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96 >
악룡 레비아탄.
그의 정신은 이제 우진에게 귀속되었다.
스스로에겐 더없이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덕에 귀속당한 존재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무엇에 지배 받게 되었는지 완전히 깨달은 것이다.
<이런... 인간이 아니었을 줄이야...! 네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더냐......?>
말투는 지금까지처럼 평어였으나 그 속에는 이미 공포와 경외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존심 상 숙이고 들어갈 순 없었으나, 진실된 감정마저 숨길 순 없었기 때문이다.
우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뭔가 특이한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만.”
레비아탄의 충격이 이어졌다.
<그래.... 그렇다면 그 이해할 수 없는 힘도 설명이 되는구나. 인외의 힘은 인외에게만 허락되기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도 좋다.
하지만 우진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야, 그거보다 너 이제 내 동료다?”
어이가 없는 레비아탄.
<허어...? 우린 동료가 아니라.... 내가 너한테 먹힌 관계에 불과한...... 그러니까 상하관계에 의한......>
하지만 우진의 의사는 확고했다.
“아니 넌 억지로 부려먹으면 일을 제대로 안 할 거 같아. 그러니까 꼭 동료라는 확답을 받아야겠다.”
<그... 그걸 어찌.......>
감탄하는 레비아탄.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먹힌 잠력은 어쩔 수 없더라도, 자기 본신의 힘은 절대 빌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레비아탄이 침음과 함께 말했다.
<그래. 내가 귀속되어 어쩔 수 없이 힘을 빌려줘야 하는 신세가 됐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뿐이다. 본신의 힘을 내고 싶어도 난 이제 육체가 없어 불가능하다.>
순간 우진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내가 널 현실에 불러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럼 나한테 힘을 빌려줄래?”
그러자 유혹에 저항하듯 외치는 레비아탄.
<난 이미 혼백만이 남아 육체를 잃었다... 불가능한 것을 얘기해봤자 내 정신이 흔들릴 일은 없다.>
“그럼 약속하자. 나에게 널 현신시킬 능력이 있다면 내 힘이 되어 다오. 전심전력으로.”
<어리석은 존재여. 그건 신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미 잃어버린 육체를......>
“그러니까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코웃음을 치는 레비아탄.
<하!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날 개처럼 부려도 좋다!>
“개처럼?”
우진이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대화가 원하는 곳에 도착했기에.
“그래그래. 기다려봐.”
동굴을 빠져나와 호수 옆에 선 우진.
자신 속의 레비아탄을 불러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자, 나와라 용아!’
— 쿠구구구...!
문양에서 터져나온 기운이 현실에 붉고 흉폭한 용을 창조한다.
이건 문양의 능력이라기보단 자신의 어둠으로 육체를 구성하여 실체화시킨 것이었다.
막대한 어둠 보유량을 가진 우진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첫 감상은...
“크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생각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모습이 정말 멋졌다.
그런데 놀란 것은 우진만이 아니었다.
“으응...? 네가... 왜... 네 모습이 보이지...?”
우진이 아래를 보라는 듯 손가락을 콕콕 찍었다.
그리고 아래를 본 붉은 용 또한 감격하여 눈이 커졌다.
“내... 내가... 내가 나 자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현신하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능력이냐...?”
웃으며 설명하는 우진.
“내 어둠 보유량이 네 몸 전체보다 크고, 또 나한테는 실체화라는 멋진 힘이 있거든. 맘에 든다니 나도 기분이 좋네.”
“맘에 드냐고...? 이건... 이건 기적이다...! 넌 신적인 일을 해낸 거라고 존재여!”
날개를 활짝 편 용.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행복만이 남았다.
‘흐흐, 내 능력을 조합하면 기적을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지.’
하지만 약속은 약속.
세상에 창조된 용에게 첫 번째 명령이 들려왔다.
“개처럼 부려도 좋다고 했지?”
“그... 그건....”
“짖어라 멍멍아.”
“.......”
결국 들려온 작은 목소리.
“머... 멍!”
껄껄 웃는 우진.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나서야 본심을 얘기했다.
“됐다.”
“돼... 됐다고...?”
“그래, 괜찮으니까 그냥 하던대로 해라. 단 너도 성질이 있는만큼 나도 성질이 있다는 거 항상 기억하고.”
“크흠.......”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레비아탄.
지금 자신이 엄청난 배려를 받고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날 억누르고 정신마저 찢어버릴 수 있는 존재가... 내게 진지하게 힘을 빌려달라 하고 있구나.’
몸을 갖게 해줬으니 그 은혜는 갚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들려온 목소리.
“대신 네 이름은 이제부터 쫑이야.”
“으... 으음...?”
“쫑!”
악룡의 절규가 산을 울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하하하하!”
*
그리고 얼마 후....
— 쿵... 쿵....
달밤에 용이 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육신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레비아탄.
우진이 원없이 몸 좀 풀게 시간을 준 것이다.
마침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용이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몸을 확인했다.
눈을 감고 감상에 젖은 레비아탄.
“현신이라... 그간의 원(怨)이 모두 풀리는 느낌이군.... 갇혀 있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육신이 없이 혼백만이 남아 그 작은 나무 감옥 속에서 수백 년을.......”
그때 레비아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군. 도대체 내 몸을 어떻게 구성해낸 거지?”
“난 용을 만드는 일에 익숙하거든. 어둠으로 뭘 만들어본 경험도 많지. 무엇보다 심상 세계에서 네 모습을 정확히 확인한 게 큰 도움이 됐다.”
“허....”
말문이 막힌 레비아탄.
도저히 할 말이 없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자신 앞의 존재 밖에 없을 것이다.
“근데 난 딱히 색을 지정하진 않았는데. 그대로 붉은 색이 되었네?”
“내 본질... 힘의 근원이 적색이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녀석의 스킬명도 ‘붉은 어둠의 힘’이었다.
‘새로운 힘이 생겼으면 써줘야 맛이지.’
— 프스으....
우진의 전신에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이건가?”
그때 기겁하는 레비아탄.
“아서라! 그걸 네 몸으로 발현하면 몸이 붕괴할 거다. 그래도 내 존재의 격이 한때는 바깥 고리 최강을...... 으응?”
— 쿠구구궁...!
우진이 본격적으로 붉은 어둠을 뿜어냈다.
하늘까지 닿을 듯한 투기가 아름답게 빛났다.
“이거구나! 데킬라 파워!”
더욱 ‘날카롭다’.
‘어둠으로 벨 수 있을 거 같아.’
신이 난 우진.
“고맙다! 네 덕에 새로운 힘을 얻은 거 같은데.”
어이가 없는 레비아탄.
“너... 넌 아무리 그래도 용격(龍格)도 아닐진데... 도대체 어찌...?”
“내가 좀 튼튼하거든!”
그때 더욱 강해진 우진의 투기.
한층 발전해 불길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 쿠구구구...!
닿기만 해도 스러질 것 같은 붉은 파괴의 힘이었다.
“며, 멸세의 힘마저 다루는 것이냐.... 그건 내 고유의 능력일진데....”
기운을 더욱 강화하는 우진.
“오 이 엄청난 파워가 멸세의 힘이냐? 네가 붙인 이름인가 보군. 순수한 욕망이 드러나서 맘에 든다.”
자신도 기술 이름 붙이는 거 좋아한다.
악룡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 내가 붙였다기 보단 월드 자체의 의지가 그 정도의 대단한 힘으로 판단해서 굳어진.......”
“안다. 나도 안다. 흐흐흐....”
이름이야 뭐가 됐든 좋다.
강하기만 하다면!
우진이 손을 뻗어 기운을 방출했다.
“멸세포!”
용이 숨 쉬듯이 쏘던 붉은 광선.
그것이 우진의 손에서 뻗어나갔다.
— 콰콰쾅...!
가볍게 쐈을 뿐인데 산줄기에 구멍이 생겼다.
“와... 이거 엄청나네.”
그때 경악하는 레비아탄.
“그, 그 이름을 어떻게...!”
“이심전심이지.”
손바닥에 기운을 응축시킨 채 레비아탄을 바라본 우진.
“그보다 이제 네 마음을 알 거 같다. 붉은 어둠 이거 정말 짜릿한 손맛이야.”
“후후... 그 힘에 중독되지 않도록 주의하는게 좋을 것이다.”
우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날카롭다는 게 진짜 멋있네.”
원반 형태로 만들자 정말 세상 끝까지 갈라버릴 듯한 예기가 흘러나온다.
이 힘을 환검에 응용하면 아름다운 필살기가 하나 나올 듯 싶다.
기운을 그대로 던져올린 우진.
“조금 더 써보자.”
“위험...!”
하지만 위험하지 않다.
하늘에 퓨퓨퓽 쏴올린 기파가 아름다운 불꽃놀이처럼 폭발했다.
적색 축제였다.
“와우.... 멋지구만....”
우수에 젖은 우진의 눈.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힘 조절을 본 레비아탄이 기겁을 하며 물었다.
“너... 이 힘을 오늘 처음 얻은 게 맞나...?”
“너 아니면 내가 어디서 이런 걸 얻었겠냐. 쫑쫑아. 하하하하!”
그때 문득 붉은 힘의 최고 경지가 떠오른 우진.
“아, 심상 세계에서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악룡이 썼던 광역기.
그걸 자신도 쓸 수 있다면 정말 멋진 기술이 생길 터였다.
“설마 바로 최고 단계까지 사용하겠다는 거냐?”
우진의 뜻을 알아챈 레비아탄이 고민 끝에 결정했다.
“어쩔 수 없군. 자, 이런 식이다.”
연결된 정신으로 이미지를 보내주는 레비아탄.
생생하게 전달되는 힘의 운용법.
그리고 기술명도 알 수 있었다.
“멸세의 진노!”
한때 멸세룡이라 불리던 존재의 궁극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오! 이름 맘에 든다. 너 진짜 뭘 좀 아는 용이구나?”
부끄러운 듯하지만 만족스러운 듯한 레비아탄의 표정.
우진도 흐뭇하게 기술을 시연해보았다.
주변을 휘몰아치는 강대한 붉은 기운.
“맞아! 이게 아까 그 느낌이야!”
그리고 ‘터트린다’.
— 콰콰콰쾅...!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호수이기에 아예 맘 놓고 발산했다.
그러자 주변을 완전히 지워버린 원형의 힘.
멋진 광역기였다.
어둠 소모량이 좀 크긴 하지만 파괴력만큼은 끝내준다.
레비아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이걸 단 한 번에 성공시키다니....... 나조차도 진정한 분노 상태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을....”
우진이 껄껄 웃었다.
“그러냐? 나도 분노 파워로 쓴 거 같긴 해. 내가 항상 최고 단계의 분노를 품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놈들이 있거든.”
붉은 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이제 너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넌 그냥 힘을 위해 태어난 존재 같구나.... 너 다 해 먹어라....”
그 한탄과도 같은 말에 빙긋 웃는 우진.
“아니야. 우리 같이 해 먹어야지.”
“으음...?”
“혼자는 외롭잖아. 그렇지?”
순간 충격에 빠진 레비아탄.
실제로 외로웠다.
숨 쉬듯이 외로웠기에 인식을 멈추었을 뿐.
헌데 자신을 품은 이 존재와 연결된 순간, 오래된 감정들이 살아났다.
용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우진이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자신의 말에서 무슨 큰 깨달음을 얻었다기 보다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와 합치하는 부분이 있어 생각이 깊어진 것이리라.
‘나도 매일 싸우기만 해서 알지... 그거 정말 쓸쓸하고 외로운 일이거든.’
그때 마침내 눈을 뜬 붉은 용.
“좋다.”
“오?”
“네 힘이 되겠다 맹세하마.”
주먹을 움켜쥐는 우진.
“오우! 고맙다 쫑쫑아!”
“이건 진명의 맹세다. 넌 나를 복속시켰고, 패자인 나를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었으니, 앞으로 주인으로 여기고 복종하겠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레비아탄이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음? 그게 뭐냐?”
붉은 용이 결국 진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중심부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레비아탄이 숨겨둔 비밀. 그건 정말 뜻밖의 얘기였다.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신수(四神獸). 그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9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