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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47화 (247/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4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47화

247화

“결국 저런 결말이 나왔군.”

약소국으로 이어지는 길목 앞에 한 무리의 군대가 나타나 우리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숫자나 구성은 우리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마르시아 제국이나 연합군 대부분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약소국의 군대만이 나타난 것이다.

사방에 배치해 둔 정찰대로부터 다른 보고도 올라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미끼로 쓰고 후방을 노린다거나 하는 전략도 아니었다.

‘적어도 반나절 내로 우리 뒤를 잡을 방법은 없다.’

연합군은 시간적인 문제나 지형적인 문제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반드시 지켰어야 할 국경이 고작 하루 만에 뚫린 게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루시우스는 이미 자신감이 가득했다.

큰일을 해준 아인츠발트와 선봉은 휴식을 취하느라 후방에 있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병력의 숫자도, 사기도 압도적이고 지형까지 나쁘지 않다.

유리한 건 아니지만 그리 불리하지도 않으니 루시우스라면 어렵지 않게 적들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사실상 승리가 예정된 전투인 것이다.

“일단 대화를 해보지.”

그러나 나는 전투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전령을 보내자 일단 상대도 이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승산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전투를 치러봐야 자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양측 군대를 사이에 두고 나는 수뇌부를 만날 수 있었다.

“도리안 왕국의 베탄 백작입니다.”

“루븐 왕국의 웨이버 백작입니다.”

베탄 백작이 속한 도리안 왕국은 이종족이 세운 국가로 주류는 웨어캣이라고 불리는 고양이 수인족이다.

그들은 장신구를 만드는 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고 몸놀림이 가벼운 편이었다.

반면 웨이버 백작이 속한 루븐 왕국은 이종족에 매우 호의적일 뿐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들의 왕국이었다.

“그래. 만남을 갖자는 짐의 요청을 받아줘서 감사하네.”

난 먼저 자리에 착석하며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옳은 선택인지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었지만.

루븐 왕국은 상관없는데 도리안 왕국이 문제였다.

‘인간이랑 큰 차이는 아닌데.’

힐끔 베탄 백작의 외형을 살폈다.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다.

분명 큰 차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요정족과 비교했을 때 수인족은 인간과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편이니까.

아예 두 발로 걷는 짐승 같았던 웨어울프에 비해서는 그래도 인간과 많이 닮았지만.

‘에라, 모르겠다.’

이제 와서 기껏 준비한 계획을 철회할 수도 없는 일.

지금은 저지르고 봐야 할 때였다.

“혹시 이 자리에서 항복을 권하실 생각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죽더라도 싸우다 죽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왕국의 군대로서 패배가 두려워 싸움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두 왕국의 수뇌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눈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대를 이끌고 연합군을 빠져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싸우거나 항복하거나. 선택지가 둘뿐이라고 생각하나?”

난 그런 그들의 각오에 균열을 일으켰다.

생각지도 못한 제3의 선택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만약 싸운다면 결과는 자명하지. 전투의 결과뿐만이 아니라 그대들의 조국의 운명 역시 말이야.”

두 사람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든 그냥 항복해 버리든 조국이 멸망한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야 아무리 항복하라고 해봐야 들을 턱이 있나.

그러나 그 멸망을 피할 수 있다면?

“그렇지만 그 결말을 피하는 선택이 있다면 받아들이겠는가?”

“혹시 속국이 되라는 제안입니까?”

베탄 백작의 눈치가 빨랐다.

그는 내가 할 제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뭐, 형식적으로는 속국이 아니라 우방국이 될 것이다.”

외교라는 건 상대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다.

대놓고 너희는 내 속국이라고 말한다면 듣는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다.

그게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도.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는 나름대로 체면치레를 하게 해줄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왕국으로서의 지위도 유지시켜 주지.”

공국으로 격하시키지 않고 왕국으로 남겨주겠다는 말에는 베탄 백작도 조금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이 정도면 멸망을 앞둔 입장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중견 규모의 국가도 아닌 약소국으로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제안을 대가 없이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속국에게 아무것도 뜯어내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힘으로 짓밟을 수 있는 걸 굳이 유지시켜 주는 것이니 나름대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체면을 챙겨주는 만큼 커지기 마련.

베탄 백작도 그 사실을 알기에 흥분하던 기색이 가라앉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조건이 걸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런 제안을 할 이유가 없었다.

“두 가지만 요구하지.”

내가 이들의 왕국에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우리 네패스 제국의 전쟁을 도울 것.”

“군사를 내달라는 것입니까?”

“그래 주면 좋을 테지만…….”

아군을 늘릴 수 있다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난 고개를 내저었다.

50만의 병력을 이끌고 온 네패스 제국과 달리 도리안 왕국이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는 기껏해야 2~3만 사이다.

약소국이 괜히 약소국인가?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약소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징병을 요구한다면 더 모을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민심은 박살 난다.

나라를 유지하는 대가로 젊은이들의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면 이를 따를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뭐, 도리안 왕실에서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들의 지위를 보전하기를 바란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국가가 아니었지.’

도리안 왕국의 국왕은 선한 인물이었다.

사전에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는 절대 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국왕을 갈아치우고 내 말에 충실히 따라줄 꼭두각시를 세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는 큰 반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왕실의 인물이 대체로 온화했으니까 정통성이 없는 놈을 올려야 하니까.’

목에 칼을 들이밀고 따르게 하거나 인질을 잡는 방법도 있지만 어느 쪽이라도 후폭풍이 불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거친 방법보다는 좀 더 온건한 쪽이었다.

그래야만 그들을 반발 없이 흡수할 수 있을 테니까.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결국 최종 목표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이다.

그러니 첫인상을 비교적 좋게 심어야 했다.

“물자를 지원하고 길을 내주는 것으로 충분해.”

“정말 그걸로 된단 말씀입니까?”

내가 군사를 요구하지 않자 베탄 백작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대들이 그리 도움이 될 거 같지 않네.”

베탄 백작은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해서도 안 되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여기서 반박하면 군대를 내주겠다는 소리밖에 안 되니까.

물론 그 결정권은 베탄 백작이 아니라 도리안 왕국의 국왕에게 있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베탄 백작은 첫 조건이 너무 수월하자 오히려 미심쩍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두 번째 조건이 너무 가혹하기에 일부러 하나는 쉬운 걸 준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게 정석이기도 했고.

하지만 두 번째는 경우에 따라서는 첫 번째보다 더 쉬운 내용이었다.

“도리안 왕실에 왕녀가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네.”

피의 연회로 기존 왕실이 사라지고 새롭게 들어선 도리안 왕실은 식구가 굉장히 많았다.

그중 친인척은 제외하고 국왕의 적통만 무려 스물에 달했다.

이는 도리안 왕국이 약소국인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혼인을 통해 타국의 유력자들과 손을 잡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자녀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이용하기 좋은 틈이었다.

“그중 한 명과 혼인하도록 하지.”

잠깐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혼인 동맹.

이미 몇 번이나 써먹었지만 역시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책이 없었다.

도리안 왕실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조금만 알아본다면 내가 부인들에게 굉장히 잘 대해준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

이데아가 나중에 사트리안 왕국의 영토를 돌려받는 것을 대가로 레일리를 잘 돕고 있고, 두 사람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폐하, 외람되오나 저희 도리안 왕국은 웨어캣의 국가입니다.”

도리안 왕국이 인간의 국가가 아니란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국가란 주류 구성원이 아니라 왕족이 인간인 경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리안 왕국은 주류 종족과 왕족 모두 웨어캣으로 이루어진 국가.

다른 이종족이 많다고 하지만 기껏해야 백작 한둘일 뿐.

귀족의 8할이 웨어캣이며 구성원의 6할도 그렇다.

즉 나는 인간이 아닌 종족과 혼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과 혼인만 해야 한다는 법은 우리 제국에 없네.”

“아니, 물론 다른 종족과 맺어진 사례도 찾아보면 많지만…….”

그런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몇 번 있었다.

서부에는 기록으로 남아있고, 이종족이 많은 동부에는 지금도 그런 케이스가 제법 있다.

그러나 절대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특히 지위가 높은 이들은 종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에 굉장히 집착했다.

당장 내 자식이 인간이 아닌 것과 혼인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결혼이라는 게 둘만 좋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까지 생각해야 하는데 혼혈아가 나올 것이다.

그나마 인간이나 요정족처럼 외견상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모를까 수인족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쪽이 될 공산이 큰 것이다.

“인간과 웨어캣의 혼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네패스 제국은 인간들의 국가가 아닙니까?”

“대륙을 통일하면 그런 구분도 무의미할 것이고.”

인간이 주류라고 해서 인간이 아닌 종족을 다 배척하고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동부에서는 더욱.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위는 황비로 약속하지.”

후궁 따위가 아니라 엄연히 정식으로 인정받는 부인으로 올리겠다고 말하자 베탄 백작의 고민도 깊어졌다.

애초에 결정권이 없는 이와 이렇게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저희 루븐 왕국도 동일한 조건입니까?”

밀려나 있던 웨이버 백작이 불쑥 끼어들며 같은 조건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하긴 인간들의 국가인 루븐 왕국의 입장에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오히려 파격적이다.

왕국을 유지해 주고 군사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왕녀를 후궁이 아니라 황비로 올리겠다고 했으니.

세부적인 걸 논의해야겠지만 난 절대 그들에게 무리한 조건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야만 쉽게 받아들여질 테니까.

오히려 약소국이기에 이렇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들이 뭘 하더라도 나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으니 그냥 쉽게 회유하려는 것이다.

“아, 원한다면 제국의 귀족과 그대들 왕국의 귀족 지위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내용도 추가하지.”

난 미끼를 하나 더 던졌다.

두 국가의 힘의 차이가 불균형할 경우 기존 작위나 지위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중견국도 안 되는 약소국의 귀족을 대제국의 귀족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 자체가 안 맞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 현재 네패스 제국의 남작령은 약소국 백작령과 비교했을 때 거의 절반에 달하는 면적을 지니고 있었다.

뭐, 이건 우리 쪽 남작령이 너무 큰 탓도 있지만.

귀족의 숫자는 적고, 영지를 놀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 직할령으로 둬서 관리할 수도 없으니 근처 영지를 던져준 것이다.

물론 공짜가 아니라 나름대로 대가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영지의 가치에 비해서는 헐값에 넘긴 게 맞았다.

그러고도 땅이 남는 건 문제였지만.

“제가 전하의 어심은 모르지만 분명 기뻐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이런 이유로 웨이버 백작은 혹시 내가 말을 바꾸지는 않을까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함정이 있었다.

지위를 동등하게 보장한다고 해봐야 어차피 귀족들의 힘은 가지고 있는 영지에서 나오는 법.

그리고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아도 뒤에서 뭐라고 하는 이들은 많은 법이다.

내가 그걸 일일이 통제할 수도 없고.

‘뭐, 이런 부분이야 어차피 국왕이 판단할 일일 뿐 이 자리에 있는 지휘관이 관할할 영역은 아니지만.’

웨이버 백작은 무인으로 그런 부분에는 생각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에게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쯤 하면 나로서는 충분히 정성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베탄 백작이었다.

분명 내가 내건 조건은 매우 파격적이나 종족이 다르다는 벽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어디든 혼혈아가 좋은 취급 받는 경우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건 애초에 자식이 생길 때의 일이다.

어떤 황비도 나에게서 자식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데아조차 예외가 아닌데 황비 자리를 보장한다고 멋대로 후사까지 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이는 큰 문제였다.

‘그렇다고 제국의 황제에게 후사를 보장하라는 내용을 공문으로 남길 수도 없을 테고.’

그건 대놓고 나를 종마로 쓰겠다는 소리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저지를 리 없다.

결국에는 왕녀 하나를 희생하는 셈 치고 타협하게 될 것이다.

단지 내가 과연 인간이 아닌 부인을 잘 대할 수 있을지가 문제일 뿐.

“으음.”

난 다시 한번 베탄 백작을 살펴보았다.

그는 남자였고 나이도 다르지만 그래도 어떤 부분이 인간과 다른지 정도는 참고할 수 있었다.

웨어캣의 미적 기준이 인간과 다르단 이야기는 못 들었고.

‘실제로 초상화 하나를 입수하기도 했었지.’

다니엘이 어느 웨어캣 귀족 영애의 초상화를 하나 구해 오기도 했다.

초상화라는 게 아무래도 지구에서처럼 조작이 가능한 것이니까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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