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3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8화
238화
로스니아 제국의 흡수가 진행되면서 네패스 제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공작의 작위를 가진 아인츠발트에게 영지가 하사되었고, 기존 귀족들 역시 공적에 따라서 승작하거나 추가로 봉토를 받았다.
하지만 반대로 가진 걸 잃은 경우도 있었다.
정확히는 반납한 쪽이지만.
“애초에 도로 가져갈 거였으니 잃었다는 생각도 안 든다.”
아쉽지 않냐는 내 물음에 대한 자크론의 대답이었다.
자크론은 후작으로서의 작위는 유지하되 가지고 있던 영지와 재산은 모조리 반납하기로 했다.
이마저 작위까지 반납하겠다는 걸 내가 절차상 안 된다고 반려했다.
죄가 없는 귀족의 작위를 빼앗는 건 황제로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죽고 나서 회수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깔끔하지 않느냐?”
자크론의 말에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차피 자크론이 죽고 나면 다 회수하도록 준비를 해둔 상태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크론의 죽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조건을 확인하기가 어려워졌기에 자크론이 영지와 재산을 반납한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미련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만…….”
자크론에게는 분명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였다.
이후에 내가 따로 자크론의 가족을 찾아내고 그 사실을 알린 적은 있으나, 자크론은 굳이 그들과 접촉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작위나 재산이 그들에게 이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런 자크론의 생각에 동의했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갑자기 귀족의 신분과 재산을 준다면 무조건 득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편의를 봐줄 생각은 있었기에 작은 지원 정도는 해주도록 조치를 해뒀었다.
그 이후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번에 자크론이 그들을 찾아가겠다며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자크론은 자신도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 왠지 찾아가고 싶구나.”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걸 남인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쉽지 않은 길일 겁니다.”
자크론의 심경 변화가 아무런 계기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건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의 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다고.
자크론은 그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몸의 균형이 깨졌다고 표현했다.
육체라는 그릇이 체내에 있는 마나를 감당하지 못해 금이 가면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이다.
플레턴 스승님에게선 그런 증상을 들은 바가 없었기에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묻자 플레턴 스승님은 증상을 느끼고도 아무도 알지 못하게 숨겼을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잠들듯이 편하게 간 것 자체가 정말 편해서가 아니라 정신력으로 버텼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가야지. 지체하면 더 힘들어질 테니.”
“그럼 사람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제국의 황제다.
원한다면 수십 마리의 준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를 내줄 수 있었다.
또 자크론을 보필해 줄 사람으로, 마을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준비할 수도 있었고.
후작의 작위를 가졌고 황제의 스승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자크론이라면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누려도 괜찮았다.
“일없다. 당장 죽을 건 아니야.”
하지만 자크론은 이 모든 것들을 거부했다.
그냥 길잡이 한 명만으로 충분하다며.
“알겠습니다.”
본인이 바란다는데 내가 억지로 붙여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최고의 길잡이를 찾아보는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정말 길잡이 한 명과 같이 둘이서만 보낼 생각은 없었다.
‘티아라 정도면 뭐라고 안 하시겠지.’
티아라는 켈렌 원로의 후계자이지만 마법사 협회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나도 젊은 나이에 4티어까지 올라간 영웅을 굳이 놔주고 싶은 마음은 없고.
하지만 마법사 협회의 항의가 거세지고 있기에 나름대로 명분이 있어야 했다.
황명을 쓰는 건 좋지 않다.
권위를 생각하면 협회가 반발하지는 못하겠지만 반감을 살 여지는 충분히 있으니까.
그러나 자크론의 제자를 겸한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스승을 하나가 아닌 여럿 두는 건 협회에서도 종종 있던 일이니까.
켈렌 원로의 후계자라지만 자크론의 제자가 못 될 이유는 없었다.
나도 플레턴의 후계자이면서 자크론의 제자를 겸하고 있었고.
그렇게 티아라를 자크론의 제자로 둔 뒤 자크론의 작위와 영토를 티아라에게 넘긴다면?
마지막으로 내가 황제가 아닌 협회장의 지위로 그것을 승인한다면?
켈렌 원로에게는 매우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티아라를 묶어두기에는 가장 완벽한 수였다.
‘협회에는 따로 보상을 하면 되겠지.’
물론 켈렌 원로와 협회에는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뭐냐?”
그때 자크론이 갑자기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방금 그 표정. 뭔가 음흉한 생각을 꾸미는 거 같았는데.”
“그런 적 없습니다.”
안색 하나 안 변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티아라가 자크론의 제자가 된다면 후작의 작위를 받는 것도 딱히 어려울 게 없었다.
자크론은 황제인 내 스승이기도 하니까.
티아라와 내가 완전한 동문이 되는 것이다.
‘협회 반응이 기대되기는 하네.’
협회에서 제명당한 자크론에게서 협회장의 자리에 오르는 제자가 나오고, 거기에 협회 최고의 인재까지 넘어간다라.
물론 협회에서는 나를 자크론의 제자가 아니라 플레턴의 제자로서 밀고 있지만, 티아라와 사제 관계가 되면 자크론의 존재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원로들이 뒤집어질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런 게 기대가 되는 걸 보면 내가 자크론의 제자가 맞기는 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 자크론의 부고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일부러 따로 알아보지 않았으니까.
가정사인 만큼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 치러진 장례식에 가족 중 누군가가 참석하기는 했으니 나름대로 의미는 있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이후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자크론에게서 반납받았던 모든 것들을 작위와 함께 티아라에게 넘겨주었다.
* * *
쾅!
켈렌의 주먹이 탁자를 내려쳤다.
무척이나 무례하고 원로답지 못한 행동이었으나 이를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원로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한 켈렌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소!”
켈렌은 울분을 담아 소리쳤다.
“동감이오.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황제를 도왔는데 뒤통수를 친단 말이오? 게다가 협회장이기도 한데 협회의 인재를 외부로 빼가다니?”
마법사 협회의 원로들은 얼마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예 별격의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 아인을 제외하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티아라가 느닷없이 자크론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선 자크론을 찾아가 항의하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이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이미 자크론은 관에 들어간 상태로 장례식을 하고 있었으니.
협회에서 제명된 인물이기에 제국의 대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자크론의 장례식에 참석한 원로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협회장인 아인이나 켈렌 원로의 제자인 티아라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때 어떻게든 그 현장에 있었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소식을 이토록 뒤늦게 접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항의할 수도 없지 않소?”
한 원로가 한탄하듯 말했다.
분명 티아라를 빼간 게 맞지만 그렇다고 티아라의 소속이 바뀐 건 아니었다.
티아라는 스승인 켈렌에게 외부에서 좀 더 경험을 쌓고, 제국 귀족의 의무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서신을 보내며 나름대로 형식은 지켰다.
물론 켈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문제는 티아라를 강제로 잡아 올 방법이 없단 것이었다.
티아라는 그냥 마법사가 아닌 제국의 귀족이니까.
마법사 협회도 황제가 협회장을 맡으면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 변모했으나 그렇다고 귀족이 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티아라는 그냥 귀족도 아니고 후작의 작위를 가진 몸이다.
당장 티아라가 부릴 수 있는 사병만 일만을 넘어가고 그녀를 따르는 마법사도 수십에 달했다.
대부분은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려 들러붙은 것들이지만 가문이 제법 좋아서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제국 귀족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하겠다는데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하면 자칫 황제에 대한 불경으로 보일 수 있소.”
하지만 역시 가장 거슬리는 건 황제와 협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아인의 존재였다.
아인은 협회장의 권한이 필요하다면 협회장의 이름을, 황제의 권력이 필요하다면 황제의 이름을 쓰며 협회를 농락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원로들은 협회장에 대한 항의가 황제에 대한 반역이 될 것이 두려워 아인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제자면 나도 이런 소리는 안 하오. 하지만 후계자 아니오?”
켈렌은 억울함을 담아 호소했다.
상대가 그저 흔하디흔한 제자 중 한 명이었다면 켈렌도 이토록 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제자가 제국의 귀족이 되었으니 스승으로서 마땅히 자랑스러워했겠지.
나름대로 제자가 보여줄 성의를 기대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나 후계자는 다르다.
자신의 뒤를 이어받아서 원로가 되라고 비전 마법을 전수한 것인데 이래서야 비전 마법만 빼먹고 달아난 꼴이었다.
“그것도 협회 최고의 인재였는데!”
원로들은 켈렌을 향해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비전 마법을 전수하였으니 마땅히 협회에서 일해야 한다는 명분을 세우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협회장인 아인도 막상 협회에 얼굴 보이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플레턴의 후계자이지만 협회장의 자리에만 있을 뿐 협회 내부에서 따로 맡고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원로들도 그게 편했다.
협회장이 되는 과정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아인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자신들보다 한참 어린 상관을 모시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으니.
그러나 이 같은 전례는 현재 티아라를 협회에 묶어두지 못할 나름대로의 이유가 되고 있었다.
플레턴의 후계자도 협회에 직함만 두고 얼굴을 안 보이는데 켈렌의 후계자라고 이를 못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크론의 제자가 되면서 아인과도 동문이 되었기에 더욱 그렇고.
“솔직히 방법이 없소.”
“그건 그렇지.”
애초에 인류 최고의 권력자가 그러고 싶다는데 거기에 반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름대로 보상은 제대로 해줄 테니까.’
아인은 협회와 사이가 틀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대륙의 절반을 점령했으나 아직 절반이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법사 협회는 여전히 황제의 유용한 도구였고 그만큼 황실로부터 많은 대가를 받고 있었다.
티아라라고 하는 인재를 대놓고 빼간 만큼 원로들의 반발을 생각해서 합당한 보상을 제시할 터.
원로 중에는 그 보상을 기대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로스니아 제국에는 마법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있었지. 거기에 있는 기록들을 모두 넘겨주지 않을까?’
원로들은 젊은 마법사들과는 달리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는 않았다.
인간인 이상 그런 것을 싫어하지는 않으나, 거기에 휘둘려서 본분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아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원로들을 달랠 때는 다른 미끼를 던졌다.
주로 점령지의 마법사 집단에게서 얻어내는 비전 마법이나 연구 기록들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로스니아 제국에는 마법사 협회조차 가볍게 볼 수 없는 집단인 기관이 존재했다.
아니, 오히려 기관은 마법사 협회보다도 뛰어난 집단이었다.
평민들이 주축으로 모여 밑바닥부터 이뤄낸 협회와 달리 기관은 로스니아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성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거가 로스니아 제국의 대마법사들이었다.
프로반 백작이나 안덴스 후작과 같은 협회의 원로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추정되었던 이들.
그들을 배출해 낸 제국의 기관이 협회보다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법사 협회조차 그들이 가지고 있을 지식에는 군침을 흘려야만 했다.
‘티아라 정도라면 마땅히 그 정도 보상을 해주어야겠지.’
켈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고 원로들도 내심 분노하고는 있었으나 그 유혹을 참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켈렌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며 넘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대륙을 통일하고 나면 대륙의 모든 마법의 지식이 협회에 모일 텐데. 여기서 황제에게 밉보여 그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는 없지.’
그래도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야 좋지 않을 터.
원로들은 티아라는 버린 셈 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논의하는 쪽이 현명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켈렌 역시 자신의 심정에는 동감해 주면서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 없는 원로들의 태도에서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 후계자는 아니니까 상관없단 거냐?’
솔직히 티아라 정도가 아니면 아인이 굳이 협회와 척을 져가며 빼갈 이유가 없기도 했다.
다른 원로들의 후계자를 헐뜯을 생각은 없으나 객관적으로 티아라에 비하면 분명 손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티아라가 사라지며 그 대가로 더 큰 지식이 손에 들어올 테니 다른 원로 입장에선 남는 장사였다.
‘제기랄! 나도 확 귀족이나 되어버릴까?’
순간 켈렌은 원로의 자리에 대한 회의감과 더불어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협회에 바친 세월이 너무 길었으니.
게다가 원로로서 협회 내부에 있는 무수한 비전 마법들을 보아온 자신을 다른 원로들이 곱게 놔줄 리 없었다.
켈렌은 이뤄질 수 없는 미래에 아쉬움을 느끼며 입맛만 다셔야 했다.