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143 >
일전에 르쉬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며 잡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닭꼬치를 한 입에 쏙 빼먹은 붉은 머리의 흡혈귀가 물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음? 그게 뭐냐?”
“월드의 신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진이 씩 웃었다.
자신도 많이 고민한 주제다.
가만히 주점의 천장을 바라보던 우진이 답했다.
“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 월드라는 세계의 신적 존재는,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조깅을 한 뒤 씻고 출근해서 정확히 저녁 6시에 퇴근하는 놈일 것 같다고.”
그가 맥주를 한 모금에 털어넣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마 퇴근 후에는 헬스장도 갈 거야. 그리고 집에 와서는 외국어 공부를 하겠지.”
당황한 르쉬가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뜻인지요...?”
“어... 대단한 놈이라고. 그런데 재미는 없고. 규칙적이고. 정확하고. 딱딱하고.”
“그건 좋은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우진이 빙긋 웃었다.
“불합리하진 않으니까.”
월드의 신은 방관자에 가깝다.
<어... 생각해보니 그건 안 돼.>
이런 식은 없다.
그냥 되게 해놓은 것은 된다.
또 월드의 주민이 색다른 방법을 찾으면 내버려둔다.
그렇기에.
우진의 머릿속에 신적 존재는 그냥 컴퓨터의 ‘본체’ 같은 놈이다.
사용자가 보는 건 모니터지, 그 뒤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전자 회로의 움직임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
뭔가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누군가가 해주고 있는데, 그게 신인 것.
그 정도면 충분하고, 더 생각하기도 머리 아팠다.
그러다 실제로 그들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관리자는 월드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는 태초의 의지다.>
지구식 이론으로 치자면...
우주를 최초로 탄생시킨 빅뱅.
그 이후의 여파로 남은 힘.
그걸 설계, 유지, 보수하며 관리하는 것이다.
또한.
<관리자는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고, 보통 수십 명이라 알려져 있지. 각자 하나의 의지에서 출발했지만 서로 다른 의식을 지녀 상호 보완하는 유기체라고 보면 된다.>
선두의 강자들은 실제로 관리자를 본 적도 있고, 관리자와 만난 자들과 얘기를 나눠본 경험도 있었다.
물론 월드의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직접 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보다 분명한 설명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우진은 이렇게 생각했다.
‘진짜 이름값 하는 녀석들이네.’
월드라는 곳을 설계, 유지, 보수하는 개미 같은 일꾼들.
관리자.
지배하지 않고 봉사한다.
그게 월드의 ‘신(神)’이었다.
권한은 무궁하지만 써야 할 곳에만 쓰는 존재들.
얘기를 들려주자 르쉬가 감탄했다.
“와아! 그런 걸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우진이 겸연쩍게 웃었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놈들이랑 같은 파티에 속해 있으면 신기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거든.”
그러자 감탄하는 르쉬.
“아하! 지금 저처럼 말입니까?”
잠시 멍하던 우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음? 하하하....”
그러고보니 르쉬가 보는 자신은, 전생에 자신이 보았던 엄청난 강자들과 비슷한 느낌이리라.
그래도 다른 점은 있다.
자신은 르쉬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
— 후우웅!
그가 현실 속에서 불어오는 북극의 바람을 느꼈다.
— 기기기긱.......
관리자의 기이한 목소리가 우진의 귀를 파고들었다.
“우진. 너를 만나러 왔다.”
우진이 자신 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관리자였다.
정확히는 관리자들 중 하나였다.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 하니 저 녀석이 아니라 다른 누가 왔어도 외양은 동일했을 것이다.
실제로 보니 고압적으로 취조하는 듯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신이란 이름을 가진 것치고는 상당히 인간스러운 점이 있었다.
‘사실 내가 지금 벌인 일에 비하면 아주 온건한 모습이지.’
그는 신수를 셋이나 죽였다.
사신수는 애초에 중심부의 수호자 격으로 창조된 존재들.
그걸 다 때려잡고 다녔으니 관리자가 나타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우진이 먼저 물었다.
“내가 현무를 죽여서 그런 건가? 그래서 관리자가 개입한 거야?”
그러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다른 신수는 몰라도 현무는 특별하거든.”
“특별하다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관리자가 말했다.
“현무는 애초에 자아가 없이 만들어졌다. 너와 같은 존재를 제어하기 위한 무기인 셈이지.”
“나와 같은 존재라면.”
관리자의 기운에 묘한 감정이 어렸다.
그건 경계심을 아주 희석시킨 미미한 감정이었다.
“이질적일 정도로 강한 존재들. 월드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우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내가 그 제어 장치를 죽여버렸군. 이제 날 무엇으로 제어할 생각이지?”
우진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진의 깊은 눈동자.
그 너머의 모든 힘을 확인한 관리자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우진을 보며 ‘충격’에 잠겼다.
‘이게... 이게 진짜로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상대에게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했다.
그러나 일부였다.
설계자라고 해도 모든 에러, 컴퓨터로 치면 버그를 파악할 순 없었으니까.
그러나.
하나는 확실하다.
‘품고 있는 영혼의 힘 자체가 다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의기(意氣).
완벽한 의지와 그걸 실행하는 결단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그의 성장 과정에 어딘가 특이한 점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게 보통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든 여정이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모든 걸 버텨내고 접근하고 있다.
월드의 역사에 아로새겨질 위업.
‘고금(古今) 최강’이란 자리에 말이다.
마침내 관리자가 말했다.
“월드의 주민은 모두 공평하게... 모든 기회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신수를 죽이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지. 또한 신수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말라는 규칙 또한 없었다.”
아무 말도 없자 관리자가 다시 말했다.
“모두 네 힘으로 이뤄낸 것이니 네 것이다.”
“당연한 걸 선심 쓰듯이 말하는군.”
마침내 입을 연 우진에게 관리자가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난... 다만 상황을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이게 내 일이니 이해해라. 네 힘은 월드의 오랜 역사에서도 처음 보는 독보적인 것. 너라면 정말로....”
뭔가를 말하려던 관리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관리자의 목소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처음의 고압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마치 대등한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결국 우진을 인정한 것이다.
“넌 아주 신비한 존재이니 특별히 하나의 정보를 주지.”
“정보?”
우진이 묻자 관리자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이 오고 있다.”
그리고 관리자가 사라졌다.
순간 무언가를 느낀 우진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서부터 거대한 힘의 기류가 접근하고 있었다.
천둥번개가 치고 어두운 하늘이 일렁였다.
상황을 알아차린 우진이 씩 웃었다.
“그렇군. 놈이군.”
구름이 낀 하늘에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동방(東方)의 저 먼 곳.
기암괴석이 가득한 신비한 계곡에 살고 있을 마지막 신수.
— 콰르르릉!
안개 자욱한 상공.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존재.
청룡(靑龍)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우우우웅.......
하늘에서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삼신수(三神獸)를 모두 죽인 존재더냐.>
폭풍의 한 가운데서 우진이 당당하게 답했다.
“그렇다.”
그러자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청룡이 말했다.
<내가 너를 벌하겠다.>
“무슨 권리로.... 아니다. 이해는 가는군.”
가족 셋을 죽인 놈을 벌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신수에게 인간과 같은 관념을 기대할 순 없다.
그래도 놈과 연결된 다른 존재가 다 죽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다 죽였다.
놈이 분노하여 우진을 적대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래... 너도 얌전히 죽음을 기다릴 순 없겠지.’
표면적으로 무슨 이유를 제시해도 상관없다.
놈은 죽기 전에 죽이러 온 거다.
우진으로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청룡의 능력은 ‘공간(空間)’.
이 먼 곳까지 순식간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능력 덕분이다.
‘공간 능력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롭지.’
하지만 괜찮다.
자신은 우진이니까.
현무와의 싸움이 막 끝난 상황.
일반적인 모험가라면 더욱 강한 적을 마주하게 되어 절망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극강의 회복 능력이 있다.
또한, 적을 죽이면 더욱 강해지는 것이 자신의 능력이다.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사막벌을 입에 던져 넣은 우진이 씩 웃었다.
“싸우고 싶거든 덤벼라.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
— 쿠궁...!
그에게서 뿜어진 엄청난 기운을 알아본 청룡이 감탄했다.
<현무와의 일전을 마치고도 그런 힘이 남아있단 말인가.... 과연 신비한 존재로군.>
하지만 이내 놈이 위엄있게 말했다.
<허나 나는 신수들의 우두머리. 사방의 수호자. 모든 공간을 관장하는 흐름의 지배자.>
사신수 최강, 청룡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청룡의 힘을 받아 보아라!>
우진이 빙긋 웃으며 신형을 옮겼다.
“그걸 왜 받냐?”
그가 있던 자리가 일그러지듯 조여들었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다.
공간이 압축된 것이다.
‘아슬아슬했군.’
저기 있었다면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휘말린 부위가 그대로 소멸했을 것이다.
무식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하지만 짜릿함이 발끝부터 차오른다.
그는 전투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존재니까.
이제부터 자신의 전략은 ‘회피’.
저 상대하기 까다로운 공간의 압력을 정면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청룡도 충분히 패면 죽는 존재다.’
반신? 뭐 어쩌란 말인가.
이미 반신 셋을 때려 잡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 격을 흡수했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성립한다.
그의 작전은 하나.
‘본체만 노린다!’
우진이 청룡의 등허리에 등장해서 공격을 날렸다.
— 콰콰쾅!
그러나 아깝게 무위로 돌아갔다.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라 피한 청룡.
— 쿠구구궁!
우진이 신형을 드러내자 곧바로 적의 반격이 날아왔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공간의 압력.
세상이 파괴로 물드는 가운데 우진만이 위태로운 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계속 적의 틈을 노리는 우진.
‘이대로는 끝이 없겠군.’
격은 서로 비등하다.
공격력은 적이 강하다.
또한 마나의 총량 역시 적이 월등히 크다.
‘하지만 반응 속도는 역시 비슷하고....’
적도 자신을 공격하기 힘들다.
자신도 적을 노리기 힘들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가면 결국 내가 불리하다.’
적은 마나의 잔량이 충분한 가운데, 자신은 회복을 해야 하는 ‘틈’이 생기리라.
청룡 정도나 되는 존재가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다.
그러니.
‘아직 마나가 남아 있을 때 승부를 봐야 한다.’
순간 르쉬의 페이크 동작이 떠올랐다.
르쉬도 해냈다.
자신도 할 수 있다.
비록 중급 악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초강적.
청룡.
그를 상대로 해내야하지만.
‘르쉬, 네가 뭐든지 해낼 수 있듯이, 나 또한 그러하다.’
수하에게 준 믿음을 자신이 배반할 순 없다.
자신의 명령에 따라 저 먼 곳에 몸을 숨기고 있을 작은 흡혈귀.
절대적 승리를 믿고 있을 그녀를 위해서라도.
“난 질 수 없다!”
우진의 모습이 순간 여럿이 되어 적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놀라는 청룡.
그러나 우진 또한 당황하고 말았다.
반드시 적중했어야 할 공격이 ‘막혔다’.
‘공격은 완벽했는데...?’
본체에 닿을 수 없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다.
청룡 주위의 공간 자체가 놈을 지키고 있다.
궁극의 보호막!
놈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은 날 공격할 수 없다.>
우진이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공격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저런 말로 혼란을 주는 것이다.
마력 하나 소모하지 않고 발동한 일종의 언령.
‘거짓말을 하는 놈은 머리가 깨져야 마땅하지.’
그가 모든 마력을 일시에 끌어올렸다.
전지의 감각과 지신의 축복.
그리고 심안을 동시에 발동해 흐트러진 공간의 순서를 파악했다.
“닿아라!”
일념으로 내지른 검격.
— 쩌저저정!
우진의 검이 복잡하게 비틀린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건 마치 적을 추격하는 집요한 사냥꾼과도 같았다.
<아니, 이런 것은... 불가능한......!>
천공의 여러 부분에 그의 검이 번쩍이고.
— 콰콰쾅!
마침내 청룡의 몸에 거대한 상흔이 새겨졌다.
<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14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