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4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41화
241화
마을을 점거한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은 촌장에게 말도 안 되는 서약을 받아낸 뒤 자경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자경대장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조금이라도 저항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투가 가능한 자경대원들은 모두 기사단에 붙잡혔고 그들에게 끌려다녀야 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피오는 기사들의 칼날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몰라 걱정했다.
그러나 자경대장은 생각보다 느긋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피오는 그런 자경대장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예 살기를 포기한 게 아니고서야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대장님은 왜 그렇게 태연하십니까? 전 무서워서 죽겠는데.”
“멍청아. 죽일 거라면 벌써 죽였겠지.”
자경대장은 피오에게 핀잔을 주었다.
자경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는 건 자신들이 영주에게 합류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막상 전투력을 상실한 자신들을 죽이지는 않고 번거롭게 끌고 다니고 있었다.
이는 적어도 당장 죽일 생각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거야 주변 지리라도 물어보려고 그러나 보죠. 하지만 다 쓰고 나면 죽이지 않겠습니까?”
“너 같으면 길잡이 하나 시키려고 이만한 인원을 끌고 다니겠냐?”
자경대장의 반문에 피오는 대꾸하지 못했다.
확실히 길을 물을 거라면 이렇게 많은 인원은 필요 없었다.
자신들의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도 돌면서 모은 자경대의 숫자가 어느새 백을 넘었으니.
이만큼 숫자가 많아지면 관리하고 감시하는 것도 고역이다.
“그럼 대체 왜 끌고 다니는 거랍니까?”
“점령하려고.”
자경대장은 간단하게 답을 내렸다.
처음에는 되도 않는 허황된 서약서로 복속을 받아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옆에서 계속 지켜보니 슬슬 감이 잡히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를 해칠 생각이 없다. 위험성이 있는데도.’
자경대가 상대에게 합류하는 걸 원하지 않는 주제에 무기만 없앴다.
만약 자신이 저들의 입장이라면 적어도 자경대는 살려두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관리나 감시도 힘든 인원을 굳이 끌고 다닌다.
이는 상대가 가능하면 온전하게 자신들을 흡수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피를 흘리지 않고 점령해 버리면 반발도 나오지 않는 법이지.’
멍청하게 상대를 우습게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기사단의 무장 상태만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는 피를 볼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능력이 충분함에도 참아주는 거였으니까.
‘서약서를 받은 건 아마 영주에게 보내는 도발이겠고.’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이 영지를 침범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보통의 영주는 무서워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사단이 싸움은 하지 않고 복종 서약만 받고 있다면?
영주는 체면 때문에라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사단의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지금껏 헤아려 본 결과 네패스 제국 기사단의 숫자는 약 80명.
기사로 그 정도라면 분명 상당한 전력이지만 이를 보필해 줄 다른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포로로 끌고 다니는 건 일반인도 아닌 나름대로 훈련된 자경대 100여 명.
영주의 군대가 나서서 혼란만 일으켜도 합세해서 싸울 가능성이 매우 높은 병력이다.
그야말로 잘 차려진 미끼였다.
‘그래, 미끼란 말이지.’
자경대장은 이게 함정이란 걸 알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실력은 절대 영주의 군대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괴물도 있고.’
자경대장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다른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여기사.
여성의 몸으로 이 자리에 있는 정예 기사들을 지휘하는데 어느 누구도 불만을 가진 낌새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눈빛과 행동에는 여기사에 대한 존경심이 물씬 묻어났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난 기사일수록 남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다.
그렇기에 자경대장은 여기사가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이 순순히 따를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기사들이라도 겨우 80명으로 그런 게 되겠습니까?”
“되지. 되고도 남지. 이놈들은 보통 기사가 아니야.”
피오는 자경대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기사들의 실력 말고요.”
“그럼 뭐?”
“점령이라면서요? 마을만 해도 수십 갠데 여기에 있는 숫자로 점령이 되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지적당하자 자경대장은 눈을 부릅떴다.
기사들의 실력이 워낙 대단하기에 영주의 군대를 이길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설령 영주의 군대를 몰살시킨다고 해도 겨우 80명의 인원으로 영지 하나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다.
“설마?”
자경대장은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국경을 몰래 넘어온 병력이 또 있을까 싶지만 어떤 식으로든 넘었다면 두 번을 못 할 이유는 없었다.
뿌우우우!
그때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들은 자경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영주님의 군대가 온 거 같습니다.”
반면 피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영지를 들쑤시고 다니는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을 토벌하기 위해서 영주가 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영주의 패배를 점치고 있던 자경대장에게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이 근처에 있는지는 모르나 기사단 말고 다른 병력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오오! 영주님께서 오셨다.”
“영주님!”
자경대원들은 영주의 군대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자경대장은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의 주시했다.
저 멀리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영주의 군대는 약 1,000여 명.
상대가 상대이기에 영주는 모을 수 있는 전력을 모두 끌어모은 듯했다.
그건 분명 올바른 판단이지만…….
‘토벌하려고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망했어.’
80 VS 1,000.
거기에 붙잡힌 자경대가 풀려나기라도 하면 100명이나 더 늘어난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좋게 흘러갈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콰아앙!
영주의 군대는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과 충돌하기도 전에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갑자기 시뻘건 불길이 영주의 군대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뭐, 뭐야? 어디서 갑자기 불길이?”
자경대는 눈앞에서 아군이 당하는 모습에 당황했다.
혼란이 일어나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연달아서 일어난 거센 화마가 아군 군대를 집어삼키고 그 틈을 탄 기사단의 돌격이 그들을 유린했다.
“미친…….”
머릿수가 많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라고 기대했던 자경대원들은 그 처참한 광경에 얼어붙었다.
1만이라면 모를까 고작 1천으로는 어찌하지 못할 정도의 격차였다.
“잠깐.”
그때 한 자경대원이 주변의 시선을 모았다.
“적 대장이 남아 있잖아?”
자경대원은 한쪽을 가리켰다.
기사들을 이끌던 여기사는 돌격에 합세하지 않은 채 전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싸움이지만 지금 이곳에는 자경대원이 100명이나 있었다.
반면 여기사의 곁에 남은 기사들의 숫자는 고작 넷.
합쳐서 단 다섯이었다.
‘왜 같이 가지 않았지?’
자경대장은 어째서 여기사가 함께 나서지 않았는지 의문을 느꼈다.
실력이 없어서는 절대 아니다.
그때 여기사의 손이 검에 가깝게 위치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전장에서 언제든 무기를 뽑을 준비를 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미 전황은 압도적이었으니까.
‘설마?’
자경대장은 그제야 왜 여기사가 움직이지 않았는지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검을 들어야만 할 일일 터.
지금 상황에서 그런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 이용 가치는 없어졌지!’
영주가 군대를 이끌고 나온 시점에서 이미 자경대는 미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다.
물론 원활한 점령을 위해서는 해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어떤 식으로 항복해도 저항하는 이들은 나오기 마련.
한 번쯤은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신호하면 다 같이 덮치자. 적 대장만 잡으면 영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어지는 자경대원의 말에 피오는 눈을 반짝였다.
아군의 숫자는 백이 넘고 적은 고작해야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무기가 없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이 정도 숫자 차이라면 그쯤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게다가 힘 하나는 자신 있었고.
“그만둬라.”
자경대장은 서둘러 대원들을 만류했다.
이건 함정이었다.
“어떻게 그만둡니까? 이대로 있으면 영주님의 군대가 다 죽는다고요!”
하지만 대원들은 자경대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적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하는 아군의 모습에 이미 냉정을 잃은 뒤였기 때문이다.
“이건 함정이니까 그만두라고! 나서면 다 죽게 될 거야!”
“그렇게 무서우면 댁은 빠져! 뭐 해? 빨리 덮쳐!”
자경대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근처에 있던 자경대가 그를 밀쳤다.
그것이 신호였다.
소란을 듣고 행여 상대가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 자경대는 남은 기사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안 돼!”
뒤로 나동그라진 자경대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피오는 넘어지는 자경대장을 잡아주느라 얼떨결에 나서지 않고 남아 있게 됐다.
그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여기사를 비롯해 남은 기사들에게 달려들던 동료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를.
쐐애액!
다섯 명의 기사들은 전혀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경대원들이 달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그리고 피바람이 몰아쳤다.
적은 겨우 다섯인데 자경대원들은 열 이상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그제야 자경대원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적들은 자경대가 날뛸 걸 몰라서 남은 게 아니었다는 걸.
그들이 덤벼들어도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에 남은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압도적인 무력을 목격한 자경대원들은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무기가 있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실력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저게 기사라고?’
피오도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냥 팔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뽑지도 않았던 칼날이 동료들의 몸을 토막 내고 있었다.
자신이 꿈꾸고 있던 기사와 비교해도 그 힘의 차이가 확연했다.
“젠장! 다들 납작 엎드려!”
그때 자경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경대원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자경대장은 그렇게 엎드린 부하들의 등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는 부하들을 대표해서 기사들을 향해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런 자경대장의 행동에 기사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가만히 있었다면 모를까 우리를 공격하려던 놈들을 살려주라고?”
기사의 다그침에 자경대장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도 모두를 죽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자경대가 잘못을 저질러 죽였다는 걸 알리려면 그 사실을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적군인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테니 몇 명쯤은 살려둘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사실을 전달해 줄 몇 명을 빼고는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네놈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으니까 넘어가 줄 수 있다. 그러니 비켜서라.”
기사 중 한 명의 말에 자경대장은 몸을 흠칫했다.
자신이 기사들을 관찰했던 만큼 기사들 역시 자신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거짓말은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아야 자신과 피오를 비롯해 나서지 않았던 몇 명만 남을 터.
‘그건 절대 안 돼!’
이미 죽은 놈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놈들이라도 살려야 했다.
그때 마침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우리는 네패스 황제 폐하께 복종을 맹세했소!”
촌장을 협박해서 억지로 한 서약이다.
하지만 그 문서는 진짜였다.
가짜였다면 양피지가 그렇게 화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아무리 황제 폐하의 기사라고 한들 제국의 백성을 이렇게 도륙할 수는 없단 말이오!”
자경대장의 외침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록 영주를 유인하기 위한 행동이라고는 하나 아인이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물론 여기서 자경대를 죽인다고 해서 책망을 받을 가능성은 없지만, 기사들로서는 찝찝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자칫 자신들이 황제인 아인의 권위를 침범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묻어버리기 위해 자경대를 모조리 죽인다면 아인의 명령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들 선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기사들은 그 판단을 자신들을 이끌던 여기사 릴리아나에게로 돌렸다.
“폐하의 명령은 본보기를 보이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지금 대가리를 쳐든 놈이 있습니까?”
릴리아나의 말에 자경대장이 즉각 반박했다.
이미 공포에 질린 자경대원들은 살기 위해서 납작 엎드린 뒤였다.
“그렇군.”
릴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압도적인 실력을 보인 것만으로 이미 명령은 이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상은 불필요한 살육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뭐지?”
릴리아나는 자신들을 설득한 자경대장의 이름을 물었다.
그냥 작은 마을의 자경대장치고 담력도 강하고 눈치도 빨랐다.
실력도 받쳐줄지는 모르나 기억해 둘 가치 정도는 있어 보였다.
“빈센트.”
자경대장의 대답에 릴리아나는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상대였지만.
“그대들이 앞으로도 폐하의 백성으로 남는다면 우리의 검이 그대들을 향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릴리아나는 빈센트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대륙 동부를 휩쓸 거대한 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