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92 >
“우선 이걸 받아주십시오.”
“이건?”
선장이 건넨 것은 반지.
중심부의 보석은 빛나는 푸른색으로 매우 신비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이 함선의 마스터키. 모든 권한이 담긴 제어장치와도 같습니다. 물론 저희가 수동으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셈이지요.”
“고맙군. 그런데 왜 갑자기 이리 격식을 차리지?”
“이제 선주시니 경어를 쓰는 것이 합당하지요.”
씩 웃는 선장.
그는 애꾸눈도 갈고리 손도 아니었지만 풍채가 당당한 중년의 외형으로 희미한 영체 상태에서도 기세가 대단했다.
“고맙군. 이름을 물어도 될까.”
“원래 없었는지 이제는 잊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선장이면 족합니다.”
“난 우진이다. 편한대로 불러다오.”
“이분은...?”
“부선주라고 해두지.”
“르쉬입니다!”
반지를 끼운 우진이 상갑판 최상단에 올라섰다.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지.”
유령 일동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선장이 가장 까다로운 적수였으나, 그가 마음이 넘어온 이상 모두가 우진에게 호의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제대로 확인하고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
“미리 밝혀두자면 난 이미 시험의 바다를 건넌 적이 있다.”
“오오...!”
터져나오는 탄성.
이 반응을 염두에 두고 꺼낸 첫 마디였다.
뱃사람에게 있어 ‘극한’ 수준의 험로를 이미 뚫어봤다는 건 귀중한 지혜를 가진 선구자이자 위대한 업적을 이룬 선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좀 더 솔직해질 시간이다.
그가 차분히 진실을 얘기했다.
“허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오히려 난 말단 선원 정도의 위치로 짐짝처럼 실려간 것에 불과했지.”
“그러나 건넌 것은 건넌 것이지요.”
“하여 부탁을 하고자 한다. 내가 항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많다고 자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
항해는 선장의 권한.
그러나 시험의 바다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렇기에 우진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진심을 다하는 것 밖에 없기에.
그리고 그것은 통했다.
“지난 번 난 미력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만의 힘으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러니 부디 부탁한다. 모두 총력을 다 해 이 배를 움직이되, 중요한 순간엔 내 뜻을 따라다오.”
순간 긴장한 듯한 유령 일동.
지금 그는 지휘권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이다.
선주라 하여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순 없기에.
‘물론 폭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론 시험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저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선장도 우진의 의중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와 선장의 역할은 구분되어야겠지만... 생사를 가르는 곳에서 지휘권이 분리되는 것도 위험한 노릇이겠지요.”
마침내 그가 결단을 내렸다.
“이건 평범한 항해와 경우가 좀 다릅니다. 평시엔 전 절대로 이 배의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생일대의 목숨을 건 전투. 최고의 바다와 뱃사람들의 한판 승부가 되겠지요.”
고개를 든 선장.
“하여 지금부터 본선의 역할을 전선으로, 선주의 지위를 사령관으로 격상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 결정은 유사시엔 우진의 명령을 우선으로, 모든 것을 믿고 따르겠단 각오였다.
즉 죽으나 사나 명운을 함께 하겠다는 뜻.
우진의 얼굴에도 일말의 긴장이 서렸다.
모든 권한이 넘어온다는 것은 모든 책임 또한 넘어온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걸 안 받으면 사내가 아니지.’
“동의한다.”
우진의 굳은 결심과 함께.
“오오...!”
번져나가는 탄성.
그것은 선장과 우진 두 남자의 결의가 선원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뜻이 하나가 되고.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선명한 의지가 번져나갔다.
— 척... 처처척....
일동 기립하여 도열한 모습은 늘어진 빨랫감이 각잡힌 제복으로 변하는 모습 같았다.
“으음. 고마운 일이군....”
“저희로서도 반가운 일입니다.”
선원들은 오히려 흥분에 젖은 것 같았다.
“100년은 떠들 이야깃거리가 되겠군.”
“맞습니다!”
“정신에 환기 좀 시키는 거다.”
“내심 궁금했지. 우린 대체 어디로 흘러가나 말이야. 그게 바로 오늘 이 순간이었어.”
“거대한 모험을 위한 긴긴 휴식이 아니었나 싶구만....”
그때 떠오른 알림.
[바깥고리가 자신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천공선 캐스케이드]
[천공선 캐스케이드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선박의 안내가 시작되었다.
“천공선 캐스케이드! 이제 집이라 생각해주십시오.”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선주님!”
구경을 시작한 르쉬와 우진.
과연 특별한 배였다.
외관부터가 일반 선박과는 달랐다.
지구로치면 거대한 잠수정의 모습일 것이다.
“우선 이곳이 상갑판입니다.”
우진이 침입한 곳.
이곳은 말하자면 메인층으로 선박 운행과 전투에 관련된 모든 일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자신을 조타장이라 밝힌 유령이 마치 순간이동하듯 움직이며 여러 장비를 소개해주었다.
“저희 함선의 자랑 천공포입니다! 대해일의 힘을 쏘아내는 괴물 같은 녀석이죠.”
“과연 강력한 힘이더군.”
“헛...!”
그것에 맞을 뻔했던 자가 사령관이 되었으니 이것도 신비한 운명이었다.
“자! 그럼 아래층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층으로 갈 시간.
“저희는 이 배에서는 어디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한 몸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다만 사령관님과 부선주님께선 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쓸 일이 있을까 싶더니 이런 날이 다 오는군요.”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보는 스승과 제자.
“음?”
“히히.”
우진과 르쉬가 빙긋 웃고는 각기 블러드 드라이브를 이용해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기겁을 하고 따라온 조타장이 껄껄 웃으며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이거 적응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분들이십니다.... 자, 안내를 이어가겠습니다.”
손을 쫙 펼친 조타장.
“이곳은 상갑판 하층으로 제2갑판 역할을 수행합니다.”
드넓은 하층.
생활과 정비를 위한 공간으로 역시 다양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유령 선원들의 주된 활동 장소였다.
“자 이제 중심층입니다!”
더 아래층은 그야말로 이 거대한 함선의 신비가 가득한 곳으로, 온갖 독특하고 중요한 구역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끊임없이 유령 음식이 재생되는 저장고였다.
“이 유령 음식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하군....”
희미한 연기 같기도 하고 홀로그램 같기도 한 그것은 생각보다 맛있게 보였다.
인간 음식처럼 다양한 종류가 있었고,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다.
“대단한 맛은 없습니다. 포만감을 주지도 않고 그저 기분만 내는 정도지요. 정말로 연기를 마시는 기분이라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령관님께서 가져오신 음식은 정말 그 맛이...... 흐.......”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 눈을 지그시 감는 조타장.
우진도 빙긋 웃었다.
저렇게 좋아해 준다면 이쪽에서도 마음이 편했다.
— 쿠구구구....
이번엔 중앙으로 이동해 이 배의 동력원을 살폈다.
길쭉한 마름모 꼴의 푸른 수정이 이 배의 동력이었다.
그것의 첨단부가 최상층 상갑판까지 올라와 언제든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대단한 크기군.”
“배 전체에 힘을 불어넣는 녀석이니까요. 하핫.”
그 외에도 배리어 발생 장치나 추진기 등등 여러가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자신의 방.
“사령관님을 위한 방은 이곳이 어떻겠습니까.”
깨끗한 방은 정갈히 꾸며져 있었다.
워낙 거대한 배다 보니 방의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왕실의 파티장이라고 해도 믿겠군....’
그리고 그 옆은 르쉬의 방이 되었다.
“내 방이다!”
— 쿠구궁....
다음은 ‘수납고’였다.
그곳에 본 드래곤과 기갑마룡을 언제든 발진할 수 있게 대기시켜두었다.
“이 녀석들이 저희를 추격했던 놈들이군요.”
“그래, 속도와 크기에서 본선을 따라가긴 힘들겠지만 전투력은 대단하지. 훌륭한 비행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에선 르쉬의 눈이 번쩍였다.
“수련장...!”
어마어마한 규모의 수련장엔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설비가 마련되어 있었다.
“와아아아...!”
신나서 뛰어다니는 르쉬.
‘이 배는 확실히... 고대에 본격적인 생활 공간으로 쓰였던 장소가 아닐가 싶군.’
그저 이동수단이 아니라, 이곳이 하나의 도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마련된 시설들.
월드의 지형은 여러 모로 변화해왔다고 하니, 온통 물 뿐인 세상이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없다.
이 배는 그 시절의 ‘공중 도시’였을 가능성이 있다.
“저희는 수련장을 사용하지 않으니 언제든 편하게 이용해주십시오. 자동으로 복구와 관리가 되니 정말 마음껏 쓰셔도 좋습니다.”
“고마운 얘기로군.”
다시 상갑판으로 향한 일행.
그 선교에 도착한 우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우선 분류의 구슬을 고쳐야겠는데....”
이 배에 마법을 부여하는 세 개의 거대한 구슬.
그 중 자신이 파괴한 새파란 구슬은 여전히 반쯤 쪼개진 상태였다.
“저절로 수복이 될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책임을 져야겠지.”
당장 바다를 부를 일은 없다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수리를 하기로 했다.
“으음...!”
— 후우웅!
막대한 어둠의 마력으로 분류의 구슬을 회복시키니 이내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새 살이 돋듯 신비한 모습이었다.
‘역시 어둠을 힘으로 삼는 배다.’
감탄하는 유령들.
“도대체 그런 어둠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우진이 그들에게 어둠의 핵 얘기를 들려주었다.
유령선은 온갖 장소를 떠다녔으니 어둠의 핵을 직접 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자신들의 사령관 몸 속에 있다?
“그런 기상천외한 일이 가능하다니....”
우진이 빙긋 웃었다.
“이 배의 근원이 어둠에 가깝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빛의 힘을 쓰는 것을 보았으니 나중에 놀라지 않도록 미리 설명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우진이 어둠을 분출했다.
여기 이 힘에 위협을 느낄 존재는 없기에, 유령, 흡혈귀, 언데드인 자신 뿐인 공간에서 마음껏 모든 힘을 뿜어냈다.
순간 밤이 찾아온 것처럼 진득한 암흑이 퍼져나갔다.
얼듯이 굳는 유령들.
그건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희에 가까웠다.
어둠에 몽롱하게 취한 것 같은 표정들.
모두가 망자들이니 충만한 에너지가 가득한 느낌이리라.
— 슈와아악...!
우진이 어둠을 거두자 눈을 뜬 선장.
“이거 참.... 대단한 분을 사령관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단순한 강자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힘 자랑을 한 셈이 되었군.”
“아닙니다.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어떤 파도에 올라탄 것인지...!”
선장은 이제 단순한 존대를 넘어 확고한 충성의 마음이 드러난 모습이었다.
다른 힘이야 강하든 말든 상관 없으나, 어둠을 그 정도로 품었다면 망자인 자신들에겐 더없이 고귀한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 반지는 이 배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지만, 또한 심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정확히는 동력원인 천공석과 연결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드러난 진실.
반지를 통해 배의 동력을 자신의 힘으로 끌어올 수 있고, 반대로 자신이 배에 힘을 주입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로 운명을 같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맙군.”
다른 것보다 자신을 그만큼 믿어주는 사실이 고마웠다.
이제 자신은 원한다면 이 배의 모든 힘을 갈취하여 떠나버려도 그만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을 알려줬다는 것은, 우진에게 자신들의 존재의 근간을 맡겼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책임감이 막중하군.’
그 분위기를 털어내고자 우진이 자신의 특기를 펼쳤다.
그건 바로 연회의 준비.
“우오오오...!”
“사령관님은 통이 엄청나십니다......”
막대한 양의 음식과 술이 등장하고.
“저, 정말 이걸 다 먹어도 됩니까...?”
“물론이지. 난 언제나 식량에 아낌이 없을 것이니 원하는만큼 먹어도 좋다.”
조타장의 즐거운 외침.
“연회다! 연회 준비를 시작해라!”
그렇게 모든 음식을 감싸 어둠으로 녹이던 중이었다.
그때 경보가 울렸다.
“경계!”
“본함으로 수백의 마물이 접근 중입니다!”
“젠장... 하필 이럴 때....”
순간 차단막이 해제되며 주변의 경관이 드러났다.
전방에서 익룡 같은 녀석들 몰려들고 있었다.
— 끼에엑...!
크기가 각기 10m는 족히 넘는 녀석들이 우르르 날아드는 것은 기세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이 있었다.
— 후우웅...!
게다가 능력까지 위협적이다.
주변에 토네이도 같은 것을 형성해서 먹잇감이 방향감각을 잃게 한 뒤 순식간에 낚아채는 재빠른 사냥꾼.
크기가 거대하기에 토네이도 역시 산풍(山風)이라 불리며 자연재해로 일컬어질 정도로 위협적인 마물들이었다.
그런 것이 전함 주위의 모든 방위를 틀어막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거대한 산맥에 사는 놈들이 모조리 날아든 것 같다.
“도망치는 게 좋겠습니다. 숫자가 너무 많아 다 정리하는 것은 까다롭습니다.”
선장이 현명하면서도 평범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우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니.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피하지 않는다.”
우진은 이미 거선의 상부로 점멸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간이동 하듯이 그를 따라온 선장이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우진은 빙긋 웃을 뿐이었다.
“물론. 내 배는 내가 지킬 것이니.”
“허...!”
저 익룡은 레벨 150대의 괴물.
어지간한 모험가라면 한 마리를 상대하고자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려 백여 마리.
우진의 기감에는 120여 마리라는 숫자가 정확히 포착되었으니 선장의 생각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시험의 바다엔 이것보다 수십 배 거대한 마물들이 살고 있다.’
거기에 최후의 관문 ‘해신(海神)’까지.
이 정도는 초속으로 해치워야 도전의 자격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3분 후 우리는 승리의 연회를 열 것이다.”
거대한 암흑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 우진.
“우오오오...!”
“이야아아...!”
모든 유령 선원들이 그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
— 훙! 훙! 훙!
하늘에 믿을 수 없는 것이 떠올랐다.
‘설마...! 하늘에 진법을...!’
선장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고.
다음 순간 기적이 벌어졌다.
< 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9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