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54
— 쿠우웅.
방 안을 가득 채운 건 르쉬의 결의.
우진이 감탄했다.
‘혈서약을 받아들인다라....’
도망가거나 공격을 해올 거라고 생각했다.
전자의 확률이 99%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도망은커녕...
‘영혼을 바치겠다고?’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이 경우엔... 우진의 힘.
우진이라는 이름의 희망.
그가 호기심에 물었다.
“넌 도대체 뭘 얻고 싶은 거냐. 이 맹약을 통해서.”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누가 무시를 당했는데?”
“저희의 클랜입니다.”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우진.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힘을 가지게 된다면. 네가 원하는 건?”
그러자 이글거리는 르쉬의 눈.
“복수. 완벽한 복수입니다.”
충분하다.
대답은 모두 매우 만족스러웠다.
“좋다. 서약을 받아들이마.”
이번에 놀란 것은 르쉬.
혈서약이란 둘 모두의 정신에 새겨지는 것.
아무에게나 함부로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자신은 이미 저분께 ‘아무나’가 아니란 뜻.
그때 들리는 진지한 목소리.
“예를 갖춰라. 서약은 고귀하고 엄숙한 것이니.”
“예!”
— 척
한쪽 무릎을 꿇은 르쉬.
그 위로 우진의 손바닥이 뻗어졌다.
— 촤르륵....
아름답게 비산하는 르쉬의 ‘맹세의 증거’.
그 소중한 피를 감아올려 허공에 문양을 새겼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에 흡수시킨다.
스르르 사라지는 문양.
“컥....”
흔들리는 르쉬의 머리.
“후우.”
그리고 얕은 한숨을 쉰 우진.
둘의 정신에 거부할 수 없는 맹약이 새겨졌다.
“좋다. 르쉬는 이제 나와 혈서약으로 맺어진 사이다. 나머지는 어찌할 생각이
지?”
뒤를 돌아본 우진.
르쉬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꼭 나를 따를 필요는 없다. 단, 이분을 믿어볼 생각이라면 그 또한 너희의
자유겠지.”
—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고.
서약이 주는 무게감과 대장을 향한 신뢰 사이에서 길을 결정한다.
그리고 결연히 일어선 나머지 3인방.
모두 자신의 손을 스스로 베어냈다.
— 촥! 촥! 촥!
“바치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끄덕였다.
“좋다. 모두 허락하마.”
다시 반복된 서약의 과정.
맹세의 대전제는 이것이다.
지배와 복속.
즉, 주종관계를 맺은 것.
우진이 확인했다.
“너흰 이제 날 해치겠다는 의사를 품기만 해도 고통을 느낄 거다.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럴 일은 없을 터이니, 믿어주십시오.”
— 척.
— 처처척.
모두가 기사들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다.
그걸 본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면 너무 딱딱하다.
그건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편하게 하자 편하게. 아, 그렇지. 아까 그 단어 좋더라. 앞으로 그 단어로만
예를 갖춰라.”
그러자 귀를 쫑긋거리는 4인조.
‘단어라면?’
“충성!”
이번에 1등을 차지한 건 무난이.
이어지는 대답들.
“복종!”
“차... 찬양!”
“사랑합니다!”
어느새 각자 구호가 되어버린 단어들.
이건 이들의 진심이기도 했다.
아까 전의 구울 사태.
그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무서운 광기였다.
‘던전에 들어갔으면 반드시 죽었다.’
‘100% 죽었다.’
‘끔찍하게 찢겼을 거야.’
던전이 뿜어내던 대량의 구울들.
그걸 먼저 들어가서 정리해주고, 다시 뿜어내는 것까지 막아줬다.
목숨을 빚진 셈인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게다가.
‘힘!’
‘힘!’
‘힘!’
압도적인 힘.
수많은 구울을 단신으로 쓸어버리던 그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힘.
흡혈귀가 피보다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건 힘이다.
힘에 대한 숭배.
이건 종족 단위로 새겨진 본능이니까.
그렇기에.
감정적 호감과 힘에 대한 동경.
이게 합쳐져 복종 호르몬을 콸콸 뿜어낸다.
즉, 이들의 눈에 우진은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고 고귀하며 지혜롭고 멋진 존
재로 보이는 것.
‘사랑합니다....’
덩치는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
한편 우진은....
‘힘! 이 또 생겼네.’
르쉬의 피를 손바닥으로 흡수하는 순간 알림이 떴다.
[일족의 피를 통해 새로운 힘을 이어받습니다.]
[’밤의 일족’을 계승했습니다.]
‘밤의 일족이라.’
설명을 보니 흡혈귀 능력 전반이다.
그냥 단순히 혈액 때문에 계승된 건 아니고 좀 복잡한 경로가 됐을 거다.
클랜장을 복속 시켰고, 서약까지 맺었으니까.
‘뭐... 그래도 핵심은 피 때문인게 확실하겠군.’
흡혈귀.
피를 통해 전염되고 피를 통해 각성하는 종족.
‘어찌보면 나한테 잠재된 능력이기도 하지.’
자신은 기본적으로 흡혈귀 왕을 근간으로 둔 육체.
하지만 놈의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그것이 동족의 피를 통해 눈을 뜬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뒤늦은 힘의 개화.
‘좋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기도 하군.’
자신은 지금도 강하다.
하급의 흡혈귀 수십 마리가 덤벼들어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더 강해진다고 사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일단 사용해볼까.’
관객들이 있지만 어차피 자신을 흡혈귀로 알고 있다.
뜬금없을 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단 흡혈. 이건 뭐 융합이란 더 좋은 경로가 있고.’
세부사항을 보며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봤다.
— 스아아악....
‘송곳니. 좋은데?’
날카롭고 자유자재로 발현과 은닉이 가능한 송곳니.
언데드 폼에서도 활용할 수 있으니 더없이 만족스럽다.
‘일단 특능은 3개가 들어왔군. 중하급 흡혈귀 정도로 쳐주는 건가?’
[흡혈]
[밤안개]
[박쥐 패밀리어 소환]
모두 쓸모가 많은 능력들이다.
게다가.
‘모조리 성장형이네. 역시 종족이 좋아. 능력 세 개가 전부 성장형이라니.’
쓰면 쓸수록, 힘을 키우면 키울수록 유효 범위와 능력이 발전하는 성장형 스
킬들.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외에는 아직 ‘스킬 트리’를 뚫지 못했다.
‘흠... 추가 능력은 흡혈을 통해 개방하라고? 이거 키워줄 테크트리가 하나
더 생겼군.’
능력을 더 획득하려면 역시 흡혈을 해줘야 하는 거 같다.
‘그래도 여러가지 멋지네.’
얻은 능력을 테스트해본다.
첫째는 밤안개.
— 스아아아....
주위를 잠식하는 새까만 안개.
위장, 공격, 중독 등등 효과는 다양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멋’이 넘쳐서 마음에 들었다.
‘오케이 밤안개 합격.’
다음은 박쥐를 불러봤다.
성장형 패밀리어.
그렇다고 진짜 박쥐는 아니라 피로 만든 혈박쥐이다.
— 키리리릭....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바닥 위에 나타난 박쥐.
크기도 크고 지능도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주위를 잠시 날아다니더니 우진의 어깨에 앉은 혈박쥐.
핏빛 연기 같은 것이 스물스물 피어나는 새까만 짐승.
역시 멋있다.
‘오케이! 박쥐 합격.”
자신에겐 생명에너지가 넘쳐서 능력이 처음부터 강력하다.
흡혈도 결국은 생명에너지 빨아먹으려고 하는 짓이니까.
그런데, 자신은 오늘 밤에만 구울 6000마리 분량을 빨아먹었다.
즉.
‘난 흡혈귀로서의 포텐셜도 아주 높다는 뜻이군.’
물론 흡혈귀 승급을 하기 위해서는 ‘피’를 빨아야 할 거다.
지금 종족 능력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뭐 차차 성장시키도록 하지.’
아직 능력 개방이 안 돼서 그렇지 보유 능력의 파워 자체는 탁월하다.
그건 ‘진짜 흡혈귀’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 꿀꺽....
— 꼴깍....
우진의 능력 테스트.
그걸 뚫어져라 멍하니 보고있는 얼간이들.
특히 르쉬의 눈이 제일 컸다.
‘어, 엄청나다.’
갑자기 흡혈귀들의 특능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존.
그런데...
기본 능력이어도 그 수준이 다르다.
밤안개가 아니라 밤 그 자체에 휩싸인 느낌이다.
‘어두워. 어둡고 깊다.’
게다가 저 박쥐.
혈박쥐라고 부르기엔 사이즈가 어마어마하다.
‘내... 내건 손바닥만한데....’
‘크다...’
‘크고 아름답다....’
박쥐가 아니라 그리폰 같다.
‘무서워.’
‘본체가 아니라 박쥐만으로도 무서워....’
솔직히 박쥐랑 1:1로 싸워도 질 것 같다.
— 꿀꺽...
르쉬는 더 현실적으로 파악했다.
‘4:1로 싸워도 승부를 점치기 힘들다.’
고작 박쥐 하나가 자신들을 모두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지존께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흩어버리셨다.
“박쥐 합격.”
알 수 없는 말씀과 함께 사라진 혈박쥐.
주위를 물들이고 있던 밤안개도 스르르 사라졌다.
— 벌떡.
그리고 지존께서 일어나셨다.
*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
자신 앞에 얼어붙은 4인조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능력 테스트가 얘들을 더 얼어붙게 만든 것 같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힘을 테스트한 거지만...
‘쟤들이 보기엔 무슨 실력 과시처럼 보였겠군.’
그래도 능력을 준 고마운 녀석들이다.
결국 우진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했다.
“자, 이제 우리가 좀... 특별한 사이가 됐군. 맞지?”
쏜살같이 날아오는 대답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우진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좋아 좋아, 이해가 빠르네. 비록 내가 너희를 물어서 변화시킨 건 아니지만,
그런 셈 치고 좋은 관계를 이어가자고.”
“알겠습니다! 영광입니다!”
흡혈귀는 서열문화가 확실하고, 믿고 따를 수 있는 강자가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행복한 일이었다.
우진이 일단 분위기를 완전히 풀기 위해 선심을 썼다.
“자... 일단 이거 받아둬라.”
자기한테 필요 없는 물건을 좀 나눠줄 생각이다.
‘너무 싸구려를 줘도 좀 그러니까.’
매직 등급 이상의 아이템으로 잘 골라보는데....
아이템이 좀 많다.
‘어이씨 이거 안 팔았었네.’
제론의 거대 도끼.
“자 이건 덩어리가 받고.”
“2번! 올로! 감사합니다!”
— 휘청
도끼가 무거워서 비틀거리는 덩치.
강혼으로 도와줬다.
“무겁냐?”
“아, 아닙니다! 들 수 있습니다!”
우진이 덩치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어 그래. 야 이거 진짜 좋은 거다. 나와 명승부를 펼친 놈이 쓰던 거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그 외에도 뭐 잡동사니 다 꺼내서 하나씩 들려줬다.
근데 사실 뭐 별 게 없다.
‘이거 쇼핑을 좀 해서라도 줘야겠네.’
어차피 돈은 문제가 아니다.
애쉬라인 정도의 부자는 아니어도, 자신도 나름 베풀고 살 정도의 부자는 됐다.
‘뭣보다 템 선물이 주는 특별함이 있거든.’
아이템.
그냥 써도 좋고 팔면 돈이 되는 존재.
그걸 선물로 준다는 건 정말 특별한 일이다.
자신도 전생에 템주는 사람이 제일 고마웠다.
쓰다 버리는 템이어도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인물로 보였다.
그때 그의 눈에 새로운 하사품이 보였다.
“아 이거라도 먹을래?”
인벤에서 꺼낸 것은 구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라 몇 마리 챙겨놨다.
“저... 저희는... 구울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죄, 죄송합니다.”
그때 치고나오는 르쉬.
“아닙니다! 먹겠습니다!”
정말 뜯어서 먹으려는데.
‘아.’
자신은 좀 특이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난 융합으로 먹으니까 맛있는 거였지.’
“스탑! 그거 맛 없다. 딴 거 먹자.”
살점을 입에 넣기 직전 겨우 멈춘 르쉬.
당황하며 말한다.
“딴 거라면....”
우진의 머리에 식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고기 먹자 고기. 너네 고기 좋아하잖아.”
“예? 아...? 예?”
식당 옆자리가 우진이라는 걸 모르는 4인조.
턱을 긁적이는 우진.
“아 그때 내 얼굴이 ‘우진’이 아니었구나.”
“아... 아?”
갸웃거리는 르쉬.
그 어깨를 우진이 탕탕 두드렸다.
“아무튼 야 가자! 오늘 내가 제대로 쏜다.”
그러자 쭈뼛거리면서도 즐거워하는 4인조.
기세를 몰아서 개그를 시도했다.
“쏜다! 니들 머리를!”
— 오싹...!
얼어붙는 4인조.
갱단 놈들의 농담을 따라한 건데.
아무래도 자신이 말하기엔 너무 진담처럼 들렸던 거 같다.
“...이 아니고.... 이 밤을 쏜다!”
그러자 겨우 풀어지는 놈들.
“쏘... 쏜다!”
“손들어! 탕탕탕!”
다행히 기분을 잘 맞춰주는 4인조.
그때 우진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럴 수가. 회식 때 샤다스나 지구에서 아재 개그 치던 박 과장.... 다 알고
그런 거였어.’
그들은 자신이 재미없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알아도 맞춰주는 이 권력의 힘을 즐긴 것이었다.
‘이렇게 인생을 배워가는구나.’
흐뭇하게 녀석들과 총쏘는 시늉을 하는데.
“탕탕탕...!”
“타타타탕!”
그때 떠오르는 알림.
— 띠링!
[최고의 인연]
[페인텔의 274번째 세력 ‘르쉬 클랜’의 호감도가 최대가 되었습니다.]
[스탯 강화 포인트 +1]
눈을 꿈뻑이는 우진.
‘이게 왜 올라?’
하도 비중없는 세력이라 보상은 소소하지만.
이건 혈서약으로도 못 만드는 수치다.
아무래도 이 얼간이들.
진지하게 자신을 좋아하는 거 같다.
‘이럴 수가....’
상념 속에서 숙연해진 우진.
잠시 자신을 반성하다가.
고개를 들고 신나게 외쳤다.
“네 얼간이!”
“일!” “이!” “삼!” “영!”
공동묘지를 질주하는 우진.
“가자아아아!”
“가, 가자......!”
그리고 뒤따르는 르쉬와 두 흡혈귀.
“사랑합니다.......”
마지막엔 눈물을 흘리는 덩치가 열심히 그들을 쫓고 있었다.
*
그리고 입성한 도시.
‘삐까뻔쩍하네.’
조명 가득한 거리는 마치 지구의 밤거리를 생각나게 한다.
‘이 밤을 불태우더라도 할 일이 있지.’
작전명 ‘칼리아 토벌전’.
그 첫 번째 목표.
그건 이 도시의 오염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태울지, 도려낼지, 클랜 전체를 박살낼지.’
도시 전체가 썩어있다면?
‘그 모든 피를 전부 빨아버릴지.’
대규모 작전이 되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대규모 성장이 되기도 한다.
‘어디 한번 알아보자고.’
칼리아 클랜의 운명이 결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