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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프롤로그
1995년.
세계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늪이 나타났다.
기존에 자연상태에서 만들어지던 늪과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외형적인 유사성 때문에 그것을 늪이라고 불렀다.
늪이 처음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정보를 갖지 못한 채 그들은 다가오는 위협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작은 수렁 정도의 크기였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반경을 넓혀갔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0.5센티미터씩 반경이 늘어난다는 것과 늪의 반경이 3미터에 달할 때 늪이 개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늪이 처음 나타나고 계속해서 성장을 하다 반경이 3미터에 달했을 때, 늪의 아래에서 서식하고 있던 괴수가 튀어나왔다. 괴수의 크기가 늪의 반경보다 훨씬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괴수가 나오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괴수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괴수의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괴수의 서식지가 늪이라는 사실과, 늪이 생성된 이후로 매일 0.5센티씩 자란다는 사실, 그리고 반경이 일정길이에 달했을 때 괴수가 출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사람들은 한동안 괴수를 처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군이 동원되고 현대식 무기가 투입되어도 괴수는 그 앞에서 강력하기만 했다.
그리고.
절망한 인류 앞에 헌터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차크라 운용능력을 가진 그들은 차크라를 흘려넣은 무기로 괴수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가 있었다. 현대무기로 중무장한 군대가 한 시간 동안 집중포화를 해서 괴수에게 10의 데미지를 입힌다면 차크라 운용능력을 가진 헌터는 딜러의 경우 그 등급에 따라서 한 번의 공격으로 50에서 1200의 데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늪과 괴수가 지구상에 나타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괴수와 공존하고 있었다.
늪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늪 안에 어떤 괴수가 살고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늪에서 서식하는 괴수의 위험도에 따라서 늪의 테두리가 다른 색을 띠었다. 늪이 나타난 초기에는 늪의 테두리 색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결국 늪의 테두리 색깔과 늪 안에 서식하는 괴수의 체력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괴수의 체력에 따라서 편의상 1급에서 5급까지의 다섯 등급으로 괴수가 분류되었다. 가장 체력이 약한 5급 괴수가 서식하는 늪은 그 테두리가 암갈색을 띠며 4급은 암적색, 3급은 보라색, 2급은 흰색을 띠었다. 그리고 2025년 기준으로 가장 강력한 괴수가 서식하는 늪인 1급 늪의 경우에는 그 테두리가 암녹색을 띠었다.
괴수가 나타난지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레이드가 이루어지고 헌터들이 괴수를 공략했지만 아직까지 1급 늪에 대한 공략은 성공한 전례가 없었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한 1급 늪이 반경 3미터에 이르면 괴수가 뛰쳐나올 거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1급 늪의 경우 다른 늪과 달리 늪의 반경이 커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1급 늪은, 헌터들이 들어가 괴수를 공략할 수는 있지만 괴수가 튀어나오는 일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괴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괴수의 출현이 인류에게 재앙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헌터들은 괴수의 사체에서 경도가 낮은 광석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일정한 온도에 달했을 때 연소되는 그 물질은 러프 스톤이라고 불렸다. 연구가 거듭됨에 따라 사람들은 러프 스톤이 에너지원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석연료의 고갈로 신재생에너지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러프 스톤은 고효율의 친환경 에너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 정부에서 러프 스톤의 응용 기술 연구에 인력을 대거 투입하고, 러프 스톤의 실용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면서 러프 스톤은 마침내 화석 연료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었다.
러프 스톤이 활용되는 영역과 수요가 증가하자 러프 스톤의 가격은 점점 올랐다. 괴수의 등급에 따라서 러프 스톤의 가격도 각각 달라졌다. 5등급 괴수의 사체에서 나오는 러프 스톤의 경우 그 가격이 1억이었고 4급의 경우 5억, 3급이 20억, 2급은 50억에 그 매매 가격이 형성되었다. 1급의 괴수에게서 나온 러프 스톤의 가격이 얼마 정도에 형성될지는 의견만 나오고 있을 뿐, 아직까지 1급 괴수를 사냥한 적은 없어서 1급 괴수의 러프 스톤이 정확한 가격은 알 수가 없었다.
괴수의 러프 스톤도 돈이 되었지만 괴수의 사체가 쓰이는 곳은 훨씬 더 광범위했다. 괴수의 장기에는 인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여러 종류의 특이물질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물질의 발견으로 의학계에는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괴수의 장기 덕택에 이전까지 난치나 불치로 분류되었던 질병에 치료의 길이 열렸다.
헌터들에게 가장 유용한 것은 괴수의 가죽과 뼈였다. 괴수의 가죽에는 괴수의 공격을 막아내는 특수한 성질이 있어 헌터의 보호장구를 제작하는데 사용되었고 괴수의 뼈를 사용해 만든 장비와 무기는 헌터의 공격력을 증폭시켜 주었다. 괴수의 사체는 부식과 노후화를 더디게 하는 성질 때문에 건설 현장에서 사용되기도 했고 가전제품을 만드는데도 괴수의 사체가 사용되는 등 그 쓰임새는 무궁무진했다.
현대 사회에 더이상 괴수가 출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그러한 가정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
유난히 더위가 일찍 찾아온 듯했다.
림스의 영업사원 안지우는 가방과 브로슈어를 무기처럼 다시 한 번 살피고 통유리 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서 최종점검을 마쳤다.
'완벽해! 할 수 있어. 안지우. 세상은 네 밥이다.'
아직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더 많은 지우였다.
남의 매장 통유리 벽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는 동안 매장 안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지우는 제 차림을 꼼꼼하게 살폈다. 이 정도면 믿음을 줄 수 있는 전문가의 모습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넥타이만 한 번 다시 만져 바르게 했다.
인상도 좋고 호남형에, 고객들 사이에서 평도 좋고 훈남이라는 평가를 받는 외모였다.
지우는 오늘 방문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헤어샵으로 가서 안을 둘러보다가 손님이 없이 한산한 것을 보고 밖에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헤어 디자이너 세 사람이 동시에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여기로 앉으세요. 머리는 어떤 스타일로 해 드릴까요? 생각하고 계신 머리 모양이 있으세요?”
그런 대접을 받을 때마다 지우는 괜히 자기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손님이 없이 한산하던 매장에 드디어 손님이 왔다고 생각하면서 반가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등장이 꼭 배신행위인 것 같이 여겨졌다. 자신감을 갖자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지만 5초도 안 지나서 최면이 풀려버리는 것 같다.
“그게 아니고요. 머리를 할 때가 되면 꼭 여기로 올게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주식회사 림스의 영업사원입니다. 림스의 여러 가지 좋은 전자제품을 홍보하려고 나온 건데요. 림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셨죠? 혹시 림스 제품 사용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우가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리 준비되었던 멘트를 읊조렸다. 그러자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에 물을 부어서 끄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아. 난 또."
손님인 줄 알았다가 김이 샜다는 표정을 짓고 디자이너들이 몸에서 긴장을 뺐다. 그래도 관심을 보이기는 했다. 지우의 얼굴이 섭섭하게 생겼으면 싸늘한 대우를 받고 쫓겨날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지우의 얼굴이 열심히 지우를 돕고 있었다.
지우는 브로슈어를 보여주면서 림스의 전자제품들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림스는 업계 3위의 기업으로 꾸준히 점유율을 높이면서 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림스의 제품을 사용하고 계신데요. 이번에 저희 림스에서 나온 신제품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요즘에 광고를 하고 있는데."
"아아, 신지민이 광고하는 거? 본 것 같긴 해요."
막내로 보이는 여자가 다행히 호응을 해 주었다.
"아, 그거? 그게 림스 꺼야? 근데 사람들이 림스는 가전제품을 잘 못 만든다고 하던데."
원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말했다.
지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가나 저렇게 초를 치는 사람이 존재했다.
"림스가. 가전제품은 좀 그렇지. 가전제품을 살 거면 해경이 낫고."
태클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이번에 나온 건 디자인이 마음에 들던데."
"해경에서도 이번에 신제품 나왔어. 임정이 광고하는 거 있잖아. 나는 임정이 광고하는 건 일단 다 좋더라."
림스에 대해서 좋은 얘기가 나오면 '이때다'하고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 소비자의 마음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지우가 입을 열 틈도 없이 번번이 얄미운 수비수에게 막혀버리고 말았다.
지우는 림스의 제품에 대한 얘기 중이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느닷없이 임정에 대한 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다시 본론으로 끌고오려고 애를 먹었다.
"림스도 임정 써요. 광고 모델로. 신뢰가 가잖아요. 하긴. 임정이 림스 제품은 광고를 안 해 주려나? 임정은 업계 1위 제품들 광고 찍기도 바쁠 테니까. 임정은 전생에 나라를 몇 개를 구했을까? 능력있는 탱커에 얼굴도 예쁘고 몸매는 여자가 봐도 침 흘릴 정도고."
"그렇죠. 저희도 임정씨를 광고 모델로 쓰고 싶죠. 하지만 림스는 제품의 성능으로 승부를."
지우의 말은 단번에 가로막혔다.
"림스가 제품의 성능으로 승부를 봐요? 그건 웃기는 얘기죠."
한 사람의 마음이 기울면 다른 사람이 초를 치는 식으로 해서 결국 두 시간 가까이 시간만 허비하고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지우는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곳을 나오면서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전략의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이 없었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면서 지우는, 다음에 원장이 보이지 않을 때 한 번 더 방문을 해서 공략을 다시 해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성사되지 않을 계약에 진을 빼고 나면 사무실로 돌아갈 힘조차 남지 않는다. 그래도 쓰러지지는 않고 어찌어찌 사무실에 돌아가자 그 날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동료들이 먼저 와서 업무일지를 쓰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뭐 좀 건졌어?"
옆 자리의 동료 이상민이 물었다.
"아니. 관심있는 척 하면서 이것 저것 물어보고 샘플 없냐고 물어보더라고. 우리가 화장품 파나? 샘플은 왜 찾아? 구매하면 서비스는 잘 해 주겠다고 했더니 서비스는 뭘 주냐고 실컷 물어놓고 결국에는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하겠다는 거지."
지우는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해 놓고 그쪽은 상황이 어떠냐고 턱짓으로 물었다.
"나도 비슷했어. 림스는 가전제품 쪽에서는 좀 딸리지 않냐는 말도 나오고. 그냥 림스가 잘 하는 쪽이나 주력하면 좋겠다고 하더라. 어쩌라고? 영업사원한테 그런 주문을 한다고 물건이 달라지나?"
"우리 물건이 많이 달리긴 하지. 나라도 누가 가전 제품 추천해 달라고 하면 림스꺼 쓰라고는 말 못 해. 만약에 우리 식구들이 가전제품 산다고 하면 나는 림스꺼는 절대로 쓰지 말라고 하거든. 차라리 해경꺼 쓰라고 하지."
지우가 말을 하고 힘없이 웃었다. 경쟁력 없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영업사원만큼 서글픈 인생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나이 늙어서 은퇴한 창녀가 자기 몸을 팔아도 우리보다는 당당할 거야."
생각난 김에 지우가 한 마디를 했더니 이상민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 부장님 앞에서는 하지 마라."
이상민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부장님도 아마 해경꺼 쓸 걸?"
지우가, 정말 그러지 않을까?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장님뿐이겠냐? 아마 림스 임직원 집을 불시에 방문하면 전부 다 해경꺼 쓰고 있을 걸?"
"내 말이 그 말이야. 나는 영업능력이 나쁜 편이 아닌데 줄을 잘못 서서 맨날 물 먹는 것 같아."
지우가 죽는 소리를 했다.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럼 애초에 해경에 들어가시지."
"거긴 문이 너무 좁잖아. 여기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해경 들어가는 건 불가능이었고."
"다 같은 운명이지. 이 패배자야. 림스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패배자라는 뜻인 거야. 애초에 능력이 됐으면 해경에 들어가면 되는 거였고. 어차피 림스에 들어온 거. 이제 뭘 어쩌겠냐? 버텨야지. 호구가 걸리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영업을 다녀야 되는 거고."
몇 마디 실없는 소리를 더 해대다가 지우도 업무일지를 썼다. 몇 군데를 방문했고 잠재고객은 몇 명 정도고 재방문으로 공략 가능한 곳이 몇 군덴지 과장을 섞어서 적어 넣었다.
그때 부장이 지우를 불렀다.
“안지우씨. 업무일지 다 쓰면 잠깐 내 방으로 와요.”
“예, 부장님.”
무슨 일인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힌트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누가 알아?"
이상민이 말했다.
지우는 어떤 정보도 미리 얻지 못하고 부장실에 들어갔다.
“앉아요.”
서지열 부장은 지우에게 자리를 권하고 기록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안지우씨 실적이 최하위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자고 부른 건 아니고. 석 달 동안 계약 건수가 열 건도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듣고 싶어서 부른 겁니다.”
“그게…….”
“초반에는 제법 잘 했는데 그러네요? 슬럼프에 빠지기라도 한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문제는 림스에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제품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부장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사람들은 림스가 경쟁력에서 뒤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고 에너지 효율이나 내구성이나 디자인이나, 어떤 한 부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곤 했다. 안지우씨같은 성실한 사람이 하필 림스의 영업 사원이어서 난감하다는 말도 했다. 지우가 해경의 영업사원이기만 했다면 실적은 원없이 올려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 부서에 할당된 게 있어요. 그동안은 다른 직원들이 안지우씨가 못한 부분을 채워왔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달보다 훨씬 더 안 좋아요. 10일 마감이 코앞인데 다른 달의 50퍼센트도 채우지 못하고 있어요.”
10일 마감, 20일 마감, 30일 마감이라고 해서 매달 10일, 20일, 30일에 마감을 쳤다. 아직 말일까지는 많이 남았다고 하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는 일이 없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그냥 목을 조이려고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안지우씨?"
“예…….”
“지인들 없어요? 친척이나.”
“그게…….”
입사했을 때 계약을 뽑아먹을만큼 뽑아먹어서 다시 부탁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지우가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축하해 주던 사람들은 크든 작든 림스의 제품을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림스의 제품은 그다지 만족도가 높지 않았고 지우에게는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게 늘 고역으로 느껴졌다.
제품이 고장 났는데 고객센터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1년도 안 된 제품의 A/S에도 따로 비용을 받고 출장비가 다른 데보다도 월등히 많아서 기분이 나빴다는 등의 불평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지인에게 팔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지우가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부장이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인맥이 없으면 안지우씨가 사도 되는 거잖아요? 안지우씨도 결혼을 하면 그런 게 전부 다 필요할 거고. 나중에 살 거, 미리 사 놓으면 지금부터 편하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부장님.”
지우가 부장을 바라보았다.
“왜요? 림스 영업사원이 림스 제품에 만족을 못한다는 겁니까?”
부장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선수를 쳤다.
“…….”
“10일 마감을 어떻게 맞출 건지 보고서를 써서 회의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번에는 안지우씨가 한 번 해 주면 좋겠어요. 그 정도 마음가짐은 돼야 하지 않나?”
“…….”
“안지우씨?”
“알겠습니다.”
“세탁기하고 벽걸이 TV 하나씩 하는 걸로 합시다.”
지우는 별 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부장실을 나왔다.
마감이란 그런 것이다. 마감을 쳤다고 후련해 할 사이도 없이 다음 마감이 돌아온다. 한 달에 10일, 20일, 30일, 그렇게 딱 삼일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어떻게든 마감을 쳤다고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였고 곧바로 20일 마감이 다가왔다. 그때까지 지우는 한 건의 신규 계약도 뽑아 놓지 못한 상태였다.
지우의 동료들은 림스 제품이 어떻네, 사람들이 어떻네,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두 세 건은 계약을 뽑아냈다. 같이 노는 것 같아도 실적들은 귀신같이 뽑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파는데 자기만 죽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건 제품 탓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잘 해 보자고 마음을 다잡아도 지우의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20일 마감 때도 부장은 지우를 불렀다.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잠깐씩 만드는 침묵도 다 대본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부장실을 나오기 전, 지우는 냉장고와 고가의 오븐, 거기에 에어컨까지 떠안았다. 그 달의 실적은 수월하게 채웠지만 대금을 갚아나갈 생각에 눈 앞이 까마득해졌다. 그래도 동료들은, 기본 수당 나오는 걸로 어떻게든 막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지우를 격려했다.
지우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 부장의 압력에 수긍을 하고 굴복을 해 왔던 거였다.
회사가 먹튀를 할 거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림스의 영업소와 지점들이 정리될 거라는 말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뜬소문이라고 확인이 되었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나돈지 6개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정리된 영업소와 지점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아서 방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출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안지우씨. 어디예요?”
과장이었다. 과장급까지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전혀 전달받지 못한 듯했다.
“출근하려고요.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세요, 과장님?”
지우가 물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고!”
지점이 폐쇄됐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한 채 지우는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 앞에는 지우의 동료들이 서 있었다. 굳게 잠겨있는 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고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서.
나중에는 건물의 경비원이 올라왔다. 임대료가 석 달째 체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비원을 통해서야 들을 수 있었다. 지우의 얼굴은 흑빛으로 변해갔다. 지우처럼 물건을 떠안은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부장은 튀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한 건을 하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야무지게도 해 처 먹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