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4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46화
246화
【 최종 결전 】
이종족들의 회유가 끝난 뒤 다시 한번 군대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우선 목표는 마르시아 제국 주변의 약소국들이었다.
그들을 먼저 노리기로 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약한 쪽을 먼저 상대하는 게 전술적으로 효과적이기에.
만약 마르시아 제국을 먼저 쳐서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동부 전체에 큰 충격을 줄 수 있겠지만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상대하기 쉬운 적을 먼저 처리하기 위해 약소국을 공격하기로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연합을 만든 약소국과 마르시아 제국이 사실 그렇게 끈끈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서부를 점령하기 전까지 서부의 국가들이 서로 싸웠듯이 동부 역시 각국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했다.
단지 네패스 제국이라는 강적이 나타났기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을 뿐.
난 그 점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마르시아 제국에서 지원군이 나올 가능성은 낮겠지.’
국경의 한 부분이 뚫리면서 연합군은 급하게 전선을 새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선이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곳은 당연히 마르시아 제국이었다.
연합군의 중추이자 최강국으로서 자신들의 안위를 우선시한 것이다.
무조건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약소국 몇 개가 무너지는 것보다 마르시아 제국이 무너지는 쪽이 치명적인 건 사실이니.
전략적 가치를 생각했을 때 마르시아 제국을 우선하는 건 분명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 옳은 선택을 다른 국가들이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들의 조국이 위험한데 이를 무시하고 연합군에 계속 남는다면 조국의 멸망을 두 눈 뜨고 지켜본다는 것과 같았으니.
‘그리고 연합군은 단결이 무너지면 끝이다.’
분명 마르시아 제국도 여기까지는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경이 너무 빨리 뚫렸기 때문이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약소국까지 이어지는 대로가 그것이었다.
전략적으로는 그게 옳았다.
‘뭐,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서는 피해를 감수하고 어떻게든 길을 틀어막는 쪽을 고집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일 내 예상이 빗나가서 연합군이 약소국을 지키기 위하여 일전을 벌인다면 그 또한 나쁠 것 없었다.
전투를 바라는 건 이쪽이었으니까.
* * *
바질 후작은 바트란 백작과 머리를 싸맨 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네패스 제국이 노린 지점은 실제로 뚫리게 되면 약소국까지 이어지는 길을 내주어야 하는 장소였다.
당연히 그만큼 중요한 장소였기에 많은 병력을 배치했고 총사령관인 바질 후작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응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손쉽게 패했고 가장 중요한 거점을 잃으며 적들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미 국경을 뚫린 여파도 나타나는 중이었다.
네패스 제국의 별동대에 유린당했던 영주들은 뒤늦게 지원군을 보내는 대신 항복하거나 도망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소식으로 이미 아군의 사기는 대폭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는 문제였다.
후방에 새롭게 전선을 만들면 네패스 제국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는 다른 지역에 길게 뻗어있던 병력이 상당수 합류하고 각 연합으로부터 지원군도 도착해 수적으로도 밀릴 게 없었다.
반면 약소국들을 지키기 위해 일전을 벌이려면 아직 다 모이지 않은 부족한 병력으로 싸움을 치러야 했다.
그것도 얼마 전에 패배해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병력을 데리고.
‘생각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여기서는 물러나는 게 맞다.’
바질 후작은 이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다.
전술적으로 봤을 때 지금 네패스 제국을 막겠다고 싸우는 건 아군을 전멸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반면 조금만 뒤로 물러난다면 그 시간 동안 많은 아군을 합류시켜 힘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연합군이 흔들리게 될 거야.’
문제는 약소국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열게 될 경우 연합군에 불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해당하는 국가의 병력들은 연합군에서 이탈해 조국을 지키려 할 것이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보라고 말한들 조국이 멸망한 다음 이기는 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이탈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연합군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적어도 네패스 제국군이 공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국가들은 연합군에서 빠져나가겠지.’
그들을 미끼로 쓰고 네패스 제국의 뒤를 치는 전략도 고려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한둘도 아니고 50만에 이르는 대군의 뒤를 잡으려면 필요한 조건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경로는 그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국경을 뚫린 게 치명적이야.’
국경에서 조금만 버텼더라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며칠 이내로 몇 배나 되는 아군이 합류해 네패스 제국의 진격을 틀어막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 잠깐을 버티지 못한 게 너무 치명적이었다.
“나흘만 버텼더라도…….”
바질 후작은 한탄했다.
세상에 네패스 제국이 그렇게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알았어도 제대로 방비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두 세력의 격차는 확연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던 거지?”
기사들이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쓰러졌던 마법사들은 모두 챙겨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마법사들로부터 바질 후작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마나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쓰러졌다는 이야기.
바질 후작은 지금껏 그러한 형태의 마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문으로는 접해봤습니다만.”
“소문?”
그런데 바질 후작의 한탄을 들은 바트란 백작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네패스 제국의 황제는 어마어마한 마나를 갖고 있는데 마법사가 이를 느끼면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진다는 내용이지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었다.
직접 마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감지하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바질 후작 본인이 마법사였기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쓰러질 정도라면 그런 마나를 가지고 있는 아인은 어떻게 살아있다는 말인가?
‘분명 엄청난 마나였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마나의 규모가 아무리 커봐야 그걸 감지한 걸로 쓰러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아.’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내용에도 어느 정도 정보는 있었다.
아인이 마법사를 쓰러트릴 수단은 갖고 있었다는 것.
바질 후작은 갑자기 바트란 백작이 원망스러워졌다.
아무리 초대 건국 황제가 된 아인의 주변에 온갖 소문이 다 붙었다지만 그중에 몇 개는 진실이거나 진실에 기반했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그런 정보를 얻었다면 저번 참패와 같은 일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의 가정일 뿐 저런 헛소리를 듣고 뭔가 단서를 얻을 가능성은 없었다.
바질 후작은 그저 패전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회피하고 싶었다.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나?”
바질 후작의 추궁에 바트란 백작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네패스 제국이 로스니아 제국을 흡수한 뒤 연합이 결성되었고 그들은 우선적으로 아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렇게 쌓인 정보의 양은 실로 방대했으나 그중 대부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용이었다.
소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래고니안인 탈론이 실제로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다거나.
요정족 검사인 아인츠발트는 사실 검사 흉내를 내고 있는 마법사라거나.
릴리아나에겐 일부 부족에서만 전승되던 전쟁의 여신이 현현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붙어있었다.
아인의 소문 역시 대부분은 그런 터무니없는 내용이었고 바트란 백작이 이를 무시한 것 역시 당연했다.
그러나 상황이 나빴다.
평상시라면 오히려 그런 헛소문을 왜 말하냐고 핀잔을 주었을 바질 후작은 어떻게든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트란 백작이 소문을 알고 있었다고 하니 이는 나름대로 괜찮은 구실이었다.
“후작 각하. 이런 내용이 사실일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사실도 아닙니다. 제가 접한 소문과 네패스 황제의 능력은 다릅니다!”
“진실을 숨기는 제일 좋은 방법은 거짓에 숨기는 것이다. 전략을 다루는 군사라면 그런 사실쯤은 알아차려야 하지 않는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문만 수천 개나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진실로 확인된 것이 얼마나 됩니까?”
“하지만 그게 그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을 변호하는 바트란 백작과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바질 후작의 언쟁이 시작되자 다른 지휘관들의 표정이 처참하게 변했다.
지금 이 자리는 패전의 책임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애초에 패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서로의 격차가 절망적이라는 걸 현장에 있던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영주들이 제때 지원군을 보냈더라도 국경이 뚫린다는 결과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지금 중요한 건 네패스 제국이 인접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아랫사람들이 볼까 우려스럽습니다.”
다행히 바질 후작과 바트란 백작은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예민해졌군.”
“아닙니다. 저도 바질 후작 각하께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찾은 이성 앞에 다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놓여있었다.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리스크가 작은 쪽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럴 때야말로 이종족 부대가 필요한 순간인데.’
바질 후작은 믿었던 이종족 부대의 패배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 있게 달려들었던 놈들이 네패스 제국 선봉을 맡은 기사단에 의해 무참히 쓸려나가고 내심 두려워하고 있던 갤러운도 그들에게 갇히고 말았다.
이후로 어찌 되었는지는 모르나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갤러운이 살았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놈들이 그리 쉽게 패배할 줄이야.’
이종족 부대의 패배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괴물을 상대하는 건 괴물이라고, 바질 후작은 적어도 갤러운이라면 적들의 발을 묶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갤러운은 전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놈들에게 쏟은 돈이 아깝군.’
바질 후작은 마르시아 제국의 내전에서 이기기 위해 이종족 부대를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지원했었다.
그 지원 규모는 인원이 같은 기사단의 두 배가 넘었다.
그런데 네패스 제국을 상대로 이종족 부대는 전혀 제 값어치를 해내지 못했다.
돈값을 못 한 데다 이종족 부대를 운영한다고 다른 귀족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는 걸 감수했던 일도 죄다 헛수고가 되었다.
‘아니, 애초에 네패스 제국이 너무 강한 것 아닌가?’
아인츠발트는 분명 네패스 제국 최강의 기사였다.
하지만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상식 외의 강함을 지녔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아인츠발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종족 부대를 손쉽게 상대했던 모습을 볼 때, 네패스 제국의 군대는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과는 어긋나 있었다.
‘마법사인 네패스 황제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마법사를 감지한 건 그렇다 쳐도 그렇게 먼 거리에서 정확히 제압하는 게 가능하다고?’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이라는 것이 전부 무너졌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적이니 대응할 방법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전선을 뒤로 물린 채 버티는 것도 상식에서 근거한 많은 머릿수로 적을 제압한다는 방법을 따르려는 것뿐이니.
‘과연 아군이 늘어난다고 해서 네패스 제국을 막을 수 있을까?’
의문과 두려움이 연이어 들이닥쳤지만 바질 후작은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지휘관들은 모두가 바질 후작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네.”
한참을 고민하던 바질 후작은 결국 주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른 지휘관들의 뜻을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당장 조국이 위험에 처한 지휘관들은 네패스 제국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시아 제국 소속이거나 공격받을 염려가 없는 이들은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서로의 이득만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어려운 싸움을 하거나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해결책이 정녕 없는 것인가?”
바질 후작의 절망스러운 어조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생각나는 계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금 전 바질 후작이 패전의 책임을 바트란 백작에게 돌리려고 했던 행동이 결정적이었다.
지휘관으로서 패배하는 것보다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은 각자의 이득을 위한 결론을 내리며 분열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