근육이 꽉 잡혀 있었고 타이트한 셔츠가 다부진 몸 때문에 터질 것처럼 보였다.

‘우와!’

지우는 교차해서 이동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목을 길게 빼면서 타투가 새겨진 팔을 구경했다. 헌터는 그냥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간지가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는 헌터이려나? 레이드를 하는 헌턴가? 원거리 딜러로 뛰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 달에 1억 정도를 번다고 했던가?’

지우는 부러운 생각이 들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동안 인아는 지우의 곁에 딱 붙어선 채로 조잘대고 있었다. 인아가 하는 말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친구 누구가 남자친구한테서 어떤 브랜드의 가방을 선물 받았다느니, 선물 받은 가방이 얼마짜린지 알아보려고 인터넷으로 가격 검색을 해 봤더니 600만원이 조금 넘는 거였다느니 그런 말을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아야.”

“어?”

“사실 오빠가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오빠 회사에서.”

“일단 그 얘기는 쇼핑 끝나고 하자.”

“왜?”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 같아서.”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물으려다가 지우는 그냥 입을 닫아버렸다. 인아는 곧장 구두 매장으로 향했고 자기가 봐 두었다는 코너로 직행했다.

“내 친구 중에 결혼을 일찍 한 애가 있거든, 오빠. 걔는 스무 살에 결혼을 하고 학교에 다니는 중인데 자기가 2백만원대 가방을 시어머니한테 선물을 했다가 혼났다고 그러더라?”

“왜? 사치한다고?”

“아니. 그런 걸 사려면 그냥 빈손으로 오라고 하더래. 걔네 시어머니는 500만원짜리 밑으로는 들지를 않는대.”

“미쳤군.”

“어머, 오빠.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나는 이해돼. 여자한테는 그런 물건들이 필요해.”

“미리 말하는데. 네가 사달라는 게 그런 거라면 나는 못 사 줘. 안 사 줄 거고.”

“그 정도는 아니야.”

전략이었는지.

초반에 500만원이니 200만원이니 하는 말을 듣다가 89만원짜리 펌프스를 보자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선뜻 내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지우가 펌프스를 계산 하려고 카운터로 가는데 에스컬레이터에서 봤던 남자가 먼저 그 위에 물건들을 올리는 게 보였다. 한 눈에 봐도 좋아보이기는 했다.

인아가 고른 구두만 놓고 봤을 때는 그것도 좋아보였는데 지금 카운터 위에 올라가 계산을 기다리는 구두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자가 골라온 구두는 이제 신데렐라가 와서 발을 집어넣기만 하면 될 것처럼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매력적이었다.

“어머, 헌터신가 봐요.”

점원이 구두를 케이스에 넣으면서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대우를 해 주었다.

“네.”

남자는 쿨하게 대꾸했다.

“여자 구두 보시는 안목이 대단하신데요?”

“어머니가 이 브랜드 제품만 신어서요. 신어보지 않아도 어떻게 나오는지도 다 알고. 이 브랜드 제품이 발이 편하대요.”

“자상한 아들 두셔서 어머님이 좋으시겠어요.”

“자주 찾아가 뵙지도 못하니까 그냥 이런 걸로나 챙기는 거죠, 뭘.”

“어머, 정말 좋으시겠어요. 부러워요.”

“아니예요. 잘 하는 것도 없어요.”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대충 계산해 주고 끝낼 것이지, 점원은 뭐가 그렇게 아쉬움이 남는지 얘기를 어떻게든 이어가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470만원이네요. 헌터 카드로 계산하실 거죠?”

“네.”

남자는 헌터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로 하실 거죠?”

“네? 네. 그럼 당연히 일시불이죠. 하하하.”

‘그게 뭐가 웃긴다는 거지?’

뒤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지우의 인내심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길 바라겠습니다.”

드디어 지우가 계산할 차례가 됐는데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이건 여기에 두고 다른 물건들 좀 더 봐도 되죠?”

“네? 네. 그러세요. 신상품 들어온 게 많아서 천천히 보시면 마음에 드는 걸 더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안 그래도 나가려다 보니까 괜찮아 보이는 게 있어서요.”

남자는 쇼핑백을 카운터 위에 올리고 매장을 둘러보았다. 지우도 인아가 골랐던 구두를 카운터 위에 올렸다.

“됐어……”

인아가 갑자기 말했다.

“어?”

지우가 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 산다고.”

“오래전부터 봐 뒀던 거라며.”

“아, 그냥. 됐다고.”

“왜 그러는 건데? 뭐가 잘못 돼서 그러는 거야?”

지우도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와서 소리를 제법 크게 질렀다. 인아는 갑자기 지우가 화를 내자 그 기세에 눌려 움찔했다.

“알았어. 사려면 사.”

인아가 말했다. 자기가 크게 양보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사려면 사? 내가 신으려고 사는 거냐? 나 좋자고 사는 거야?”

“하아아, 진짜! 알았어. 알았으니까 사 줘.”

‘날이 일찍 더워지더니 이게 미쳤나!’

지우가 인아를 노려보는데 인아는 그 시선을 피한 채로 점원에게 말했다.

“이거 살 거니까 포장해 주세요.”

“네. 89만원입니다. 계산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일시불로요? 아니면.”

“6개월 할부로요.”

지우가 말했다.

“네. 그렇게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인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아예 얼굴에서 김이라도 날 것 같았다.

김인아를 마법에 걸리게 만든 말이 '할부'라는 단어였다는 것을 지우는 한참만에 깨달았다.

이게 미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가 카드와 쇼핑백을 받아들자 인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나가버렸다. 지우가 인아를 쫓아갔다.

“김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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