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65
흑염제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엇인가. 또 이 세상은 무엇인가.’
오늘밤은 정말 이상했다.
새벽 4시. 자신의 갱단원이 칼리아 클랜을 털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새벽 5시. 칼리아의 본부가 터지면서 악마가 튀어나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하늘을 나는 백색의 용사가 악마를 죽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나는..... 무엇이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칼리아 측으로 정찰을 보낸 인원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장난 것처럼 잠잠한 수정구.
탁탁 두드려보니 잘 작동하는데.
왜 소식이 없을까.
감(感).
흑염제의 불길한 감은 이게 단순한 일이 아니란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스물스물 피어나는 공포.
‘왜 이렇게 초조할까. 왜 이렇게 두려울까.’
그런데.
그때 들려온 굉음.
— 콰과과광...!
‘무... 무슨 소리냐...!’
우진의 첫 번째 참격이었다.
30명을 베고도 힘이 넘쳐흘러 전각을 무너뜨린 그 소리에 흑염제가 자리에서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때 점점 가까워지는 굉음들.
— 콰콰콰쾅...!
우진이 저벅저벅 장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손짓 한 번에 서전이 무너지고.
다시 휘두른 참격에 동전이 무너진다.
마지막 중앙전에 닿았을 때는 도 대신 목청이 치솟았다.
“나와라 염제야—!”
다가오던 병사들은 이미 저만치에서 피를 토하며 모두 죽었기에.
홀로 선 중앙전 앞엔 장도를 거머쥔 우진 뿐이었다.
“안 나와? 안 나오면 쳐들어가야지.”
하지만 직접 가는 게 아니다.
전각의 대청을 지나 문을 뚫고 넘어간 것은 사령 거미줄.
그 투명한 실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흑염제를 발견하고 가 닿았다.
연결된 존재에게 발동된 것은 새로운 스킬 ‘지령.’
‘염제야....’
정신을 통해 전달되는 우진의 속삭임.
‘염제야........ 놀자.......’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의 흑염제가 화들짝 놀랐다.
빙긋 웃는 우진.
‘느껴진다. 녀석의 공포가.’
칼리아의 능력인 암시.
그걸 좀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
호감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그리고 계속되는 지령.
‘염제야.’
‘염제야....’
‘염제에 야아아....’
“흐이이이익...! 누구냐......!”
전각 밖으로 결국 새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진이 빙긋 웃었다.
놈의 인품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잔인하고, 교활하고, 포악하다.
하지만 이젠 달라질 시간이다.
이어지는 우진의 속삭임.
‘염제야....... 나는 네 뒤에 있다.......’
그때 다시 비명.
“흐아아아아아! 내, 내 방에서 나가라......!”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
우진이 씩 웃었다.
‘이건 뭐 어린애 놀려주기도 아니고. 내 스타일엔 좀 별로군.’
사념을 회수한 우진.
허공의 어둠 속에서 아주 기다란 흑도 하나를 뽑아냈다.
그리고 발동된 기술.
“나오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흑마질풍참...!”
전각이 반으로 갈라지고.
그 아래에서 오들오들 떨던 흑염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고, 얼굴 보기 힘드네.”
우진이 손짓을 하자 흑염제의 몸이 허공을 날아 그의 앞에 놓였다.
—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우진의 뒤에서 걸어오는 시체 병사들.
흑염제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내가... 내가 흑염제다...!>
패기를 보이려다가도.
자신의 병사들이 일시에 목이 덜컥 떨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목이 없는 채로 뚜벅뚜벅 걸어와 자신의 뒤에 모조리 꿇어앉았다.
사령술로 선보인 약간의 매직쇼였지만.
흑염제의 정신을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으으아아아!”
결국 이를 악물고 일어선 흑염제.
그의 등 뒤에 피어오른 일렁이는 흑색의 불꽃.
우진이 반갑게 그걸 구경했다.
“오 그게 흑염이구나? 내 불속성이 한층 강해지겠군. 내놔라.”
“무, 뭐... 무슨... 이... 어?”
살면서 이 정도의 무례함은 처음 겪어봤을 거다.
태생부터 초강력 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흑염을 내놓으라고?
그 당당한 요구도 어이없지만, 이게 어디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거란 말인가?
“넌 대체 뭐 하는 놈인데.......”
“내가 누군지보다. 네가 누군지가 중요하지.”
“나... 내가... 내가 누군데...?”
목을 탁 치는 시늉을 한 우진.
“시체.”
결국 두 손을 움켜쥐고 힘을 끌어올리는 흑염제.
“난... 난 고작 이렇게 죽기 위해서 그 모든 걸 해온 게 아니다...!”
“네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도 그 의견에 동감할 거다.”
우진이 흑참도를 어깨에 걸친 순간.
흑염제가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해 반격을 시작했다.
“이대로... 죽을 쏘냐......!”
그건 한 마리의 용이었다.
그를 향해 날아오는 흑색의 화염용.
“그거군. 잘 받아가마.”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의 참격이 용을 베고 흑염제의 목에 닿았다.
“후.”
허상처럼 사라진 용.
총처럼 도신에 바람을 분 우진.
마력을 베어내는 흑참도에서 묵직한 예기가 발현하고.
— 풀썩....
마침내 무릎을 꿇더니 상체를 숙여 쓰러진 목 없는 육신.
— 데구르르....
우진이 굴러온 모가지만을 들어올렸다.
“다크 파이어. 오늘 부로 해산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제야 동이 튼다.
긴긴 밤도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머리는 자루에 넣은 뒤 인벤토리에 잘 챙겼다.
악취미라기보단 따로 목적이 있었다.
‘네 면상은 아직 할 일이 좀 남았거든.’
그리고 스킬을 확인하는 우진.
[적을 죽여 그의 힘을 이어받습니다.]
[’흑염(黑炎)의 술(術)’을 계승했습니다.]
강한 위력의 술법계.
거기다 흑(黑)이라는 공격 버프까지 가지고 있어 아주 무서울 정도다.
시험 삼아 사용해본 우진.
‘화염이라면 나도 익숙하지.’
하지만 약간은 다른 조작감.
마치 불이 살아있는 것처럼 묵직하고 질감이 있는 느낌이다.
애초에 다른 계통 취급을 받는 걸 보면 사용 요령도 다른 게 분명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느껴본 감각인데. 아...!’
이거라면 비슷한 걸 할 줄 안다.
“나와라 혈박쥐.”
— 키리리릭...!
반갑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패밀리어.
이 녀석을 다룰 때와 비슷한 묵직한 손맛이 바로 흑염을 다루는 요령이다.
녀석과 연결된 느낌을 잘 살리며 손바닥의 화염을 조절했다.
그리고.
— 화르르륵...!
검은 불꽃이 박쥐의 형상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모양새가 영락없이 혈박쥐의 쌍둥이다.
— 키릭...?
의아하다는 듯 ‘불박쥐’를 살피던 혈박쥐가 순간 깜짝 놀랐다.
우진이 갑작스레 불의 생명체의 크기를 키워버렸기 때문.
— 키악...!
마치 투정하듯 우진의 어깨에 앉은 혈박쥐.
“흐흐흐.... 미안하구나. 하지만 테스트는 테스트니.”
몇 번 해보니 감이 온다.
진짜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그 흉내를 낼 수 있다.
각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술법계 스킬들.
뱀장어의 술이 부여받은 속성이 ‘연결’이라면.
‘흑염의 술은 형상화라고 보면 되겠군.’
테스트를 마친 우진이 흑염제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목도 없어 처량하지만 동정심이 들진 않는다.
‘네 스킬은 고맙게 잘 쓰마. 대신 네가 키워온 조직은 완전히 박살날 거다.’
시체를 묻어준 우진.
— 벌컥!
중앙전 내부로 들어섰다.
반으로 갈렸지만 워낙 깔끔하기에 뚜껑 열린 건물이라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
었다.
이제 녀석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음. 잡동사니 수준이군.’
분명 아이템은 제법 있었다.
부채니 구슬이니 잡다한 게 있었지만...
‘그냥 딱 허세용 아이템들이야.’
유일하게 쓸만한 것.
[팔괘선의(八卦仙衣)] [전설]
[공격자의 레벨이 착용자보다 낮을 경우 ‘도검불침’을 제공한다.]
‘호오... 이건....’
꼭 티어가 전설이라 맘에 드는 것은 아니다.
‘이 녀석... 옷 보는 안목이 있군.’
그 모양이 멋있다.
아주 깔끔한 백색의 도포.
유일한 흑자수는 어깨의 팔괘 뿐이다.
펄럭이는 도포를 겉옷처럼 걸치고 소매를 묶었다.
‘잘 받아가마!’
그리고 다시 놈의 방을 뒤지는데.
현찰과 쓸데없는 서류뭉치 사이로 뭔가 기운을 발한다.
수상쩍은 붉은 서찰 한 통.
마력으로 봉인이 되어 있지만 이 정도를 푸는 건 이제 그리 어렵지 않다.
뜯어내고 살피니 뜻밖의 이름이 보인다.
‘광마교.......?’
광마교의 입회 초대장.
우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초대를 받을만한 악인이지.’
그런데 초대 조건이 좀 악랄하다.
흑염제 본인이 다크 파이어 전원의 목을 직접 베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
과연 광마교다운 요구였다.
‘아주 고민이 됐겠군.’
광마교에 들어가서 한 자리를 하면 한낱 도시의 갱단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수하 전원의 목이라니. 아무리 흑염제라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그걸 달성하고 나면 알아서 ‘장로’가 찾아와 계몽을 시켜줄 거라고 하
는데.
우진이 그 내용은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일종의 단서가 되겠군.’
어차피 자신도 광마교를 추적할 생각이었다.
그 연결 고리가 생겼으니 잘 된 일이다.
‘일단 흑염제에게 제안이 온 이상... 다크 파이어를 지켜보는 광마교의 눈이
있다는 거고.’
자신이 이 갱단을 해체, 말살한 사실도 반드시 전해질 거다.
‘그래, 날 주목해라. 그리고 날 찾아라.’
그게 바로 우진 스타일 추적이 될 것이다.
놈들이 자신을 찾아오게 하는 것.
마지막으로 흑염으로 장원을 태운 우진이 아침 햇살 속에 길을 가로질렀다.
*
그런데 막 장원의 정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저 멀리 헐레벌떡 달려오는 누군가.
“부... 부... 불이야...!”
어디에나 소식이 느리고...
판단이 느린 놈이 있는 법이다.
뒷덜미를 잡아서 들어올렸다.
“누구냐.”
“너, 넌 누군데?”
흑참도를 꺼내 장원의 외벽을 날린 우진.
“누구냐?”
잠깐의 정적 후 놈이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저... 저는 다크 파이어의 정찰조로.... 이름은....”
“이름은 필요 없고. 랭크는... 3. 쓸모가 있겠군. 같이 가자꾸나.”
우진이 굴러들어온 포로를 기절시킨 후 도시 밖 르쉬의 거처로 향했다.
— 끼이익....
낡은 지하실은 비어있다.
흡혈귀들은 아직 칼리아 쪽 마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
— 촤아악....
그곳에서 얼굴에 물벼락을 맞고 눈을 뜬 포로.
“저... 저는 다크 파이어의 정찰조로.... 이름은....”
“그건 이미 얘기했다.”
“주, 죽여주십시오!”
우진이 피식 웃었다.
“얘기가 빠르겠군.”
일단 빠른 설명을 위해 흑염을 피워올렸다.
이글거리는 검은 불꽃을 보자 포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건 흑염제님의...?”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흑염제는 죽었고. 이건 우진님의 스킬이다.”
인벤에서 잠깐 잘린 머리통을 꺼내 보여주니 졸도한다.
“꺼어억....”
“피곤한 녀석이군.”
다시 깨운 우진이 놈을 꿇어 앉히고 ‘정보 추출’을 시작했다.
“너는 나랑 즐거운 인명사전이나 작성해야겠다.”
“이... 인명사전이라면....”
다크 파이어의 수장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단원은 아직 많다.
그렇기에 일종의 스킬 리스트 추출이 필요했다.
“너희는 갱단이니 입단할 때도 스킬을 공개할 테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놈들
이니 너희들끼리도 스킬을 자주 보여줬을 테지.
“마... 맞습니다.”
“그러니 너희 중 스킬이 특이하거나 강한 놈들 읊어봐라. 일단 네 스킬부터.”
그러자 공포에 질리는 포로.
“그, 그럼 전 죽습니다요.......”
“너희 두령이 나한테 죽었는데 누가 널 죽여.”
테이블에 흑염제 머리통을 올려놓은 우진.
사령술로 계속 입을 달그락 거리며 ‘죽... 여... 줘....’라는 입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기절했다 깨어난 놈은 아예 넋이 나간 정보 누설 머신이 되었다.
“모...!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난 바쁜 몸이고. 좋은 것만 먹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빠르게 쭉쭉
훑자꾸나.”
그런데 종이와 펜을 들고 고민에 잠긴 포로.
우진이 인자하게 말했다.
“너무 고민 길게 할 거 없다. 고만고만한 반찬에서 그나마 영양가 있는 거 집
어먹는 거니까. 특이한 스킬 가진 녀석들 리스트만 추려라.”
갱단에 고기 반찬 있을 확률 0이다.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게 없다.
결국 빠르게 적어나가는 포로.
“흠....”
마침내 리스트를 확인하는데.
클랜 컬러를 맞추려고 했는지 불계통이 눈에 많이 띄었다.
단지염 : 검지에서 불을 뿜어낼 수 있다.
‘존나 구려. 다음.’
그런데 다음 것도 비슷하다.
‘작은 반딧불을 허공에 띄울 수 있다고?’
방 전체에 반딧불 축제를 만들어낸 우진이 박수를 쳐줬다.
‘너 많이 해라.’
계통이 겹치면 의미가 없다.
그때 눈에 들어온 재밌는 스킬.
[불꽃 신호탄]
‘뭐야 이건... 하늘에 신호탄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불꽃으로 하늘에 표식을 새기고, 그걸 없앨 수 있다.
좀 특이하긴 한데.......
그때 문득 깨달은 사실.
‘이거. 능력 사용 좌표가 극단적으로 넓어진다.’
순간 번쩍이는 아이디어.
이걸 얻으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나머지 항목을 빠르게 훑은 우진이 스킬 리스트를 구겨버렸다.
‘챙길 건 정했고.’
일단 르쉬와 3인방에게 지령으로 지시를 전달했다.
<얘들아. 일 마치면 근거지에서 대기해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혈서약과 지령으로 연결된 몸이다.
<예!> 하는 르쉬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쫘식들 잘 하고 있는 것 같군.’
그리고 다시 낚아챈 포로의 뒷덜미.
“야, 출발하자.”
“어, 어디를 말씀이십니까...?”
빙긋 웃는 우진.
“머리만 먹고 가기엔... 좀 아깝잖아.”
잠시 의미를 모르다가 본능적으로 흠칫한 포로.
— 오싹....
이를 딱딱 마주치며 공포에 질리는데.
우진이 정겹게 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귀여운 포인트... 너도 곧 나랑 한 몸이 될 거야....”
자신의 새로운 능력 ‘정산’.
대가리 하나 하나가 다 강화 포인트다.
즉, 갱단원 1을 죽이면, 포인트 1이 생긴다.
‘어쩌면... 난 이렇게 알뜰할까.... 사랑스러운 나 자신이여.....’
폭업 밥상을 차려놨는데 안 먹는 건 너무 미안하다.
“가자!”
— 후우웅...!
하늘로 날아오른 우진이 어딘가로 향하고.
[스탯 강화 포인트 +1]
[스탯 강화 포인트 +1]
[스탯 강화 포인트 +1]
...
[스탯 강화 포인트 +1]
도시 전역에서 마지막 ‘청소’가 이루어진다.
하수도로 돌아온 것처럼 보람차게 일을 해내는 우진.
그것은... 성장 천재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