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7
“저, 저 새끼 저거......”
“야 야... 뭐야.......”
우진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숙소에서 무기는 안 꺼내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주동자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짐짓 강한 척하며 말했다.
“끝까지 가보자고?”
“그럼 이런 애새끼 다툼 며칠 하다가 멱살이나 잡고 끝내려고 했냐?”
우진의 말에 주동자는 입을 다물었다.
먼저 시비를 건 건 자신이다.
그렇다고 자기도 무기를 꺼내면 진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냥 기선제압이나 하려고 했는데 목숨 걸고 칼부림을 하라고?’
그에게는 그럴 배짱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우진이었다.
이미 사람 하나를 거리낌없이 죽인 놈이 검을 들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심각해
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뭣들 하는데 이렇게 시끄러워! 소란 피우지 말고 자라!”
관리인이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소란피우지 말라고 외쳤다.
‘우리가 주고 받은 대화가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우진이 보기엔 관리인이 주동자를 구해준 것처럼 보였다.
아마 시비를 거는 것까지는 용인해줬으나, 상황이 이상해지니 끊어준 것이다.
‘아무래도 다 한 통속인 것 같은데.’
안도한 듯한 주동자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끝까지 이죽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새끼... 운 좋은 줄 알아.”
“너야말로.”
대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더이상 잠자리 따위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우진은 안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관리인도 한 패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자는 동안 습격당하면 아무리 우진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저 주동자 녀석. 이름이 루가딘이라고 했지.’
일단 저 놈이 요주의 인물이다.
루가딘.
그의 이름을 되새기며 우진은 부릅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저들 중 최소한 한 명은 죽여야 할 지도 모르겠군.’
여긴 월드고 자신은 노예였다. 자기 목숨은 스스로 챙겨야했다.
그렇게 긴긴 밤이 지나갔다.
***
다음 날 감독관 브라카가 나타났다.
광차에서 내린 그가 사열한 관리인과 인부들 사이로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우진이 착잡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 일 때문이군.’
루가딘 놈과 떨거지들이 웃고 있다.
감독관의 등장인데 마치 자기 편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즐거운 모습.
관리인도 묘한 미소를 지으며 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상황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엄마 찾는 애새끼들도 아니고 지들이 시비를 걸고 지들이 일러바쳐?’
검을 꺼낸 것은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논리정연하게 입장을 변호할 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 앞에 브라카가 도착할 때쯤 각오를 굳혔다.
“어제 소란이 있었다고.”
스산한 목소리가 거구에서 뿜어져나왔다.
역시 어젯밤의 일 때문이었다.
우진이 뭐라 말하려는데 놀랍게도 브라카는 그냥 자신을 지나쳐서 계속 걸어
갔다.
그리고 관리인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그의 따귀를 날렸다.
“그렇다고 날 오라가라 하는 건 무슨 버러지같은 발상인지.”
저 멀리 날아간 관리인이 뺨을 감싸쥐고 허겁지겁 달려와 다시 섰다.
그 모습을 본 브라카가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반대쪽 따귀를 날렸다.
“컥......!”
관리인은 이번엔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처박혔다.
브라카가 그 위로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 새끼야. 해먹을 거면 티나 안 나게 해먹어라. 독각귀 시체가 계속 몇 구
씩 비는데 내가 모르겠어? 용돈이나 하라고 모른 척 해줬더니 내가 아주 만만
하지? 어? 누가 누굴 오라가라야?”
그는 그 후로도 관리인을 몇 번 걷어차고는 침을 뱉었다.
“컥... 컥... 죄송... 죄송합니.......”
반항도 못하고 얻어맞던 관리인은 결국 머리를 걷어차이고 기절하더니 이내
끈 풀린 인형처럼 늘어졌다.
“뭐야 이 새끼. 야, 죽었냐?”
관리인은 정말 죽은 건지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브라카는 몹쓸 것을 봤다는 듯 시체를 툭툭 건드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관리인에게 말했다.
“이거 갖다 버리고 니가 여기 책임자 해라.”
관리인이 허겁지겁 시체를 치우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또 말 나오면 너도 뒤지는 거야. 알았냐?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니들끼리.”
말을 마친 브라카가 평소의 털털한 모습과 다르게 스산한 눈으로 우진과 나머
지 패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우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표정을 보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숙소에서 검을 꺼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별 말은 없었다.
관리인이 시체를 치우자 그제야 전원을 향해 얘기했다.
“다시 또 이런 일로 귀찮게 하면 전부 광산에 처박겠다.”
돌아서려던 브라카가 다시 관리인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책임진 구역이 몇 개인 줄 알아? 하수구 하나 못 굴려서 귀찮게 할 거
면 그냥 편하게 광산 가서 곡괭이질이나 해. 머리 쓸 일도 없고 얼마나 편해.”
이번엔 인부들을 향해 말했다.
“인부들 니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니들한테 바라는 건 하나다. 할당량 채우는
거. 개지랄병 다 떨어도 되는데, 할당량만 채워. 쉽지?”
“예!”
“못하면 다시 광산 가는 거야.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브라카는 떠나갔다.
아무도 관리인의 개죽음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은 것에 안도할 뿐.
우진도 머리가 복잡했다.
이건 명백히 자신을 봐준 것이다.
‘생각보다 나를 더 좋게 봤나보군.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루가딘 패거리는 그저 허탈해보였다.
어찌보면 자기들 때문에 관리인이 독박을 쓴 건데 그건 안중에도 없고 우진을
향해 불쾌한 시선을 던져왔다.
새로운 관리인도 입맛을 다셨다.
우진은 알 수 있었다.
‘끝난 게 아니다.’
루가딘의 패거리.
그들은 중심 파벌이라서 막타도 더 많이 먹고 이득을 취해왔다.
관리인은 그들을 통해서 인부들을 쉽게 통제하고 뒤로 독각귀 시체 몇 구라도
빼돌렸던 거고.
그런데 우진의 등장으로 그 중심 파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 어젯밤 사건만 해도 그들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새로운 관리인? 쟤도 어차피 한 패다. 내가 눈엣가시인 건 저 놈도 마찬가지
야.’
두꺼운 낯짝으로 먹고 사는 놈들은, 그게 상하면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한다.
월드 뿐 아니라 지구에서도 그랬고, 그게 그냥 세상의 원칙일지도 몰랐다.
‘그럼 원칙 하나 더 알려주지.’
우진도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저들이 다시 수작질을 하면,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한번 죽었던 놈을 건드리면, 반드시 업보를 치르게 된다는 걸.
*
먹구름이 끼면 비가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브라카가 남기고 간 어두운 분위기는 결국 심상치 않은 사건을 불러왔다.
일은 그날 오후에 바로 터졌다.
“자! 점심밥들 잘 먹었지? 오후에도 열심히 하자!”
“안전 안전 안전!”
통로로 들어가는데 낌새가 묘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우진의 직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오전에는 조용했는데.’
브라카가 돌아가고 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점심밥을 먹을 때 이상하게 쑥덕거린다 싶었다.
관리인까지 합세해서 뭔가 요상한 분위기가 흘렀다.
<니들끼리 알아서 해 니들끼리.>
브라카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아무래도 놈들은 그걸 좀 더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알아서 날 담그려는 생각인가.’
그러나 통로에서도 별 일은 없었다.
원래 루틴대로 독각귀를 사냥하며 천천히 구역을 클리어해나갔다.
그러다 갈림길이 나왔다.
관리인이 눈짓을 하자 반장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섰다.
‘뭔가 시작되려는 것 같군.’
갈림길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
어제도 몇 번 봤고, 하수구 자체가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눈치였다.
‘반장도 한 패인 것 같고. 확실히 낌새가 이상하다.’
그렇게 독각귀 몇 마리를 더 잡고 진행하자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다른 통로와 달리 뭔가 부서지고 허름한 느낌이 났다.
게다가 이번엔 3갈래로 한 번도 보지 못한 구조였다.
그때 반장이 자연스럽게 조를 나누기 시작했다.
“랄프랑 후안은 이쪽으로.”
“루가딘은 저쪽.”
“신입은 저쪽.”
원래대로면 다같이 움직였을 것이다.
시간이 더 걸려도 그게 안전하니까.
하지만 이번엔 인원을 나눈다.
그것도 10명씩 3개조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6명 12명 12명이라는 이상한 분
배가 되었다.
우진은 6명에 속했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는 루가딘 측 5명으로 이루어진 중심 파벌.
마치 여우굴에 토끼 한 마리 넣어논 꼴이었다.
반장이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조편성을 마치고 우진과 다른 그룹에 섰다.
“난 이쪽에서 가면 적당하겠군.”
그가 루가딘과 순간적으로 시선을 나누고는 말했다.
“청소하고 여기서 합류하는 거다. 문제 없지?”
“예!”
우진은 ‘청소’라는 단어에 힘을 주는 듯한 반장의 말에 확신했다.
‘대비해야겠군.’
그렇게 3개의 조가 흩어져서 각자 갈림길로 향했다.
통로부터가 이상했다.
계속 부서진 곳이 있고 바닥에 금이 간 곳도 있었다.
하수구의 무너진 구역으로 데려온 것이다.
‘아마 원래라면 여긴 청소할 계획도 없었겠지.’
맨 뒤에서 따라가던 우진은 주변을 보며 이곳이 ‘거사’를 치를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면 하수구에서도 더욱 으슥한 이 버려진 구역에 올 이유가 없었다.
루가딘은 조가 나뉘자 본색을 드러내고 우진을 갈궜다.
“우리 조는 내가 대장이니까 이제 날 대장이라고 불러라. 알겠냐?”
우진은 잠자코 그의 말을 따랐다.
“알겠습니다 대장.”
“대장이 아니라 대장님이라고 해야지.”
“예 대장님.”
“오... 쫄기는. 또 검 꺼낼 줄 알았더니 분위기 파악은 잘 하네?”
우진은 그저 빙긋 웃었다.
‘여기선 검을 꺼낸다고 바뀌는 게 없으니까.’
5대1이라고 무서울 건 없었다.
다만 이들의 목적을 파악해야 했다.
얘들을 다 죽이고 아까의 갈림길로 돌아가면, 그땐 어떻게 될까.
반장이 나머지 인원과 자신을 덮치지 않을까?
5대1을 어찌 이긴다고 해도, 다시 20대1을 이길 수 있을까?
그렇기에 상대편의 의도를 읽어내야 했다.
놈들은 계속 깊은 곳으로 우진을 인도하며 신나게 까불고 있었다.
“야 여기 진짜 조용하다.”
“사람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는데?”
패거리의 말에 루가딘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그러게. 독각귀가 죽였다고 하면 되잖아.”
마치 도살장에 끌고 가듯이 대놓고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낄낄거렸다.
우진은 침착하게 이들의 계획을 파악했다.
‘단순히 여기가 으슥해서가 아니야. 지형을 이용하려는 거다.’
통로는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무너진 곳도 있고 반쯤 막힌 곳도 있다.
그런 곳을 억지로 넘어서 전진하고 있었다.
우진은 슬슬 다른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너무 깊이 가는데?’
이런 곳이라고 독각귀가 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저 멍청한 새끼들은 자신을 죽일 생각에 정신이 팔려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통로가 완전히 무너진 곳이 나타났다.
거의 절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몇 미터 아래에는 잔해와 함께 다른 하수도 통로가 보였다.
폐쇄된 구역과 이어지는 형태가 된 것 같았다.
그 아래 독각귀 몇 마리가 숨어있는 게 보였다.
‘역시 여긴... 독각귀 소굴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게 쟤들 눈에 안 보일리가 없다.
그런데 루가딘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
“야. 내려가서 확인해봐.”
“예?”
“우리 청소하러 왔잖아. 저기도 청소해야지.”
“다시 올라올 수 없을 높이인데 저 혼자 내려갑니까?”
“그래. 이게 탐색조라고 하는 거다. 알려줄 때 배워.”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최전선에서 피터지게 사투를 벌이는 파티도 이딴 식으로 의미없이 탐색조를
굴리진 않는다.
최소한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어야 목숨 걸고 나서는 거지.
결국 우진은 이를 드러냈다.
“지랄하네. 니가 던전 탐색은 해봤냐?”
“어? 감히 대장의 명령에 불복해? 강제로 내려갈래?”
다섯 명이 약속한 듯 걸어온다. 미리 계획된 듯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절벽을 향해 조여오는 포위망.
제일 중앙에 선 것은 이 와중에도 장난인듯 실실 웃고 있는 루가딘이었다.
“날 원망하지 말고. 니가 뭘 잘못했나 잘 생각해봐라.”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너... 이러면 반드시 후회할 거다.”
“후회? 그건 뒤질 놈이 하는 거고. 밀어!”
다섯 명이 붙어서 순식간에 던지듯이 밀어버린다.
버텨봤지만 이미 절벽 아래로 몸이 던져진 후였다.
— 쿵.......
상당한 높이답게 큰 충격.
고통보다는 치졸함에 이가 갈렸다.
차라리 검과 검으로 맞섰으면 남자답다는 생각이라도 들었을 거다.
‘그래... 이 정도로 나와줘야 복수할 맛이 들지.’
고개를 든 우진이 몇 미터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상적으론 올라갈 수 없다.
‘정상적으론 말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특별한 스킬이 있었으니까.
— 우웅....
정신을 집중하자 몸에 기운이 어린다.
복잡하게 얽힌 시동어가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도약.’
처음으로 발동하는 물리계 스킬.
월드의 규칙이 그의 몸을 감싸고, 우진은 평범한 몸으론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가볍게 땅을 밀어낸 발.
— 후우웅...!
엄청난 힘으로 도약한 우진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루가딘을 잡아채 그대로 떨
어트렸다.
“어... 어어어....?”
영문도 모른 채 어둠에 끌려가듯 사라지는 루가딘.
마치 악마가 절벽으로 데려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뭐, 뭐야?”
뒤의 놈들이 당황하며 대장의 실종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둠을 뚫고 귀신처럼 나타난 우진이 지면에 착지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패거리가 얼어붙었을 때.
“너...? 너 어떻게...?”
우진이 빙긋 웃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더라. 니들도 가볼래?”
“어... 어......?”
검을 든 우진을 보자, 모두의 등줄기에 오싹함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