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데드가 되어 돌아왔다 1
싸우다 죽는 것이 명예라고 한다.
그러나 적이 아닌 아군의 칼을 맞고 죽는 것도 명예일까.
“컥... 커억.......”
우진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스킬 ‘무아의 백치’가 발동하여 모든 정신공격을 상쇄하는 대신 판단력
까지 앗아갔기 때문이다.
손을 따라 흐르는 피는 분명히 보였다.
아무리 틀어막아도 가슴의 피는 계속해서 흘렀다.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생각
이 들 때는 이미 입과 코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린... 분명 흡혈귀 왕을 사냥하는데 성공했는데...... 어째서.......’
왕명(王名).
스스로 왕의 자격을 획득한 존재에게 붙는 이름이다.
‘흡혈귀 왕’ 또한 왕명을 획득한 강력한 마물이었다.
그런 놈을 사냥하는 것은 이 세계의 선두를 달리는 파티에게만 허락된 꿈이었다.
우진은 자신이 그런 파티에 속해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비록 다른 파티원들에 비해 레벨도 낮았고, 특출난 스킬도 없었지만 파티장은
자신을 받아주었다.
우진이 가진 유일한 고유스킬 덕분이었다.
모든 정신공격이 통하지 않는 ‘무아의 백치’.
우진은 이 스킬을 항상 쓸모 없다고 여겼다.
정신계 마법을 쓰는 고위 마물을 만나려면 그만큼 레벨업해야 하는데 그 성장
과정에선 거의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진은 악착같이 성장했다.
스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계속 사냥을 하며 조금이
라도 레벨을 올렸다.
짐꾼 취급을 받아서라도 파티에 꼈고, 그렇게 자신을 성장시켜왔다.
마침내 2군 정도의 파티에 속해있을 때였다.
지금 있는 파티의 파티장이 자신을 스카웃했다.
그들의 목표는 왕의 이름을 가진 마물.
흡혈귀 왕이었다.
우진은 기뻤다. 이제야 인정받은 것 같았다.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 위대한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흡혈귀 왕의 마지막 페이즈가 ‘정신 지배’라는 것을.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파티는 확실히 강했다.
우진이 몸담았던 그 어떤 파티보다 강했다.
‘우린 결국 흡혈귀 왕의 모든 페이즈를 뚫어냈고.......’
왕격(王格) 마물에게 퍼부어진 공격은 결국 놈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때 발동된 초월적 스킬, 정신지배.
비명처럼 발산된 흡혈귀 왕의 사념이 마치 피뢰침에 끌리는 벼락처럼 우진에
게 몰려들었다.
백치처럼 비워진 머리가 정신공격을 완벽하게 흡수했다.
그제야 우진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 깨달았다.
자신이 미끼였다는 사실을.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어쩔 수 없고. 떨거지 끌고다닌 이유가 뭐겠냐? 그렇
게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우연히 들었던 그 조롱이 그냥 평범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들에 너무 익숙해진 우진이었으니까.
그저 파티에 비해 뒤떨어진 자신에 대한 푸념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치밀한 계획이었다.
“흐어어억.......”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입에서 침이 흐르고 눈이 뒤집어졌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왕의 마지막 한 수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귓가에 동료라고 생각했던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발동했다. 발동했다.”
“설마 진짜 버티나...?”
“다른 것도 아니고 정신지배다. 왕급 스킬이면 버텨도 죽을 걸?”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크크....”
자신을 스카웃 한 파티장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가슴 아프게 들려
왔다.
마치 자신을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이 보고 있는 파티장.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버림말로 사용되고 싶진
않았다.
‘죽고 싶지......’
<죽고 싶지 않다......!>
그때 우진의 마음에 무언가 다른 존재의 의지가 섞여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흡혈귀 왕이었다.
무아의 백치를 소유한 자로서, 우진은 이 상황의 전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의식 전이......!’
정신지배보다 한 차원 높은 스킬로 아예 상대의 몸을 차지해버리려는 스킬.
흡혈귀 왕은 지금 스스로 몸을 버리고 우진에게로 의식을 옮겨오는 중이었다.
놈으로서도 모든 것을 건 최후의 한 수.
우진은 체념했다.
무아의 백치는 정신을 비우는 스킬이다. 이 텅 빈 공간에 상대의 의식이 흘러
들어오면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저거 뭐야. 저 새끼 왜 눈이 붉어졌어?”
“어, 어... 일어섰다?”
그때 파티원 중 누군가가 상황을 파악했다.
“의식 전이다! 흡혈귀 왕 지금 우진 저 새끼 몸 속에 있는 거야!”
우뚝 선 우진의 몸에서 폭발적인 귀기(鬼氣)가 흘러나왔다.
마치 흡혈귀 왕과 처음 대면할 때와 비슷한 정도의 폭발적인 압박감이었다.
모든 파티원의 시선이 파티장에게로 모였다.
마침내 파티장이 선언했다.
“죽여. 저건 지금 인간이 아니다. 마물이지.”
파티원들이 주저없이 영창과 정신집중을 시작했다.
전사들은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그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처음부터 우진을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니까.
비록 이렇게 직접 몸에 칼을 찔러넣는 방식이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순식간에 우진의 몸에 몇 발의 마법과 스킬, 그리고 칼과 창이 박혔다.
그의 눈에 붉은 기운이 사라지며 몸에 힘이 풀렸다.
어차피 육신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우진의 의식 속에서는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아의 백치가 흡혈귀 왕의 의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의식이 오히려 선명해지며 우진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왕위 찬탈]
[왕명을 계승합니다.]
공명정대한 시스템의 규칙에 따라, 우진이 흡혈귀 왕을 죽인 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런 상태론.......’
문제는 그가 왕명을 얻자마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잔불처럼 사라지던 흡혈귀 왕의 의지가 마지막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진이자 흡혈귀 왕이 된 자가 세상의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이런 최후는 불허한다. 왕으로서 명하노니... 나는 가장 미천한 존재가 되어
서라도 다시 살아날......>
‘다시 살아날 기회가 있다면.’
<지옥 밑바닥에서 너희를 찾아갈 것이다...!>
‘이렇게는 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진의 의지에서 벗어나, 흡혈귀 왕의 마지막 스킬이 발동했다.
‘먼지는 먼지로.’ <재는 재로.>
가장 미약한 언데드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종(種)의 보전 스킬.
‘부활.’
<생을 버려 생을 얻는다.>
인과가 역전되고 왕은 밑바닥의 노예가 되기 위해 생을 되감는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기현상이 발생했다.
저 멀리 흡혈귀 왕의 시체.
그 쓰러진 손에 들린 펜던트.
거기서 나온 빛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 털썩......
그 순간 우진의 무릎이 꺾이고 바닥에 쓰러졌다.
파티장의 마지막 일격이 그의 심장을 관통한 상태였다.
— 콰콰쾅...!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파티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은 끝났다. 흡혈귀 왕 본체 쪽은?”
“시체까지 전부 불타버렸군. 뭔가 스킬을 사용한 것 같은데....”
“젠장. 우진 이 새끼도 바스러지고 있는데...? 몸이 무슨 잿더미처럼......”
“사라진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우진의 의식 또한 사라졌다.
그는 핏물과 함께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
[월드에서의 생을 종료합니다.]
마치 게임이 끝난 것 같은 메시지였다.
시스템이 있는 세상.
마지막은 인간답게 보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우진은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배신당했다.
아니, 그게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은 멍청하게 이용당했다.
뭐가 됐든 결과는 같고 그는 죽었다.
그렇게 우진이 죽음을 받아들이려 할 때였다.
무언가 다른 메시지가 들려왔다.
[왕위를 계승합니다.]
[월드에서의 생을 종료합니다.]
[왕위를 계승합니다.]
[월드에서의 생을 종료합니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월드에서 생을......]
[왕위를......]
수천 개의 꼬아진 실타래가 그의 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뒤에선 아까 본 펜던트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마.’
들어본 적이 있다.
시간을 되감는 펜던트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
온갖 기상천외한 아이템이 가득한 월드에서도 유별나게 특이한 물품이었다.
‘만약 저게 그거라면......’
선택지는 없다.
우진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되감기고 실타래들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끝없이 이어졌다.
그의 몸이 빛나고 수천 개의 시간축을 넘어 어딘가에 도착했다.
[진정한 탄생을 축하합니다.]
[’월드’에 입장합니다.]
그것은 그가 월드에 ‘탄생’한 시점이었다.
*
월드라는 장소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차원 집합소였다.
지구, 그리고 지구 기준으로 판타지와 중원(中原)이라 불릴만한 차원의 존재
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처음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지구와 판타지, 중원 등의 ‘원래의 세계’가 그저 허상이며, 월드에 투입할 영
혼을 배양하고 육성하는 일종의 튜토리얼과도 같은 세계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진도 마찬가지였다.
부정하려고 했다.
월드(WORLD).
이곳이 진짜 세계다.
유일하고 진정한 단 하나의 세계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각자의 차원에서 살아온 기억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진은 조금 달랐다.
[진정한 탄생을 축하합니다.]
[’월드’에 입장합니다.]
원래라면 이해할 수 없는 알림이어야 했지만 우진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
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왔다.’
그는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이 약육강식의 세계, ‘월드’에 처음 입장한 순간으로.
그는 어두운 공간에서 두 번째로 월드의 알림을 들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선택받았습니다.]
안내 음성의 말은 우스웠다.
영혼이 파기되지 않고 월드에 탄생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고 하지만
저건 다 개소리였다.
왜냐면 이제부터 자신은 그야말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월드에 도착한 존재는 모두 바닥부터 시작해서 스스로 성장해나가야 한다.
전생의 우진 또한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하며 겨우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
할 수 있었다.
‘그 최후는 비참하기 그지 없었지만......’
우진이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자신의 최후를 떠올렸다.
전생이라 그런지 벌써 아주 예전의 일 같았다.
아마도 이 어두운 장소가 월드에 적응시키기 위한 ‘체념의 공간’이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우진은 차분히 이 상황을 분석했다.
아마도 3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꼬여 이런 기현상이 발생한 것 같았다.
첫째는 자신이 계승한 흡혈귀 왕의 왕명.
그리고 둘째는 그 상태에서 멋대로 사용된 최후의 생존 스킬, 부활.
마지막은 시간을 되돌리는 지고의 아티팩트 ‘펜던트’의 효과.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자신은 우진이자 우진이 아닌 존재가 되어 과거로 돌아왔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일단은 정확히 확인을 해봐야겠군.’
그는 상태창을 불렀다.
원래라면 그 존재도 몰라야 하지만 우진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체념의 공간’에서도 상태창은 떠올랐다.
[상태창]
[우진]
[LV : 1]
[종족 : 언데드]
아래로 다른 정보들이 더 있었지만 일단은 저 종족란이 중요했다.
‘진짜 언데드라니.......’
자신이 정말로 언데드가 되었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육신을 살폈다.
몸이 망자의 것이 된 것처럼 바짝 마르고 핏기가 없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외에 아직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하지만 우진은 이런 육신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상관없다. 몸이 어떻든 상관 없어. 재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
월드에서의 삶을 재시작하게 되었다.
이건 기회다.
게다가 정보창의 아래엔 더 특별한 정보가 있었다.
[고유스킬 : 계승]
아무래도 흡혈귀 왕의 스킬이 자신에게 적용된 것 같았다.
아마도 그 마물은 이것으로 다시 왕명을 획득하려 했으리라.
‘아니, 잠깐. 흡혈귀 왕의 고유스킬은 ‘영역 지배’였는데...?’
순간 우진이 기억이 돌아왔다.
파티장이 읊어주던 흡혈귀 왕에 대한 공략들.
자신의 영역에서 몇 배로 강해지는 스킬, ‘영역 지배’ 덕분에 왕이 될 수 있
었던 마물에 대한 설명.
한 몸에 고유스킬이 2개일 수는 없으니 이건 흡혈귀 왕의 스킬이 아니다.
‘그렇다면 설마...!’
이건 자기 자신의 고유스킬이란 뜻이다.
아무래도 3가지 요소가 꼬여 과거로 돌아오면서 스킬에도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설마 왕명을 가진 상태로 월드에 탄생해서...?’
원래라면 불가능한 순서 덕분에 특수한 스킬이 생겨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스킬까지 주어졌다.
원래 있던 무아의 백치는 깨끗하게 사라졌지만, 과거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그 스킬은 없어도 된다.
‘젠장....’
우진의 뇌리에 다시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수십 발의 마법과 수 개의 병기에 꽂혀 처참하게 맞이한 자신의 최후.
그 결과 자신은 죽은 채 살아나 언데드가 되었다.
하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복수를 꿈꾸게 되었다.
‘이건 죽은 자의 복수이자... 과거로부터의 복수다.’
만약 이게 주마등 같은 게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면.
정말로 자신이 다시 살아갈 기회를 얻은 거라면.
‘이젠 그렇게 멍청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그때 암흑의 공간에 서서히 빛이 들어왔다.
월드에서의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진에게는 두 번째의 삶이자, 진정한 삶의 시작이었다.
[반갑습니다. 우진 님.]
[월드에 입장하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