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3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9화
239화
네패스 제국은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로스니아 제국을 흡수하는 한편 지금까지 급하게 세력을 키우느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세대교체도 있었다.
“은퇴라.”
현재 내 앞에는 로크가 앉아 있었다.
도미닉 남작가의 부단장으로 시작해 네패스 왕국의 근위기사단장까지 된 남자.
게다가 그 출신을 따지고 보면 용병이었다.
평민 출신에서 후작까지 올라간 티아라만큼이나 로크 역시 놀라울 정도로 신분이 올라갔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아스카의 자폭으로 인한 부상에 이제는 제법 연로한 나이다.
마법형 영웅과 달리 전투형 영웅은 세월의 흐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유일한 예외로 아인츠발트가 있으나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였고.
“의외군.”
하지만 의외였다.
로크는 야망이 컸다.
애초에 현실적인 생각을 가진 용병이었다면 기사단장 자리를 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민은 기사 작위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출세했다고 평가받으니까.
그러나 내 밑으로 들어온 뒤 로크는 더욱 큰 것을 욕심냈다.
물론 얼마든지 그래도 됐다.
승급권 덕분에 2티어 영웅에서 4티어 영웅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그런 욕심이 있었기에 로크는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다른 영웅들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난 어떻게든 남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렇기에 은퇴를 결정했다는 로크의 말은 뜻밖이었다.
부상 때문에 루시우스가 근위기사단장 자리를 잇기는 했으나 이는 임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자리가 유지될 가능성도 높지 않았고.
루시우스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매우 뛰어나기에 내 곁을 지키는 일보다는 전장에 내보내는 쪽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로크라면 이 사실을 나만큼이나 잘 알 테고.
그러니 다시 복귀를 노려볼 여지가 남아 있었다.
“저도 내심은 남고 싶습니다.”
내 이야기에 로크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계속 남고 싶다고.
“오히려 간절하지요. 그냥 근위기사단장도 아니고 장차 대륙을 통일할 폐하의 근위기사단장입니다. 욕심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만두려고 하는 거지?”
대화를 나누니 알 수 있었다.
로크에게는 아직도 충분한 야망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걸 원동력으로 삼아 악착같이 버틸 만도 한데 왜 은퇴를 결심한 것일까?
“제 능력이 부족하니까요.”
로크는 담담하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제국의 근위기사단장은 왕국의 근위기사단장보다 뛰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전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왕국의 근위기사단장조차 폐하의 은혜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으니.”
승급권으로 등급을 높인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로크의 재능으로는 지금의 영역에 오르는 것조차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영웅들과 달리 로크는 부족한 재능을 억지로 끌어온 몸이니까.
더는 자신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 것이다.
그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은퇴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근위기사단장 자리가 아니라도 로크에게 내줄 만한 자리는 많이 있었다.
부상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4티어 영웅이니까.
기사들 대부분 로크에게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자리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다. 경에게는 아직 그 정도 능력은 남아 있으니까.”
딱히 내 원칙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로크는 이런 내 권유가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저를 뛰어넘는 모습을 계속 보는 게 쉽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이미 부족한 재능으로 벽을 맛봤기에 그런 경험이 반복되는 걸 꺼리는 듯했다.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로크에게 5티어 승급권을 사용하는 것이다.
부상이 치료되지는 않겠지만 등급이 올라간다면 눈에 띌 정도로 실력이 향상될 터.
그 정도라면 로크와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영웅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미 성장이 끝나버린 영웅에게 투자를 하는 것이니까.
그건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원칙에 맞지 않았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정도로 지금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생각이지?”
“과분하게도 폐하의 은혜로 백작이 된 몸입니다. 거기에 맞는 일을 해야겠지요.”
은퇴한다고 해서 작위나 재산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로크는 이미 백작의 작위를 가진 몸이었고 한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수장이었다.
그러니 은퇴를 하더라도 제국의 귀족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군. 휴식기는 얼마 정도 필요한가?”
지금 네패스 제국은 무척이나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은퇴한다고 해도 백작인 로크를 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참 심란한 상태일 로크에게 다른 일을 맡기는 건 나로서도 미안한 일이었다.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몸이 너무 굳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그래.”
적당히 휴가를 내주기로 한 뒤 로크를 내보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백작인 만큼 제국의 정사를 논할 때 얼굴을 볼 기회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만나게 될 로크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 게 분명했다.
“기분이 묘한데.”
하지만 이런 감상을 느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로크가 나가고 얼마 뒤 이번에는 다니엘이 나를 찾아왔다.
“경도 은퇴할 생각인가?”
다니엘은 지금까지 내 밑에서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해주었다.
나는 그 대가로 암살자 출신인 이들을 받아주고 그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 왔고.
“아직 그럴 시기는 아닐 텐데?”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자면 세월이 좀 지나기는 했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분명 그럴 시기는 아니지요. 하지만 이제는 쉬고 싶습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로크가 재능의 벽을 실감하고도 남으려고 했던 건 야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니엘의 성정은 그런 야망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암살자 출신이지만 이룰 만한 것들은 다 이루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다니엘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보니 피로도가 심하기도 하고.
확실히 오래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후임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다니엘의 은퇴를 받아들여 줄 수는 없었다.
로크의 자리는 대체할 인재가 제법 있는 편이나 다니엘의 자리는 달랐으니까.
게다가 공개적으로 얼마든지 모을 수 있는 기사와 달리 암살자는 인력을 충원하는 게 쉽지 않다.
내가 따로 암살단을 육성할 것도 아니니.
그렇기에 다니엘은 후임이 반드시 필요했다.
“황후마마께서 쓸모 있는 녀석 하나를 데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다니엘이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프레시아 대공을 낚았던 퀴로스를 말하는 모양인데 녀석은 레일리의 사람이었다.
내가 마음대로 데려다가 쓸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레일리가 내주기는 하겠으나 다니엘의 은퇴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황후마마는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어지는 다니엘의 말에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레일리의 설득도 설득이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당사자의 의견도 중요한 법이다.
아무 자리도 아니고 다니엘은 한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으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레일리만 설득하면 충분하다는 듯 자신감을 보였다.
“당사자를 이미 설득했나 보군?”
레일리는 어지간하면 아랫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다.
다니엘이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퀴로스의 의견을 물어보려고는 할 것이다.
그러니 다니엘이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 건 퀴로스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소리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폐하께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다니엘도 이 사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 자리는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떠맡길 수는 없으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설득했지?”
“저희 같은 놈들의 설득이야 뻔하지요.”
암살자의 설득이라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고 협박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고문?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후임을 정하는 일인데 설마 그렇게 거칠게 진행했을까 싶었다.
“잘 상상이 안 가는군.”
“그냥 힘으로 눌렀습니다. 이긴 쪽의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 생각보다는 원만한 편이었다.
기사들처럼 정해진 규칙을 두고 정정당당하게 겨룬 게 아니라 서로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살벌하게 맞붙었을 거 같기는 하지만.
“흐음.”
그런데 방법을 듣고 보니 지적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면 말이야.”
“네?”
“내가 굳이 상대를 이긴 승자를 두고 패자를 후임으로 둬야 할 필요가 있나?”
다니엘이 이겼다면 이는 다니엘의 능력이 더 출중하다는 소리다.
잠재력이라도 퀴로스 쪽이 월등하다면 모를까 다니엘의 잠재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폐하?”
내 이야기에 불길함을 느꼈는지 다니엘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패스 제국은 대륙 통일을 목표로 두고 있다. 당연히 내 수족이 되어야 할 이들 역시 최고여야 하겠지.”
후임을 준비한 건 옳은 선택이다.
다니엘이 은퇴를 하고 싶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일일이 다 봐줘서야 과연 통일 제국을 이룩할 수 있을까?
때로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법이었다.
“굳이 뛰어난 자를 버리고 부족한 이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하지.”
다니엘이 순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말이 물려지는 일은 없었다.
황제의 말은 지엄한 법이니까.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로 즉위하고 처음으로 통촉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도 기분이 좀 묘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고 다니엘은 루시우스에게 끌려 나갔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방금 누가 끌려 나가는 것 같던데?”
다니엘 다음으로 나를 찾아온 건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다니엘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는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은퇴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누군가의 단말마의 비명이 있었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경은 은퇴가 아니라 다른 용건이 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라이언의 방문 목적은 앞선 로크나 다니엘과는 달랐다.
“정확히 어떤 내용이지?”
“다음 전쟁부터 절 곁에 세워주십시오.”
이건 또 의외의 요청이었다.
라이언의 성격상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는 말이기도 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보통 전장에서 황제의 곁에 있다면 가장 안전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다른 군주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마법형 영웅으로서 제법 적극적으로 전장에 나서는 편이었다.
선봉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편이 효율적이기 때문이었고.
물론 군주인 내가 죽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경계를 철저히 하는 편이지만, 그만큼 내 곁을 지키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고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알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
나에게 은퇴하게 해달라고 노래를 불렀던 게 라이언이다.
그래서 내 곁에 있던 이들 중에서 누구보다 은퇴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라이언의 성격상 돈과 작위까지 가진 지금 굳이 다음 전쟁까지 참가할 이유는 없었고.
다니엘과 비슷한 성향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라이언 쪽의 은퇴가 좀 더 자유롭다는 정도였고.
“무엇을 바라고?”
“바보 녀석이 하지 못했던 일을 대신 해주려고 합니다.”
“빅터의 이야기인가.”
라이언이 굳이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한다면 추측할 만한 상대는 하나뿐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게다가 경이 아니더라도 실력 있는 기사는 많아.”
처음에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빅터는 부단한 노력과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으로 자신의 실력을 끌어올렸다.
라이언이 그런 빅터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굳이 경을 받아줄 이유가 없지.”
황제의 곁을 지키는 자리다.
근위기사들은 모두가 최정예이며 라이언은 아쉽게도 그에 미치는 실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를 생각하면 당장의 실력을 떠나서 체력이 받쳐주지도 않을 거고.
“알고 있습니다.”
라이언은 내 말에 긍정하더니 갑자기 화려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라이언이 가지고 있는 귀족의 신분과 영지와 권리 등을 인정하는 내 서명이 담긴 문서였다.
네패스 왕국이 제국이 되면서 새롭게 만든 것이었는데 이걸 꺼낸다는 건…….
“작위를 걸겠다고?”
내가 말하고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라고 해도 라이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니까.
죽은 빅터를 위해서 살아 있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건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라이언과는 맞지 않았다.
이쯤 되니 눈앞에 있는 게 라이언의 탈을 뒤집어쓴 타인이 아닐까 싶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딱히 효력이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라이언은 진심이었다.
“그놈이 죽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지요. 멈추지 않으면 죽는 길이니까.”
부정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당장 빅터보다 실력이 뛰어난 측근들이나 나도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측근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쪽이 신기하게도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렇게 잃고 보니 기분이 더럽더라고요.”
“그래서?”
“남들은 다 폐하께서 대륙을 통일할 거라고 말하겠지만, 전 아닙니다. 아무리 보아온 게 있더라도, 실력이 좋아도 누구나 죽을 수 있는 게 전쟁입니다.”
라이언의 말은 옳았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은 누구나 내가 대륙을 통일할 거라고 말한다.
내가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내건 목표이기 때문에 그걸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능력으로 입증하기도 했고.
하지만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여기까지 와놓고 갑자기 허무하게 죽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같은 기분을 두 번 느끼고 싶진 않습니다. 그 녀석을 위해서라도.”
“그렇단 말이지.”
나는 라이언의 요구를 거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찾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