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4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40화
240화
【 서쪽에서 부는 폭풍 】
동이 터오는 시간이었다.
마을의 감시탑에 올라선 자경대 대원 피오는 몰려오는 졸음을 쫓기 위하여 주변을 둘러봤다.
주간 첫 근무자인 자신보다 부지런하게 일어난 사람들이 봄에 심어둔 작물이 자라나고 있는 밭에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밭과 작물의 상태를 살피고 비료를 뿌리며 바쁘지만 평화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왜 이렇게 지루하지?”
피오는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륙을 뒤덮었다고 하는 전쟁의 불길도 이 작고 외진 마을에는 닿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영향이 있기는 했다.
영주의 대리인이 찾아와 세금을 높였고 행상인들이 파는 물건의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았으니.
그러나 애초에 대부분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이 마을에서는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당시 피오는 혈기왕성한 소년이었다.
지루한 마을을 떠나서 도시에 가고 싶었고, 나아가 성공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려봄 직한 일은 기사가 되는 거였다.
영주가 이름 있는 용병들에게 작위를 내리며 그들을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클 동안 기다려 주지 않았어.’
마을에서는 누구나 피오의 실력을 인정했다.
또래보다 월등히 큰 체구를 타고났고 힘도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오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기사는커녕 용병이 될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영주가 무척이나 유능했기 때문이다.
피오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영주는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피오가 용병이 된다고 해도 기사가 될 길은 없었다.
덕분에 피오는 의욕을 잃고 마을의 자경대원으로 남게 되었다.
“하아.”
피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자신이 몇 년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용병으로 명성을 쌓은 뒤 영주에게 기사로 임명받았을 텐데.
재능이 있어도 시기를 타고나지 못했다.
“난 이대로 재능이 썩어가는 길밖에는 없는……. 응?”
그때 피오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보였다.
그건 멀리서 모래 먼지를 뿜으며 다가오는 한 무리의 기병들이었다.
“뭐지?”
피오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이런 변방의 한적한 마을에 기병들이 나타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기사님들이 왜 여기로?”
피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기사들을 몇 번밖에 볼 수 없었고 그마저 많이 봤을 때가 두 명이었다.
그들은 영주의 대리인을 호위할 때에만 이 마을을 찾았었다.
그렇다면 모래 먼지가 자욱할 정도로 기사들이 몰려오는 경우는 무엇이 있을까?
“설마 영주님의 행차인가?”
피오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영주의 행차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기사들이 잔뜩 몰려오는 것에 비해 마차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영주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문장만 휘날렸다.
“이상하다?”
피오는 감시탑 한쪽에 있는 책자를 폈다.
책자 안에는 근처 영지의 문장이 모조리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살펴봐도 방금 저들에게서 본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본 적 없는 문장과 다수의 기사들.
피오는 한참 헤매다가 일단 자경대장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감시탑 한쪽에 있는 종을 세게 때렸다.
다행히 자경대장은 금방 감시탑의 종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지위에 비해 상당히 젊은 남성이었다.
“무슨 일이야!”
자경대장은 감시탑 아래에서 피오를 향해 소리쳤다.
피오 역시 그를 향해 소리를 질러주었다.
“저쪽에서 본 적 없는 문장을 단 기사님들이 엄청나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자경대장은 피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마을에 기사들이 찾아올 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영주의 대리인을 지키기 위해 동행할 때도 있지만 그건 몇 개월에 한 번 있는 지극히 드문 경우에 불과했다.
하물며 몰려온다고 표현할 정도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인데 자경대장도 그런 광경은 목격한 일이 없었다.
게다가 본 적 없는 문장이라니?
“책자에 근처에서 쓰는 문장은 다 있을 거 아냐?”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닮은 것도 없습니다!”
자경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큰 실례였다.
아무리 자신이 자경대장이라고 해봐야 기사보다는 아래.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기사들이 화가 나서 린치라도 가한다면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다시 잘 찾아봐, 이 새끼야!”
자경대장은 피오가 문장을 제대로 찾지 않았다고 여겼다.
상식적으로 근처 영지의 기사가 아닌 이들이 이 마을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근처 영지의 문장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보면 알겠지!’
자경대장은 일단 마중을 위해서 자경대를 소집하고 촌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마을 주민들도 심상치 않은 상황을 깨닫고 하던 일을 멈춘 채 모이기 시작했다.
“문장 아직 못 찾았냐?”
“정말 없습니다!”
피오는 억울함을 담아 호소했다.
모양이나 색깔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조차 없었다.
두두두!
어느새 말발굽 소리는 지척까지 다가왔다.
자경대장은 속으로 피오에 대한 온갖 욕을 내뱉으며 겉으로는 손님맞이용 미소를 지었다.
이들이 물러가면 그때 피오를 손봐줄 생각이었다.
“어?”
그러나 그런 자경대장의 생각은 기사들의 복장과 깃발의 문장을 보는 순간 싹 사라지고 말았다.
정말 피오의 말대로 본 적 없는 문장이었다.
‘저게 어느 문장이야? 아니, 문장만이 아니라…….’
게다가 기사들의 장비 역시 무언가 이상했다.
변방의 기사들이 아무리 애써서 장비를 손질해 봤자 그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기사들의 경우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묻어나고 있었다.
‘영주님이 전쟁에 나섰을 때 썼던 장비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자경대장은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기사들의 장비를 영주보다 좋게 무장시킬 수는 없다.
비용부터가 터무니없을 것이고 그만한 재료나 장인을 구하는 건 어지간한 대귀족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 왕국에서 저만한 장비를 갖출 수 있는 건 근위기사단이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근위기사단이면 왕실의 문장을 썼겠지!’
근처 영지는 아니지만 왕실 문장을 모르는 머저리는 없었다.
평생 볼 일이 없더라도 반드시 머리에 때려 박아야 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 일단 경례부터 올려!”
상대를 파악하는 건 결국 실패였다.
자경대장은 얻어맞을 걸 각오하고 일단 자경대에게 경례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부하들은 그런 자경대장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한눈에 보아도 지금 마을을 찾아온 이들의 정체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사들이 풍기고 있는 위압감에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세상에 저게 진짜 기사들인가?’
‘우리 영주님의 기사들은 기사도 아니었구나.’
‘대체 어느 기사단인데 저렇게 분위기가 남다르냐?’
피오 역시 감시탑에서 경례를 올리며 감탄했다.
바로 저것이 자신이 되고 싶었던 기사의 모습이었다.
‘와! 대체 어느 기사단이야?’
다른 영지의 기사단이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피오는 저 기사단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고향이나 지금의 영주를 얼마든지 등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루온 마을을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기사님들. 저는 마을의 자경대를 이끄는…….”
“지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경례를 올린 건가?”
자경대장이 인사를 올릴 때였다.
몰려온 기사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자경대장의 말을 끊고 자신들을 아느냐고 물었다.
순간 자경대장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절대 물어보지 않았으면 했던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신 차려라!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진짜 맞아 죽을지도 몰라!’
자경대장은 지금껏 여러 높으신 분들을 모셔 왔던 경험을 되살려서 입을 열었다.
“기사님들이 모시는 분은 모르겠으나 그분을 모시는 기사님들의 용맹함과 위엄은 저 같은 무지렁이라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기사들의 위용이 대단하니 경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나름대로의 아부였다.
그에 기사들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토, 통했나?’
자경대장은 기사들이 화를 내는 대신에 웃었기에 나름대로 자신의 아부가 통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기사들이 웃은 건 자경대장의 아부가 듣기 좋아서가 아니었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상대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였지.
“우리는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이다.”
기사의 말에 자경대장과 뒤에 있던 자경대원들의 얼굴이 일제히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네패스 제국이라면 소문으로 들어본 적 있었다.
대륙 동부의 국가들이 피의 연회 이후로 내전과 전쟁으로 큰 소란에 빠져있는 사이 서부에서 갑자기 나타난 신흥 강국.
그들은 그 유명한 로스니아 제국마저 거꾸러뜨리고 대륙의 절반에 해당하는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하지만 그들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자경대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은 국경 인근도 아니었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전혀 접하지 못했으니까.
“딱히 동맹국도 아닌 곳의 기사단이 영토를 침범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기사의 은근한 어조에 자경대장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은 적군이었다.
그것도 한눈에 보기에도 정예가 분명한 무시무시한 적군.
일개 자경대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아이고, 기사님들!”
그때 후방에서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의 촌장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절대 늦으려고 늦은 것이 아니라 하필 변을 보고 있어서…….”
촌장은 자신이 늦을 수밖에 없던 사연을 이야기하며 어떻게든 기사들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니, 자경대장! 그대는 기사님들을 계속 세워둔 것인가? 당연히 회관으로 모셨어야지! 기사님들, 자경대장의 무례는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눈치는 없지만 마을에 얼마 없는 힘쓰는 놈인지라…….”
촌장은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경대장에게 호통친 뒤 기사들을 안내하려 했다.
자경대장은 그 웃기지도 않는 꼴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촌장님.”
“회관은 정리해 뒀나? 빨리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하라고 전하게!”
“그만하십시오. 이분들은 손님이 아닙니다.”
“으응?”
자경대장의 만류에 촌장은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경대원들은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이 아니라니? 그럼 무슨 적군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자경대장의 긍정에 촌장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네패스 제국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자경대장의 설명을 덧붙이자 촌장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설령 영주의 대리인이 화가 나서 노발대발해도 이토록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왜, 왜 이런 마을에 기사단이?”
촌장의 머릿속에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끔찍한 약탈이 아니고서야 이 마을에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걸 네놈들에게 설명해야 하나?”
기사가 짐짓 불쾌한 목소리로 묻자 촌장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닙니다! 이 멍청한 놈이 그만 주제넘은 망발을 지껄였습니다!”
자경대장은 촌장이 벌벌 떠는 꼴을 보다가 침착한 눈으로 기사들을 살폈다.
분위기는 무시무시하지만 의외로 적대적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을 정도로 전력 차이가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피를 볼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경대라고 해봐야 싸우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놈은 열 명도 안 돼. 머릿수를 다 합쳐도 서른이 안 되고. 그런데 이 기사들은 숫자부터 우리 곱절은 되는데…….’
자경대장은 빠르게 견적을 파악했다.
단 한 명.
자경대 전부가 달려들어도 눈앞에 있는 기사들 중 단 한 명을 이기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상대 기사의 수는 자경대의 곱절이 넘었다.
‘습격하기 전에 이미 휴식을 취했겠지. 말의 품종이나 컨디션도 매우 좋아 보이는군.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아나도 한 명이라도 살면 기적이야.’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니 저항하겠다는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자경대장은 부디 마지막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신에게 기도했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사이 촌장은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했다.
재산을 원한다면 내주면 그만.
마을을 불태우더라도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서명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촌장의 물음에 기사는 씩 웃으며 고급스러운 양피지를 꺼냈다.
촌장은 조심스럽게 기사가 내민 양피지를 살폈다.
다행히 촌장씩이나 되는 몸이라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글을 읽을 줄은 알았다.
“어? 어어?”
그러나 촌장은 자신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그곳에는 마을의 주민 모두가 네패스 제국에 복속하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만약 네패스 제국의 기사단이 영주에게 이런 걸 내밀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개 촌장일 뿐이었다.
마을이 복속하고 말고를 결정할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저에게는 이런 권한이…….”
“우리가 그걸 모를까?”
기사는 촌장의 말을 끊었다.
이걸 받아오라고 한 아인도 촌장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건 영주, 나아가 이 나라의 국왕에게 전하는 도발일 뿐이었다.
이미 크레시안 왕국 동부를 장악할 때 썼던 그 방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